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4 /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람이 강아지를 아주 좋아해서 방안에 들여 자식처럼 키우며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요즘엔 익숙합니다. 옛날 강아지들에 비하면 지금 반려견들은 마치 천국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강아지를 아주 좋아한다고 해도 옛날 강아지들처럼 마당에 사는 그 자리에 가서 함께 살 수는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와서 사신다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사람이 사는 곳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았다면, 사람이 강아지를 좋아해서 마당의 개집에 가서 함께 산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니까요.
사람은 강아지를 직접 낳지도 창조하지도 아니했으니까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는 너무나 힘겨운 낮아지심의 사랑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피조물로서 흙으로 돌아갈 존재에 불과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부터 우리 인간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그 약속을 이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심히 부패하였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셔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엄청 자존심이 구기는 일입니다.
엄청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하나님답게 살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멋지게 육신의 옷을 입고 오셔서 사시다가, 아름답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멋지게 살아야 합니다.
죽어도 멋지게 죽고 살아도 멋지게 살아야 합니다. 시험에 붙어도 멋지게 겸손하고, 떨어져도 멋지게 당당해야 합니다. 병이 나도 멋지게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건강해도 멋지게 주님께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점에서 멋지게 행동하셨을까요?
대부분의 종교는 육신을 부정적으로 보고 영적인 것만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이들이 이렇게 보는 이유는 육신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경건을 육신의 소원을 죽이는 금욕적인 것으로 봅니다.
불교의 스님은 결혼도 하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힌두교 신자는 대체로 채식주의자입니다.
이슬람교도 금식 절기를 만들어 금식을 하고 여자들이 히잡을 써서 남자들의 육체적인 욕망을 일으키지 않게 합니다.
유교도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하여 부부조차도 함께 걸어가는 것을 흉측하게 봅니다.
불교계에서 가장 경건하다고 하는 성철 스님은 화식을 하지 않고 생식을 하고 누워서 자지 않고 앉아서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그들은 금욕적인 것을 경건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육신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긍정적으로 보시고 아름답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오셨고 부활할 때도 몸으로 부활합니다.
하나님은 왜 죄악 된 육신을 아름답게 보실까요?
성령 안에서 육신의 소원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성령이 거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죄악 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신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육신이 하는 모든 것이 다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먹고 마시는 것이 천국처럼 보시고 우리의 결혼도 천국 잔치처럼 보십니다.
예수님은 결혼을 하지 않으셨지만, 혼인 잔치에서 첫 번째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먹고 마시는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따라서 하는 우리의 가정생활, 직장생활, 학교생활을 아름답게 보십니다.
우리는 육신을 긍정하고 가정과 교회와 직장생활을 긍정하며 그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금식을 많이 하고 고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부부간에 사랑하고 맛있게 음식을 먹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가장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가장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가장 경건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런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단지 예수님이 마음에서 사라지면 금식하며 예수님을 찾아서 다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교만하여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과 같아지고자 하였습니다.
인간이 교만하여 하나님과 같아지고자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도 깨어졌습니다. 인간과 동물과 자연에 저주가 왔습니다. 교만하면 모든 관계가 깨어지고 망가집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겸손히 피조물인 인간이 되셨습니다.
요즘 개를 사랑하여 개를 키우는 사람은 자신을 개의 아버지,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개새끼, 개자식이라고 하면 모욕으로 생각합니다.
더구나 그에게 개가 되라고 하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겸손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의 형상을 입으시고 그것도 부족하여 죄인이 되신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될 뿐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통하여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고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예수님이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겸손을 배워서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멋지고 아름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병들어도 멋지게 살고 실패해도 멋지게 실패하고 죽어도 멋지게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공해도 멋지게 성공하고 부자가 되어도 멋진 부자가 되고 가난해도 멋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시험에 여러 번 떨어졌는데도 마음에 감사가 충만한 한 가정을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멋진 가정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멋지게 살면 우리는 또 다른 사람들을 멋지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다운 멋진 성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