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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9
「오라버니, 이것은-」
「이건 아주 귀한 물건이란다. 아주 먼 옛날에 우리 고조부님께서 ‘아유타국’이라는 먼 나라로부터 가져오신, 상아로 만든 상자이지.」
「상아..요?」
「고려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동물의 뼈로 만든 것이라더구나. 고조부님께선 이 상자에 보물을 담아 고조모님과 성혼을 하셨지.」
「사연이 있는 물건이네요.」
「상자 안에는 물건도 담을 수 있지만, 뒤집어서 밑부분을 이렇게- 누르면 비밀 공간이 나타난단다.」
「신기한 물건 같아요. 게다가 사연이 담긴, 이렇게 오래된 물건이었다니, 제가 감히 만질 수 있는 게 아니었군요.」
「..언젠가 이것을 너에게 주마.」
「네..?」
「네가, 나의 아내가 되어준다면 말이다.」
...
잠들기 위해 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은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조용히 이불을 걷어내고 앉아 제 옷가지들 속에 숨겨놓은 상아 상자를 꺼냈다. 분명 이 상자가 제게 닿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 테지. 은은 조심스레 상자를 살폈다. 그리고 상자를 뒤집어 밑부분을 살짝 눌러 보았다.
“.......!”
역시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눌려진 부분이 열리며 나타난 비밀 공간에 여러번 접어 넣은 작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은은 쪽지를 손에 움킨 채 어둠 속에서 주위를 살폈다. 커다란 방 안의 모든 궁인들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에 은은 이불을 덮어쓰고 호흡을 고르며 쪽지를 차근차근 펼쳐 나갔다.
「-이 상자가 너에게 무사히 닿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겠다. 또한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무사히 잘 지내고 있다는 뜻이겠지. 나는 아직 대도에 머물고 있다. 늘 가까이에서 널 그리고 있으니 잊지 말거라. 반드시, 반드시 널 데리고 고려로 돌아가겠다. 그 때 까지 건강히. 그리고 이 마음을 곁으로-」
편지에는 받을 사람의 이름도, 보내는 사람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걸 읽어야만 하는 사람은 은 자신이라는 것과, 보낸 사람은 물론 그리운 그 분이라는 것을.
은은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접어 내린 뒤에도 여전히 두근대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어, 이불 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잘 버텨내고 있다고, 누구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음은 지금 당장이라도 오라버니에게 달려가 응석을 부리고, 제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달라고 떼라도 쓰고 싶었다. 그리고 여기 담긴 약속의 말처럼, 얼른 저를 고려의 땅으로 데리고 가 달라고 애원하고 싶어졌다.
...
“소란아!”
“아, 은아. 잘 잤니?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지?”
“너 오늘 황성 밖에 다녀와야 한다고 했지?”
“..응. 그건 왜?”
“그거, 내가 다녀올게.”
“니가?”
“응. 나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 내가 다녀오려구.”
“하지만, 상궁마마께서-”
“상궁마마께는 내가 허락을 구할게. 물론 조금 꾸지람을 듣겠지만.”
좋을 대로 해도 괜찮지만, 다녀올 때 조심하라는 소란의 당부를 듣고 은은 웃으며 뒤돌아섰다. 편지와 이 일들을 생각하느라 날이 밝도록 잠을 한 숨도 이루지 못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우연처럼 꼬리를 물고 엮어진 이 기회들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귀한 찻잎을 다시 구하는 일은, 고 환관의 저택으로 찾아간다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은은 오후에 황성을 나갈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하며 제 몫의 일을 다 하기 위해 쉴 틈 없이 걸음을 옮겼다. 천운이 따른다면 오라버니를 뵐 수 있을지도. 은의 모습이 여느 때보다 활기차고 의지에 넘쳤다.
//貢女 奇皇后//
“도착한 것 같습니다, 대감.”
기자오의 마차가 고 환관의 저택 앞에 당도한 것은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수 삼일에 걸쳐 마차를 달려 온 사람으로써는 충분히 지치기도 했을 여정이었겠으나, 기자오에게서는 그런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저택 안에서 집사가 달려 나와 기자오를 극진히 맞이했다.
