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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참 신앙의 기적은 십자가에 있다
얼마 전 신문에는 로마의 한 성당에서 피눈물 흘리는 성모상에 관한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수녀한테 발현한 예수께서 카메라에 찍혔다며, 교황청의 인가를 받아 그때 받은 사적 계시의 내용을 담은 “성스러운 호소”라는 책이 신문에 전면 광고되고 있습니다. “성스러운 호소”라는 책을 읽고 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상주 데레사니 나주 율리아니 하는 이들이 사적 계시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만. 믿음이 부족해서인지 이런 발현이나 사적 계시에 대해서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듭니다. 이런 “성스러운 호소”라는 책이나 사적 계시 · 발현들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요?
“성스러운 호소”라는 책의 진상
위의 질문에 답변하기 전에, 예수께 대한 신심보다는 예수께서 사진에 찍혔다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내용으로 일간지에 대대적으로 광고한 출판사의 양식을 묻고 싶다. 그들은 여러 신문의 많은 지면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그럴싸한 질문을 한다. “이 충격적인 내용의 책이 사실인가?” “왜 한국 교구의 인준을 받지 않았는가?” “이토록 놀라운 사실을 기록한 책을 어찌하여 신부님이나 목사님들이 많이 모르고 있는가?” 이런 식의 질문으로 출판사측은 그 책의 내용이 진실인 것처럼 선전하고, 거기다 마치 교황청까지 이 일을 인정하고 후원한 것처럼 거짓 선전한다. 그런가 하면 의도적으로 ‘…’이라는 부호를 사용, 독자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성직자와 교회에 대한 불신을 더하게 한다. 예수께서 사진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부호로 예수의 메시지를 삭제한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불손한 행위로 예수님까지 상품의 한 품목으로 이용하려는 출판사의 상술에 아연할 뿐이며 마음이 아프다.
이 출판사가 일간지에 광고한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가톨릭신문”에 실린 대로이다. 여기에 한 구절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 백남익 몬시뇰은 ‘교황청의 관계자에게 확인해 본 결과 이 책이 교황청의 공식적인 출판 허가를 받은 바 없고, 카메라에 찍혔다는 예수의 사진도 공식적으로 인정된 바 없다.’고 말했다”(1995년 3월 26일자).
“성스러운 호소”류의 책들
교황청을 끌어대어 출판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쨌든 스스로 그 책이 진실되지 못한 것임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건전한 책이라면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보통 신앙에 관련된 책은 교구 직권자의 허가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교황청을 들먹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출판사측은 스스로 교황청의 승인을 받은 이 책이 왜 한국 교구의 인준을 받지 못했는가? 라는 물음을 던져놓고는 “그런 인준 절차가 있는지 몰라서” 그랬을 뿐이라고 답변한다. 교묘한 상술이다. 교황청을 들어 출판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책은, 일단은 모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그런 책은 예수님이나 성모님에 대한 신심보다는 저자의 사적인 환시나 조작된 기적을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을 흐리게 하는 것들이다.
위의 ‘성스런운 호소’ 외에 시중에 나와 있는 그런 류의 책들을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현혹되지 말기를 바란다.
- 예수님 성모님의 40일 엄재 수난 숨은 행적(미리내 성모성심 수도회, 빅벨 출판사, 1987)
- 데레사의 지난 일들(미리내 성모 성심 수도회, 빅벨 출판사)
- 나주 율리아의 책들과 비디오테이프
이 밖에도 종말론과 소위 파티마 제3의 비밀에 관련된 여러 서적들이 시중에 유포되고 있어 신앙생활에 혼란을 주고 있다.
조작된 기적이 가져온 혼란
이런 책들을 보면서 흑자는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래도 거기에 나오는 비판과 지적은 옳지 않은가?” “그들과 그들 추종자들은 착한 사람이고 열심한 사람이 아닌가?” 물론 그들이 한 말이 옳을 수는 있다. 그러나 옳다고 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메시지일 수는 없는 것이다. (세상에 옳은 말이야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문제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그들의 사적 견해와 조작된 기적으로 이끌어 넣었다는 데에 있으며, 더 큰 문제는 신앙이다. 위의 책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에 위기를 가져다주었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결코 예수님(과 성모님)의 뜻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예수님이 사진에 찍혔는지, 또는 나주의 성모상이 정말로 피눈물을 흘렸는지, 또는 성모님이 미카엘 천사를 시켜 죄많은 사제가 영하려는 성체를 빼앗아 나주의 율리아한테 주어 율리아를 당신의 사제로 삼았는지(이 일은 지금 나주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조사 중이기에 자세한 언급은 여기서 삼간다.) 하는 것을 직접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성경의 한 대목을 예로 들어 독자들의 신앙의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호기심으로 부활(?)하시는 예수
부활하신 예수께서 엠마우스로 귀향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이다. 제자들은 -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 반나절을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으며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정작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몰랐다. 불과 이삼 일 전에 헤어진 사랑하는 주님을 못 알아본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들의 기억력이 갑자기 쇠퇴해졌는가? 그렇지는 않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사진에 찍힐 수 있는 그런 존재로 부활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그런 과학적인 방법을 거절하셨다. 신앙은 과학 이상의 것이다. 부활한 예수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그분을 사진에 담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그런 호기심을 채워주시며 당신을 나타내지 않으신다. 엠마우스의 제자들한테처럼 살짝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십자가에 대한 신앙을 갖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베드로도, 토마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제자들도 사진에 찍힌 예수님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신앙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체험하였다.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토마한테 나타나셔서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요한 20,29)고 말씀하신 것도 이 때문이다. 사진이나 기적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니다.
