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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은총의 빛 속에 머물기 위해>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 채, 두고두고 미워하며, 마음 가득 분노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과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독이 되는 것인지를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하기 전, 일곱 마리 마귀가 들렸던 여인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제 체험상 그 일곱은 아마도 그녀가 용서하지 못하고 있던 일곱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저도 한때 일곱까지는 아니었지만, 제 안에 동시다발적으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 몇 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제 삶은 참으로 피폐해지더군요.
그들이 제 내면에 우르르 자리 잡고 있다보니, 제 삶이 제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제 인생을 움켜쥐고 좌지우지하다보니, 기도나 영적생활, 충만한 삶이나 내적인 평화는 아예 기대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화사한 봄이 오고, 해가 중천까지 떠서 환한 낮이 와도, 제 인생은 언제나 깜깜한 어둠 속이었습니다.
그렇게 분노와 미움, 우울과 어둠이 제 삶을 휩쓸다보니 정신적 건강도, 육체적 건강도 점점 잃게 되었습니다.
주님 은총의 빛 속에 지속적으로 머물기 위해, 다시 말해서 성령안에 머물기 위해,
가장 중요한 노력은 마음을 비우는 작업입니다.
내면을 정리하는 작업입니다.
결국 힘겹지만 내 안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악의 세력들을 몰아내는 작업입니다.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 일, 다시 말해서 용서하는 일입니다.
지난 정부에서 저지른 어처구니 없는 과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와의 국민적 합의나 피해당사자들의 동의없는 정부 측의 일방적이고 굴욕적 합의-
에 대한 현 정부의 성찰과 재고 작업에 크게 환영합니다.
진정한 용서를 위해서는 일련의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개인을 뛰어넘어, 국가나 민족 차원의 것이라면 더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독일의 거듭된 진정성 있는 사죄는 일본 지도자들이 반드시 눈여겨볼 일입니다.
지난 한-일 역사 안에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순간에는,
언제나 정신나간 지도자들이 있었고, 친일 세력이 있었고, 그 잘난 돈 몇푼이 있었습니다.
사실 독재자는 유한합니다.
배상금이라는 것도 잠시뿐, 즉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와 국민은 영원합니다.
참담한 슬픔은 오래갑니다.
중차대한 범국가적, 범국민적 사안에 대한 졸속 협상과 합의는 무효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전 세계 앞에 공식적, 공개적 사과가 우선입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는 저 거대한 악의 세력,
그리고 동족이면서도 그런 세력에 빌붙어 살아가는 불쌍한 끄나풀들의 회개를 기원합니다.
- 살레시오수도회 한국관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떤 분께서 “저는 겨울이 제일 싫어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다른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겨울이 4번째로 좋은 계절이에요.”
분명히 다른 대답으로 보이지만 두 분 모두 겨울보다는 다른 계절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겨울이지만 이를 대하는 차이는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즉, 겨울이 싫다고 딱 잘라서 말하신 분은 겨울이 싫은 이유를 계속해서 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4번째로 좋다고 말씀하신 분은 비록 다른 계절에 비해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좋은 이유를 계속해서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 대답을 찾게 되면 좋은 것만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대답을 찾게 되면 나쁜 것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나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얼마 전, 아는 지인과 대화를 함께 나누면서 승강기에 탔습니다.
저희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지요.
잠시 뒤, 승강기 문이 열렸는데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상 5층에 내려야 하는데, 승강기가 지하 2층에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승강기가 고장 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야기에 집중하다보니 글쎄 우리들이 가려던 층의 숫자를 누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층의 숫자를 눌러야 합니다.
귀찮다고 힘들다고 내가 가려는 층의 숫자를 누르지 않는다면,
또 다른 일로 인해 숫자를 누르지 못하면 원하는 층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귀찮고 힘들어서 남들이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자신의 생각과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시메온 예언자가 나옵니다.
그는 오랜 시간 그리스도를 기다렸지요.
포기할 만도 합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를 뵙고 찬미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느라 지쳤다면서 실망하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볼품없어 보이는 예수님 가정이었지만 곧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었지요.
그리고 지금 현재까지 그의 찬미 노래는 시간경인 성무일도의 끝기도에서 계속해서 바쳐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간직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자신이 원하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절대로 포기나 실망을 해서는 안 됩니다.