“어서오십시오, 대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태감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아직 퇴청하지 않으셨습니다. 대감께서 도착하시면 전갈을 넣기로 되어 있으니 곧 돌아오실 겁니다. 그 때 까지 여독을 푸시고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잘 모시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거 감사한 일이로군. 그럼.”
한 발 안으로 들여놓는 기자오에 앞서 집사가 방을 안내했다. 손님을 맞기 위해 따로 지어진 별채로, 그 ‘별채’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훌륭하고 나무랄 곳 없이 꾸며진 방이었다. 편히 쉬십시오, 라는 말로 집사가 물러가자 방에는 기자오와 그를 따른 수하만이 남았다.
“원에서 이 정도 부(富)를 끌어안고 있었던 주제에, 나를 그런 식으로 구슬렸단 말이지.”
“왜 그러십니까, 대감.”
“아무것도 아니다. 석이 넌 곧장 밖에 나가 이우겸, 그 녀석에 대해 알아 보거라. 어디 머물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면 더 좋고.”
“알겠습니다.”
석이 곧바로 방을 빠져 나간 뒤, 기자오는 잠시 쉴 요량으로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하다가 몇 안 되는 제 짐들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허리를 굽혀 낮은 곳에 있는 짐 꾸러미를 들어 올리려다가 제 옷섶에 이겨 넣었던 부인의 손수건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본다. 잠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그가 의미 없는 손길로 주워 제 짐들 속 어딘가로 다시 넣어버린다.
이제 남은 것은 곧 돌아올 고 환관을 기다리는 일. 그가 돌아오면 그 날 서로 맺었던 약조를 다시금 확인하고,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확약을 받는 것, 그것뿐이다.
“대감, 황성에서의 전갈입니다. 태감 어르신께서 곧 당도하실 것이옵니다.”
//貢女 奇皇后//
“저어기, 저 쪽 모퉁이를 돌면 있을거유. 원체 큰 저택이니 못 알아 볼 수가 없을거외다.”
길을 알려준 사내는 바삐 제 갈 길을 가 버린다. 은은 큰 숨 사이로 마른 침을 삼키며 다시 걸음을 뗀다. 그는 지금쯤 퇴청하여 저택에 머무르고 있겠지. 그를 마주하게 된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차근차근 머릿속을 정리하며 은은 길을 재촉했다. 방향을 알려 준 사내의 말처럼, 저 앞, 언젠가 딱 한 번 들른 적이 있었던 고 환관의 궁궐 같은 저택의 지붕이 모습을 드러냈다.
많은 상황이 은을 ‘그 곳’으로 인도했다. 마침 도착하여 안채로 들어가는 고 환관을 응대하느라 대문 앞은 텅 빈 채 열려 있었고, 식솔들과 저택 안의 하수인들은 고려에서 온 거물급 손님을 맞이하는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다들 바빠서 은이 머뭇머뭇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사이에도 누구 한 사람에게조차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은은 몰래 들어 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 저택 안에 벌어진 상황들을 모른 채 태연히 고 환관의 방으로 향했다. 은의 시야 안에 불 밝혀진 고 환관의 방 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기 대감. 갑자기 오시겠다는 전갈을 받고 우리도 당황을 했습니다만.”
“그리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생각지 못했던 방해꾼이 한 마리 끼어든 것 같아 이리 직접 오게 되었지요.”
“방해꾼이라면-”
“이미 알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만.”
“아, ‘그 청년’ 이라면 이미-”
“아니요, 저는 다만 그 녀석이 태감께 어떤 무례를 범했든 지간에 우리의 계획에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임을 확인시켜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오.”
“없을 겁니다. 없어야 하구요. 이 일에 제가 얼마나 많은 것을 걸었는지는, 태감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알다 뿐이겠소. 모쪼록 대감께서 알아서 해결하시겠다니, 나는 그 말을 믿기로 하겠소.”
“물론입니다. 헌데 그 아인, 잘 지내고 있습니까.”
“따님의 안부를 이제야 물으시는군요. 별 탈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소만.”
“아무렴 태감께서 잘 돌보아 주시겠습니까마는, 될 수 있는 대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할 일은 마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제 모든 것이 그 아이 손에 달려있질 않겠소.”