환시는 신앙의 될 기준일 수 없다
“성스러운 호소”라는 책이나 나주 · 상주가 주장하는 기적이나 환시에 대한 이야기의 문제점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체험한 환시나 기적을 신앙보다 강조하여 우리의 신앙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데에 있다. 환시가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젬마 성녀가 자기의 영적 지도자에게 보고한 편지에서 볼 수 있다. “제가 이것을 신부님께 말씀드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믿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이는 또한 제 어리석은 생각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환시는 하느님 편에서만 일방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환시를 본 사람의 일이기에, 환시자의 주장에 잘못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성경에는 기적 이야기가 수없이 많이 나온다. 예수께서도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러나 기적 자체가 중심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기적은 신앙을 위한 것이고, 그 때문에 예수께서는 신앙이 결여된 곳에서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아니 기적을 행하실 수가 없다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기적을 일으키실 적에도 먼저 신앙을 요구하셨다.
그러면 예수께서 강조한 신앙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인간은 괴로울 때나 슬플 때, 그리고 내 신상에 무슨 좋지 못한 일이 생기면 혹시나 하느님께서 나를 떠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가 쉽다.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잃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나의 아픔, 나의 고독, 나의 고통 가운데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떠나지 않고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참다운 신앙인은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바라지 않고, 오히려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도 하느님께 신뢰하는 인간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시오. 그러면 우린들 안 믿을 수 있겠소?” 하고 조롱한다. 말하자면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는 기적, 고통이 쾌락으로 바뀌는 기적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그런 기적이 일어나면 믿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의 조롱을 들으셨는지 마셨는지 십자가에서 맥없이 돌아가셨다. 소위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그때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는 기적을 보이셨다면, 그분은 우리의 신앙에서 벌써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참 신앙의 기적은 십자가에 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왜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는 기적을 거부하신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사고로는 도저히 하느님께서 계실 수 없는 그곳, 아니 하느님께서 저주했다 싶은 그곳, 인간의 절망이 극치에 도달한 그곳, 저주받은 십자가 위에서조차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이 ‘보니 좋더라’며 창조하신 인간들에게 충실하시어 당신이 달린 십자가에 함께 달리시고, 함께 죽으신다는 것을 믿었고, 이 믿음 때문에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하고 운명하실 수 있었다. 하느님께서 도저히 계실 수 없는 그곳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참 기적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고통이 기쁨으로 바뀌는 기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믿을 것은 오직 십자가이며 그 위에 달린 부활의 생명인 것이다.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이 믿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는 기적을 보면 믿겠다는 요구는 하느님께서 십자가에도 계신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하느님께서 정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것은 신앙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그 혹독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는 기적을 마다한 그 예수께서, 20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사이 마음을 바꾸시어 이제는 기적으로 사람들한테 신앙을 심으려 한 것처럼, 자신을 사진에 찍히게 하시면서까지 조잡한 기적을 꾸며 사람들의 신앙을 북돋우려 한것처럼, 그래서 스스로 당신의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않은 기적을 거부한 것처럼 십자가를 대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않은 예수님의 마음을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십자가에도 하느님께서는 계신다며 끝까지 거기에 매달려 생을 마친 예수님의 믿음 그리고 당신 아들과 함께 십자가에서 운명을 같이하신 하느님의 충실을 우리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께서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 하고 한탄하신 것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요한 4,48 참조).
더 이상 계시할 신앙 내용은 없다
이것은 기적이나 징표만을 보고 믿는 신앙이 부족한 인간들을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마태오 복음에는 종말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어떻게 해서라도 뽑힌 사람들마저 속이려는 큰 기적과 이상한 일들을 보여줄 것이다. … 그러나 너희는 믿지 말아라.”(마태 24,24-27) 하고 기술되어 있다. 또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 문의한다든지, 어떤 시현이나 계시를 받고 싶어한다든지 하는 사람은 바보짓을 할 뿐 아니라, 하느님을 욕되게 하리니 그리스도 한 분만을 우러러보지 않고 다른 엉뚱한 신기한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이와 같이 대답하실 것이다. ‘내가 이미 내 아들인 말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다 말해서 다른 말이 없거늘, 이제 와서 무엇을 더 대답할 수 있고 이 ‘말’ 아닌 무엇을 또 계시할 수 있느냐? 너는 오직 이분에게만 눈길을 모아라. 이분을 통하여 너에게 모든 것을 계시했으니 네가 빌고 바라는 그 이상의 것을 이분 안에서 얻으리라. 너는 나의 말과 계시를 청하여 하나의 부분을 얻으려 하지만, 이분에게 눈길을 모으면 전부를 얻을 수 있으리라. 이분이야말로 온통 나의 말, 나의 시현, 나의 계시 … 이분을 너희에게 형으로, 친구로, 스승과 갚음과 상으로 줌으로써 나는 너희에게 말하고 대답하고 나타내고 열어보였노라.’”
하느님한테는 더 이상 계시할 신앙의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또 무엇인가를 더 계시하기를 청한다면, “그것은 다시 그리스도를 청하는 셈이요 더한 신앙을 바람이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믿음이 모자라는 셈이 되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을 심히 욕되게 함이라, 그 믿음이 부족함은 물론, 그리스도께서 다시 강생을 해서 두 번째 이승살이를 하고 죽으라는 강요임에 틀림없다. 너는 이제 계시나 시현을 내게 빌고 바라야 할 까닭이 없으니, 그리스도를 익히 보기만 하면 내가 몸소 하고 일러준 모든 것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을 그분 안에서 얻으리라.”
* 이제민 에두아르도 신부는 1980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지금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경향잡지, 1995년 6월호, 이제민 에두아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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