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메이지[明治(명치절)]시대 정치가. 1875년 특명전권변리대신(特命全權辨理大臣)으로서 강화도사건의 처리를 맡아, 다음해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사쓰마번[薩摩藩(살마번)] 무사(武士)인 구로다 기요유키[黑田淸行(흑전청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군인으로 활동하다가 관계(官界)로 진출하여 특히 홋카이도[北海道(북해도)] 개척을 위하여 활동한 업적으로 알려졌다. 미국인 캐프런 등을 초청하여 서양식 영농법(營農法)을 도입했고, 관영(官營)공장의 설치, 탄광 개발, 철도와 도로의 건설 등을 추진했으며, 1874년에는 둔전병(屯田兵)제도를 창설하기도 했다. 1877년 세이난전쟁[西南戰爭(서남전쟁)] 때에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서향융성)] 휘하의 반란군과 싸웠다. 1884년 백작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우대신(右大臣)에 등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심한 주벽(酒癖)을 문제삼은 천황 등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1887년 제1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내각의 농상무대신(農商務大臣)이 되었고, 이듬해 직접 내각을 조직하여, 정당의 동향에 제약받지 않고 정책을 추진해 나가겠다는 초연주의(超然主義) 입장을 표명하였으나, 1889년 내각의 외교정책에 대한 반대운동이 심해지고 외무대신(外務大臣) 오쿠마 시게노부가 습격받기에 이르자, 사직하고 추逵紫??樞密顧問官)이 되었다. 원로 대우를 받아 1892년에는 제2차 이토내각의 체신대신(遞信大臣), 1895년에는 추밀원의장에 취임했다.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대구보리통)]의 사망 후, 사쓰마벌(閥)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나, 초슈벌[長州閥(장주벌)]에 비해 항상 열세에 놓여 있었다. 주란(酒亂)으로 병든 아내를 살해했다는 풍문이 있던 중 뇌출혈로 사망했다.
2)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 1846∼1926)
일본 군인·정치가. 조슈[長州(장주)] 출생. 번교 명륜관(藩校明倫館)에서 배우고 기병대에 입대했다. 1870년 병부(兵部)에 근무하고, 1876년 히로시마진대[廣島鎭臺(광도진대)] 사령관이 되어 <하기[萩(추도분)]의 난>과 <세이난전쟁[西南戰爭(서남전쟁)]>에서 공을 세워 1878년 육군 중장이 되었다. 1884년 오야마 이와오[大山巖(대산암)]를 수행, 유럽 각국의 병제를 시찰하고 돌아와 도쿄[東京(동경)]·구마모토[熊本(웅본)]진대의 사령관을 지냈다. 1888년 예비역에 편입, 오쿠마시게노부 외무장관의 조약개정교섭에 반대의견을 표명하고 1890년 귀족원의원에 선출되었다. 1895년 특명전권공사로 한국에 부임, 친일정권을 수립코자 일본인 자객을 앞세워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 사건을 일으켜 국제적 비난으로 히로시마에 투옥되었으나 이듬해 면소되었다. 이후 정계로 진출, 헌정본당(憲政本黨) 소속으로 1897년 지조증수(地租增收)에 반대, 도호쿠[東北(동북)]지방을 유세했다. 정계의 흑막적 존재였다.
3) 사이고 다카모리 (西鄕隆盛 1827∼1877)
일본 에도 바쿠후[江戶幕府(강호막부)] 말기 및 메이지[明治(명치)] 초기 정치가. 규슈[九州(구주)] 사쓰마[薩摩(살마);지금의 鹿兒島(녹아도)] 출생. 번사(藩士) 집안에서 태어나 27세 때까지 번(藩)의 일을 보다가, 번주(藩主)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도진제빈)]의 측근이 되었다.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장하는 황실귀족파와 이에 맞서 바쿠후를 지키려는 반대파 사이에서, 유배와 소환의 곡절을 겪으면서 사쓰마번의 발전과 왕정복고에 진력했다. 메이지유신 정부의 탄생에 크게 이바지하여 육군대장·참의(參議) 등을 지냈다. 정한론(征韓論)을 둘러싸고, 이타가키[板垣(판원)]·산조[三條(삼조)] 등 강경론자와 평화론자의 오해와 세력다툼에서 희생되어 귀향 후, 1877년 세이난전쟁[西南戰爭(서남전쟁)] 때 정부군과 대결, 시로야마[城山(성산)]에서 전사했다.
첫댓글 1)+2) 번이 전쟁의 '승자(개화파)'가 되는 것이고, 3)번이 '패자(왕정복고파)'가 되는 것입니다, 톰그루즈 주연의 '라스트사무라이'에서 정부군에 패하면서 장렬히 전사하는 인물이 맞을 겁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1)+2)번 보다 3)번의 인물이 메이지정부 탄생의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남전쟁을 일으킨 이유도,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깨닳아 다시 왕정으로 복고하려다 실패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동료들에게 무엇인가 배신을 당했거나, 속았다는 것을 깨닳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동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한번 보겠습니다..
1)번의 인물은 3)번의 인물과 동향사람입니다. '살마주'태생이네요... '무사도'의 기본이 모두들 잘 갖추어져 있었던 듯 싶습니다. 비록, 이토히로부미의 농무대신이 되지만, 후일의 결과를 놓고 보면,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인물이 개척한 일본의 북해도가 아무래도 한반도 부근의 지역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류 생산물'이 거의 동일합니다.
이에 비해 2)번의 인물이 바로 장주(나가사키?) 출생이며, 초기 공적이 그렇게 크지 않았으나, '광도(히로시마)의 사령관'으로 서남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승승장구를 하게되며,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의 운명을 바꾼, '명성황후'시해 사건을 주도적으로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시 동북부 지방을 유세하였고, 정계의 '흑막적 존재'라는 표현으로 일종의 '해결사'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1)+3)번의 순탄치 않은 말련의 운세와 대조적인 길을 걸어갔을음 옅볼수 있습니다...
미우라 미워라 로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 남지나의 해적출신이라는 말은 없군요 / 이놈들이 메이지를 일으킨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