“여기서 그 아이를 지켜봐 줄 수 있는 사람이 태감뿐이겠기에 드리는 말씀이지요. 한 가지, 태감께서 잊지 마셔야 할 것은, 우리의 약속이 쌍방으로 이뤄진 점이라는 것일 겝니다.”
“지금 나를 겁박하겠다는 거요.”
“그 무슨 당치않은. 이왕 서로 상부상조하기로 한 약속이니 어느 한 쪽도 이행에 소홀해서는 안 되질 않겠습니까.”
“새삼 기 대감의 수완이 대단한 것으로 느껴지는구려.”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이미 내 손으로 공녀 명단에 그 아이의 이름을 끼워 넣을 때부터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시작되질 않았습니까. 그 아이가 원의 안주인이 된다면야, 어찌 그때 가서 감히 태감의 은혜를 모른다 하겠습니까.”
“그 말, 잊지 않고 새겨두겠소. 하하.”
...
양 손으로, 밀어 넣듯 입을 막은 은이 그 자리서 조금씩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창호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비치는 저 인영은 분명 내 아버지의 것이 맞는데, 내 아버지의 음성이 맞는데.. 지금 제 귀로 확인한 것은 마치 악귀의 장난질처럼 하나같이 믿을 수 없는 사실들뿐이라서 떨리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뒤로 한 발 내딛은 은이 마른 나뭇잎을 밟았을 때에도.
-사각
“...밖에 누구더냐!”
경계하며 목소릴 높인 고 환관이 방문을 열고 내다보는 사이를 피해, 은은 몸을 숨겼다가 저택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대문을 등지자마자 정신없이 내달렸다. 황성으로 되짚어 가기에도 복잡했던 길을, 어디가 어디인지 내다보지도 않은 채 훌쩍이면서 무작정 달리듯 잰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몰아닥친 배신감과 울분에 치 떨리는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우왕좌왕하던 은이 어느 골목의 낮은 담벼락 아래 주저앉는다. 그리고 잠시 울었다. 그러나 제 울음을 마음껏 받아 줄 수 있는 땅이 아니라는 생각에 목 놓아 울어버리진 못하였다.
은은 이를 앙다물고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무도 저를 알아보는 이는 없을 테지만, 하늘에도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인 채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담벼락을 짚어나갔다. 모퉁이를 돌던 순간, 은은 누군가에 부딪쳐 다시 힘없이 주저앉았다. 커다란 손이 은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우는 동안에도 은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미처..”
손등으로 반쯤 얼굴을 가린 채, 은은 대강 몸을 돌려 세웠다. 놓아주지 않는 팔에 대고 그만 가보겠다고 말을 해보지만 대답 없는 인영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이제야 겨우 찾고 만다. 제가 마음 편히 목 놓아 울 수 있는 장소를.
첫댓글 어머.은이우겸을만난건가요!
후안 님★ 다음화가 답이 될거예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이우겸 씨 만난건가요!!! 근데 아빠라는 사람이 참....
까불지마ㅋ 님★ 기자오, 아버지의 자격이 많이 부족해보이죠. 다음화도 확인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별이 님★ 가족이라서 더 아프고 비통한 일일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음화에서 뵐게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악 그래서 저 아비를 걱정했던건데!!! 고려가 아닌 낮선 땅에 마음 놓고 울 곳 이 없다는 건 정말 슬플것 같아요. 개인적인 마음으론 우겸보단 황제가 따뜻하게 품어 줄 수 있길 바래요 ^^
헤르티아 님★ 두 사람 가운데 마지막까지 은이 의지하게 될 곳은 어디일까요, 앞으로도 관심있게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해요^^
은과 우겸이 만났나보네요ㅎㅎㅎ 그런데 기자오 대감은 은을 그저 '이용'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걸까요??ㅠㅠㅠㅠ 기자오 대감이 갑자기 미워지려고 해요ㅠㅠㅠㅠ
유리별미곰 님★ 은에게는 참 나쁜, 비정한 아버지네요. 은이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지, 다음화도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목 놓아 울수 있는 장소
필연적인 만남인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