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천계곡으로 들어
대기는 건조하고 기다리는 비는 오지 않는 삼월 둘째 목요일이다. 아침나절 산책 걸음으로 길을 나서니 미세먼지로 하늘은 뿌옇게 흐렸다. 집 앞에서 105번 버스를 타고 동정동으로 나가 북면 온천장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 굴현고개를 넘어간 외감마을 입구에서 내렸다. 동구에는 겨우내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미나리가 출하되는 시기였다. 농민들에겐 벼농사보다 소득이 높을 듯했다.
동구 밖에서 남해고속도가 창원터널로 진입을 앞둔 곳에서 달천계곡으로 들었다. 평일이라 천주산을 찾은 산행객은 많지 않았다. 등산 안내소를 지난 오토캠핑장부터 길섶에는 부녀들이 조경수를 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공원 관리 부서에서 인력을 동원해 조팝나무와 남천을 비롯한 몇 가지 나무들을 심었다. 가뭄이 지속되어 묘목 식재 후에 물을 넉넉하게 주어야 살리지 싶었다.
달천계곡 입구에는 조선 중기 문신 미수 허목의 유적지 빗돌에 세워져 있었다. 허목이 관리가 되기 전 젊은 날 외감 새터에 구천 샘을 파고 살았던 적 있었다. 그 당시 허목의 제자들이 계를 조직해 그들의 후손들이 요즘도 달천정에서 매년 봄 허목을 향사한다. 달천계곡 너럭바위에 허목 친필 ‘달천동(達川洞)’이 각자로 새겨져 있었다. 미수 허목은 의술에 밝았고 서예도 능통했다.
달천계곡은 빙판이 녹아 가뭄 속에 적은 양이지만 개울물이 졸졸 흘렀다. 낙엽활엽수 가운데 높이 자라는 오리나무는 이맘때 봄이 오는 낌새를 알려주는데 가뭄으로 수액을 빨아올리지 못해 그럴 기미가 없었다. 오리나무는 잎보다 먼저 특이한 모양의 꽃을 주렁주렁 다는데 가뭄이 심해 연녹색 꽃망울은 아직 달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올봄은 지리산 고로쇠 물도 채집 량이 적단다.
천주산 응달 북사면에는 생강나무가 더러 자라는데 꽃이 피려는 모습은 알 수 없었다. 산수유처럼 노란 꽃인데 이월에 늦게 닥친 추위와 가뭄 영향으로 개화 시기가 늦어질 듯하다. 무엇보다 천주산 응달에는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었는데 꽃소식은 역시 감감했다. 아직 꽃봉오리조차 부풀지 않은 듯했다. 함안 경계 고개로 가는 응달에는 두껍게 얼었던 빙판이 다 녹지 않은 채 있었다.
천주산 정상이 상봉으로 건너가는 잘록한 고개에 이르렀다. 진행 방향을 칠원 무기 산정마을로 정해 길고 긴 임도를 따라 걸었다. 상봉으로 가는 산비탈은 수 년 전 잡목을 잘라내고 편백나무를 심어 어느덧 아기나무를 면해 나이테를 둘러갔다. 낮은 산기슭엔 아카시나무 조림지도 있었다. 아카시나무는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산사태를 막아주면서 꿀벌에게는 소중한 밀원이 되었다.
산정마을로 내려가는 임도는 양지라 산중이지만 어느 곳보다 쑥이 일찍 돋아 자라는데 가뭄으로 생육이 부진했다. 아예 싹조차 트질 못했고 몇 가닥 보이는 것도 야위어 캐기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비가 흠뻑 와야 생기를 띨 듯하다. 골짜기를 빠져나간 산비탈은 중장비를 동원한 사방댐 공사를 하고 있었다. 여름날 집중호우에 피해를 줄이려고 산간 계곡을 정비하는 사업이었다.
산정마을에 이르러 전통 농주를 파는 집을 찾아갔다. 올해 일흔 아홉 살 할머니는 소일거리로 농주를 빚어 파는데 찾아가 뵌 지 제법 되었다. 할머니는 그의 시모로부터 전수받은 술을 빚었다. 난 작년가을부터 민감한 부위 염증이 염려되어 곡차 음용을 자제한다. 용수에서 바로 뜬 청주와 체로 거른 탁주를 각 한 병씩 시켰다. 청주만 한 잔 들고 남긴 곡차는 배낭에 챙겨 짊어졌다.
산정마을에서 구고사로 가는 길로 올라 절간으로 들어가질 않고 양미재로 향했다. 봄날이면 회잎나무 이파리 홀잎나물이나 취나물을 마련하는 내게는 남새밭과도 같은 산기슭이었다. 아직 잎이 돋으려면 때가 이른 편이었다. 높이 자란 낙엽활엽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바스락거리는 가랑잎을 밟으면서 산길을 걸어 외감마을로 나왔다. 시내로 들어와 배낭의 곡차 두 병은 친구에게 보냈다. 22.03.10
첫댓글 아카시아나무/ 아까시아나무
주선생님의 주유천하가 부럽습니다.
이번 참에 아카시아나무를 아까시아나무로 단단히 못박고 싶습니다.
건강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