- 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
<제 눈이 당신 구원을 본 것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이 모세의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굳이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율법의 지배를 받으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갈라 4,4-5)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루카 2,28) 노래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 2,30)
그렇습니다.
‘어린 아기에게서 구원을 보는’ 시메온의 눈은 관상의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십자가의 예수님을 마주보고 있었던 백인대장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마르 15,39)
아마 신비를 바라보는 눈을 가졌기에 독수리 복음사가라 불리는 요한의 눈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 눈은 그가 쓴 오늘 <제1독서>에서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되는’(1요한 2,3)눈으로 드러나는 관상의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하늘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독수리는 날개 짓을 하지 않고도 하늘을 유유자적합니다.
바람을 타고 있는 까닭입니다.
독수리는 유유자적하는 펼쳐진 날개도 아름답지만, 사실 독수리의 진짜 아름다운 곳은 눈입니다.
독수리는 시력이 5.0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멀리 높은 곳에서도 환히 본다고 합니다.
그 눈을 바라보는 이는 결코 매료당하지는 않고는 못 배겨 납니다.
얼마나 맑고 흠 없이 영롱한 지, 그 눈을 바라봤다가는 이내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저는 고성에 있을 때, 독수리 돌보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산속에 추락하여 있는 독수리를 발견하여 가슴에 품고 산을 내려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독수리의 눈을 가리는 일이었습니다.
눈을 가려주어야 겁먹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눈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토록 맑은 눈을 보면 그 눈동자 안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하늘과 땅을 꿰찔러 신비를 바라볼 수 있는 그러한 영의 눈이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1미터씩이나 되는 양 날개를 가졌지만,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은, 마치 풍선처럼 가볍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람을 타고 다닐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그렇구나, 관상은 몸이 가벼워야 하는 법이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가 있었습니다.
영혼의 몸무게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맑은 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린 아기에게서 구원을 보는’ 시메온의 눈을 지녀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을 통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 2,30)
<신앙인은 게으를 수 없습니다>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악한 사람도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못돼 보이고 자기는 완전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요한복음은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죄인으로 판결 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요한3,19)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지만
그분을 환영하기까지는 너무도 오랜 세월과 많은 고통이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메온이 예언한 대로
‘많은 사람들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기도 하셨고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겪게 되는 적대감으로 인해
마리아의 마음도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빛을 기다리고 빛을 받아들이는 지혜, 그리고 그 빛을 누리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 받을 때를 기다리며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29-32)
시메온은 끝까지 기다렸고 마침내 모든 것을 이루었고 감사하였습니다.
시메온에겐 구원이 전부였고, 예수님이 전부였습니다.
우리도 매사에 참고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삶의 여러 가치 중에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제일 먼저라고 고백하는 신앙인의 삶은 게으를 수 없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위해 제 삶을 다듬고 고치고 정리하는 데 열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께유)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파견하신 메시아이시며 모든 나라를 비추는 빛이십니다.
이는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이사 49,6)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사 52,10)
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일상을 빛으로 살고 결코 빛으로 오신 주님을 거부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성모님께서 영혼이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냈듯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우리의 인내를 통하여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부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의 계명 준수 - 늘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
오늘 제1독서에서 요한은 ‘사랑의 계명 준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오늘 복음은 그 좋은 본보기로 예수님의 부모와 예언자 시메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주장하는 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라는 것이며 새삼 설명이 없을 정도로 명료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는 표현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인의 내밀한 관계를 가리킵니다.
쉬운 표상으로 ‘하느님의 품 안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흔히 동서고금의 신비가들이 말하는 신인합일을 뜻하지 않고 내밀한 친교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의 정주서원의 핵심도 바로 이러합니다.
‘---안에 머물러 있다’는 표현은 무려 요한1서에 14회, 요한복음에 10회 나옵니다.
바로 사랑의 계명을 준수할 때 저절로 주님 안에 머물며 주님과의 내밀한 관계 속에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건강하고 건전한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라 하겠습니다.
사랑의 관상가, 사랑의 신비가, 사랑의 기적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 삶의 중심은 언제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삶의 본질은 사랑이요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모범이신 그리스도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방법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안다.” 하면서도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사랑이 바로 진리입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을 알다’라는 표현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그분께 대한 추상적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그분과 일치를 이루며 사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참된 앎의 기준은 그분 계명의 준수, 곧 근본적으로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 탄생으로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새 계명의 빛이자 사랑의 빛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한 은총의 빛입니다.
