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손재주 꾼, 야성 스님
흘러간 세월은 모두가 아쉽고 추억은 다 아름다운 것이다. 특히 그 추억 속의 사람이 이제는 이생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돌아오지 않는 몸이 되고 나면 더욱 그립고 아쉬워진다. 아직은 살아온 날보다는 가야할 날들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야성 스님은 벌써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아직 할 일도 많고 도를 닦는 일도 미진한 터에 모든 것 다 버리고 떠났다. 더 크게 쓰여져야 할 스님인데 모진 병마는 그만 우리들로부터 야성 스님을 앗아갔다. 뒤에 남은 많은 도반들이 아쉬워하는 마음과 슬픈 이별을 남겨둔 채 그렇게 떠난 것이다.
야성 스님은 스님들 중에서도 손재주가 있기로 제일 유명하다. 손재주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야성 스님은 손으로 하는 일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또 했다하면 전문가를 뛰어 넘었다. 집을 지어도 전통목조 건물로 대목수를 능가하는 솜씨를 보였고, 목탁이나 죽비를 만들어도 디자인에서부터 만드는 솜씨가 최고의 수준이었다. 거기다가 표구를 하기도 했고, 승복을 만들기도 했다. 어찌 그 뿐이랴, 음식 솜씨도 가히 일품이었다.
손재주만큼이나 또 부지런하기도 했다. 평소 성격이 급한 탓으로 일감을 보면 남보다 한발 먼저 해치워 버리더니. 이같이 삶도 남보다 한발 먼저 해치우고 떠났는가 보다. 발걸음도 빨리 그렇게 떠나갔다 그렇게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길을 떠난 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 새삼 세월이 제트기가 날아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마음이 여려서 평소에도 잘 우는 사람이다. 그래서 친숙한 사람들의 장례에는 되도록 참여하기를 피해왔다. 야성 스님의 장례 때에도 서울에서 몇 몇 도반들이 어울려 내려가자고 했으나 나만 혼자 빠졌다. 지금도 옛날 상주 원적암과 봉암사 또는 동화사 등의 제방선원에서 같이 지내던 일들을 생각하면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온다. 지난번 봉암사에서 법연 스님을 뵐 때도 자꾸만 야성 스님이 생각나곤 했었다. 두 분은 아주 친숙한 사이였다.
야성 스님은 지금 봉암사 조실로 계시는 서암 노스님을 시봉한 상좌다. 누구나 은사 스님을 가까이 모시게 되면 극진한 정성으로 시중을 들게 된다. 하지만 일찍이 야성 스님만큼 상좌로서 은사 스님을 잘 모시는 스님을 보지 못했다. 스승의 뜻을 잘 받들어 말하지 않아도 불편한 곳이 없는가. 세심하게 살펴서 시봉을 했다. 은사 스님과 친숙하게 지내는 것을 보면 흡사 세속의 육친보다 더하였다. 한 마디로 입 속의 혀와 같이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암 노스님은 지금 봉암사 조실로 오시기 전에 상주 원적암이라는 작은 절에서 토굴 생활을 하고 계셨다. 그 때는 모시는 대중이 불과 서너 명밖에 안 되었다. 나도 한 해 겨울 잠시 그곳에서 노스님을 모시고 공부할 수 있던 기회가 있었다. 야성 스님과 나는 나무도 하고 때론 밥도 지으면서 살았는데 생활의 규범이 엄격하고 절약과 근면이 몸에 밴 큰스님의 가풍을 따르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러나 그런 큰스님의 가풍을 아주 능숙하게 잘 지켜내는 사람이 야성 스님이다. 어떤 일이든지 노스님이 시키는 일이면 노스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이다.
한번은 큰방 탁자 밑 장판 모서리 부분에 띠를 두른 것이 아구가 잘 맞지 않았다고 노스님이 지적하시고 그것을 다시 고쳐서 붙이라는 지시가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만 그 띠지를 찢어 내고 말았다. 한 두 장이나 띠를 찢어 냈을까. 그 때 노스님이 들어오면서 야단을 치셨다. 어찌 그 아까운 장판 띠지를 찢어 버리느냐는 것이다. 마침 야성 스님이 다른 일을 하고 있다가 달려왔다. 그리고 수건에 물을 적셔서 잘못 붙은 부분을 불어나게 하여 원형 그대로 떼어 내더니 다시 풀칠을 해서 감쪽같이 아구를 맞추어 붙여 놓는 것이 아닌가? 그 감쪽같은 솜씨에 나는 놀랐고 큰 스님도 비로소 잘되었다고 하셨다. 이처럼 야성 스님은 부지런하고 타고난 손재주로 능숙하게 일을 했다. 뭐든 그의 손으로 할 수 없는 일이란 보지를 못했다.
그 해 겨울, 눈이 쌓이고 출입이 어려워진 틈을 이용하여 방안에서 목탁을 여러 개 다듬고 죽비도 깎았다. 자귀 하나와 끌 그리고 칼 한 자루가 연장의 모두인데, 귀신같은 솜씨로 목탁을 다듬고 죽비를 깎았다. 타고난 솜씨만큼 물건을 보는 예술적인 안목도 뛰어났다. 그의 손으로 깎는 물건은 미끈하고 준수한 맛이 있어 누가 보아도 훌륭하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 스님들이 사용하는 목탁이나 발우, 죽비 중에는 야성 스님이 유행시킨 형태가 많다. 직접 공장이나 장인들을 찾아가 이러 저러하게 만들라고 지도와 조언을 했거니와, 스님이기 때문에 스님들이 늘 사용하는 물건을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알았다. 뿐만 아니라 스님들의 취향과 정서를 잘 알고 있어 거기에 알맞게 만들도록 한 것이다.