그러니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미워하는 것은 암흑 속에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필자는 심지어 이런 미움은 살인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사랑의 빛, 미움의 어둠입니다.
바로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 사랑의 빛속에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으며
미사 은총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의 빛 속에 살게 해줍니다.
물론 이에 앞서 당연히 전제되는 바 하느님 사랑의 계명 준수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 부모이며 시메온 예언자입니다.
예수님 부모의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봉헌하는 모습에서
이분들이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평생 의롭고 독실하게 살며 위로 받을 때를 기다리는 시메온 역시 계명 준수의 모범입니다.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로 계셨다니 계명 준수의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마침내 평생을 주님 사랑의 계명에 충실했던 시메온은
사랑의 주님을 만남으로 소원이 성취됩니다.
우리가 끝기도 때마다 바치는 시메온의 아름다운 노래가
바로 오늘 시메온의 감격에 벅찬 고백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메온의 그 감동 가득한 심정으로 시메온의 노래를 불러야 함을 배웁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시메온의 노래와 장상의 강복, 성모찬가로 하루를 마치는 끝기도의 수행에 충실할 때 선종(善終)의 복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메온의 축복과 더불어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예언이 의미심장합니다.
마치 빛과 어둠의 양면을 보는 듯 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대로 마리아와 아드님 예수님에 대한 암울한 예언입니다만,
두 분 모자는 끝까지 사명 준수에 충실하며 하느님의 ‘예스맨(YES-MAN)’으로 사셨습니다.
말 그대로 두 분 다 시종일관 사랑의 승리, 믿음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를 뜻하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우리 삶의 양면인 빛과 어둠 모두를 받아들여 하느님의 예스맨으로 살아갈 때
주님 친히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사랑 계명 준수에 충실한 삶을 살게 하시며
날로 당신과 사랑의 관계를 깊게 하십니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가난 속에 사랑으로 오신 주님을 찬미함>
마리아와 요셉은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주님께 바칩니다(루카 2,22).
이로써 하느님 친히 전 존재를 인간의 손에 맡기시는 경이로운 가난이 우리 가운데서 드러났습니다.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간의 질서와 법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들어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일 년된 어린양 한 마리를 번제물로 바칠 수 없을 만큼 가난하여 비둘기를 정결례 예물로 바쳤습니다(2,24).
가난하게 오신 주님께서는 모두를 봉헌하셨기에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아기 예수는 속죄되는 대신 성전에서 하느님에 의해 성별(聖別)됩니다.
인간의 손에 의해 하느님께 봉헌되신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를 위해 ‘피를 쏟아’ 죽기까지 자신을 봉헌하심으로써 인류를 구속하실 것입니다.
구세주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법규와 제도까지도 받아들이며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영원한 선이 회복되도록 인간의 현실과 운명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시메온은 가난 속에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찬양합니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십니다.” (2,26)
그가 성령의 이끄심 아래 이스라엘을 ‘위로해주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의롭고 독실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2,25).
시메온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겸손하고 영적인 사람이었지요.
뿐만 아니라 그는 구세주 메시아로 오신 아기를 알아보는 영적 감각과 분별력을 지녔습니다.
그는 구세주를 팔에 안음으로써 하느님의 뜻과 구세주의 미래를 전적으로 수용하며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2,28-31).
시메온은 오랜 세월 메시아를 기다려온 이스라엘의 마지막이자 참된 응답을 노래로 표현합니다.
시메온의 노래는 어렵고 힘든 삶의 여정 가운데서 항구하게 구세주를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을 찾은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구원의 노래입니다.
이 찬가가 우리 삶에서 반향되어야겠지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이스라엘에게는 영광” (2,32)을 본 의로운 종, 시메온은
구세주를 알아보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습니다(2,29).
이 찬가에서 우리는 가난한 나자렛 가정의 봉헌 속에 만민의 빛으로 오신 분을 어떻게 맞아들이며 살아야 할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구세주를 알아 뵙고 주님께 찬미를 드리며 살려면,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이며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1요한 2,4).
하느님의 말씀을 지킬 때, 하느님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2,5).
우리 모두 시메온처럼 겸손하게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고,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며(2,6),
자기 형제를 사랑함으로써(2,10)
하느님 안에 머무는 복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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