그는 집도 지어 보았다. 언젠가는 표구도 직접 해서 자랑해 보였다. 그런가 하면 ‘핵단’이란 의성 화타의 원방 약재도 만들어 스님들에게 나눠주어 많은 사람들의 위장병을 낫게 하였다. 옷을 만드는 솜씨도 뛰어났다. 옛날 승복은 깃이 좁고 길이가 짧으며 소맷자락이 어복 형태를 띤 것이 많았다. 한데 야성 스님은 이 같은 승복을 과감하게 고쳤다. 깃은 넓고 밑은 처지게 하고 옷고름도 크게 했다. 소매는 어복을 피하고 통은 넓혔으며 길이를 더 길게 하여 전제적으로 우아하고 위의가 있게 하여 품위가 돋보이게 만들어 냈다. 얼핏 사소한 것 같지만 감히 야성 스님이 아니면 하지 못할 일이다. 스님은 간결하고 고풍미가 있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 스님들이 입고 다니는 승복은 그 디자인이 야성 스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보면 된다.
야성 스님은 이렇게 손재주가 뛰어나고 부지런한 탓으로 일감이 눈앞에 있으면 그냥 보아 넘기지를 못했다. 거기다가 성격까지 급해서 한번 일을 손대면 정신없이 몰두하여 때로는 끼니를 거르고 잠자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넘기기가 일쑤였다. 그 뿐인가. 인정이 많아서 끝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베풀어야 직성이 풀렸다. 또 반대로 배짱이 맞지 않는 사람은 그냥 보아 넘기지를 못했다. 따라서 스스로 애걸복걸 속도 많이 썩었으리라.
봉암사 홍문정은 버스 정류장이다. 언젠가 나는 아침 일찍이 첫차를 타려고 출발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야성 스님이 서암 조실 스님을 모시고 어딘가 외출을 하기 위해 나왔다. 버스에 올라탔는데 조실 스님은 바로 내 옆자리에 앉으시고, 야성 스님은 저쪽 뒷자리에 앉았다. 큰스님께 꾸중을 들었는지 야성 스님의 얼굴 표정은 별로 밝지 못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때 조실 스님이 보따리에서 자그마한 망원경을 하나를 꺼내 나에게 새로 샀다고 자랑을 하셨다. 그리고 창 밖을 망원경으로 내다보면서 환하게 잘도 보인다고 감탄을 하셨다. 큰스님은 나에게도 건네주며 보라고 하셔서 나도 보고 좋다고 했다. 그리고 뒷자리에 앉아 있는 야성을 스님을 불러서 보라고 했다.
그러나 야성 스님은 그냥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조실 스님이. “아따, 그것 참, 멀리 있는 것까지 다 보이네. 저쪽 산에 개미가 방귀뀌는 것까지 다 보이네.” 조실 스님의 이 말씀에 몇 안 되는 버스 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그 때서야 야성 스님도 따라 웃으며, “방귀 뀌는 것은 귀로 듣는 것이지, 어떻게 망원경으로 다 보입니까?” 라고 했다. 조실 스님은 또, “너는 귀로 듣는 것만 소리인 줄 알지. 이 망원경은 방귀까지 보이는 것이다. 궁금하고 못 믿겠으면 네가 한번 직접 봐라.” 그러자 야성 스님은 그만 조실 스님으로부터 망원경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창 밖을 살펴본다. 그리고는, “개미 방귀 뀌는 것은 놔두고 개미조차도 안 보입니다. 다만 저쪽 산의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보이는데요.” 하였다.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너도 어지간히 보았다. 조금만 볼 줄 알면 개미는 못 봐도 방귀 뀌는 소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평상한 대화 같지 않은 대화를 나누면서 야성 스님의 얼굴이 금방 펴졌다. 나도 옆자리에서 대화를 거들고 있었지만 스승과 제자의 사이가 이랬다. 평소에도 야성 스님은 다른 스님들이 큰스님 앞에서 어렵기만 하여 조심하고 공손하게만 하느라고 세심하게 하지 못하는 일을 잘 살펴서 했다.
불가에서는 출가한 사문은 반드시 은사와 상좌의 관계로 인연을 맺게 되어 있다. 은사 스님이 은혜를 베풀어 슬하의 제자로 받아줄 때 수계하여 승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문에게 은사 스님은 세속 사람들의 부모와 같은 소중한 분이다. 특히 어려서 출가한 사람은 수계하여 스님이 되기 전에도 먼저 은사 스님의 보살펴 길러주시는 은혜를 입어야 된다. 또한 승려가 된 뒤에도 강원을 가거나 운수행각으로 수행을 하려면 은사 스님이 학비를 부담해 주어야 한다. 병이 나면 치료도 해주는 게 은사 스님의 역할이다. 무엇보다 운수의 몸이 지치고 피곤할 때는 은사 스님의 회상으로 돌아와 바랑을 풀고 잠시 안식을 취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 스승 사 앞에 은혜 은 자를 붙여 부르고, 사신을 올릴 때에는 혜존이라고 높여서 부르는 것이다.
나는 일찍 은사 스님을 여의었다. 그리고 위로 사형님이 두 너서 분 계시기는 하나 아래로는 사제가 한 사람도 없다. 출가권속이 적은 문중이다. 거기다가 나의 은사 스님은 별로 잔정이 없었던 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야성스님을 볼 때마다 부러워했다. 그런데 그렇게 정이 깊고 손재주가 뛰어나더니 어찌 짧은 생을 살고 있는가. 생각할수록 아쉬움만 깊어진다.
출처 ; 효림 스님 /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