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5~18 / 은혜 위에 은혜이신 예수님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요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자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은혜의 폭포수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은혜가 지속적으로 철철 넘쳐흘렀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살아갈수록, 날이 갈수록 은혜가 더욱 넘치는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5~16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아 말씀은 은혜가 파도처럼 밀려온다는 말입니다. 은혜가 쓰나미처럼 밀려옵니다.
나이가 늙어 갈수록 은혜가 넘칩니다. 왜 이렇게 은혜가 넘쳐날까요?
첫째, 나이가 들수록 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육체가 연약하여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연약해질수록 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약한 데 더 많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약해질수록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둘째, 신앙이 성장할수록 은혜가 더욱 커집니다. 우리는 신앙이 성장할수록 예수님을 더 많이 알아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예수님은 점점 커지고 나는 더욱 작아집니다.
순종이 생활화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줍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잘 되게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 은혜의 파도를 타는 것입니다. 은혜의 파도를 타고 더 큰 은혜로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신앙을 가진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신앙이 성장할수록 우리는 은혜가 더욱 커집니다.
셋째, 우리가 살아갈수록 천국이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갑니다. 우리가 시간이 흐를수록 죽음에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죽는 그 순간이 우리의 육체와 현실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날입니다.
죽는 그날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율법 신앙은 날이 갈수록 진노를 쌓습니다. 율법 신앙은 내가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니까 사는 것이 힘에 겹고 신앙생활도 갈수록 힘이 듭니다.
지금까지 사는 것도 힘이 들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까지 걱정합니다.
육체가 쇠약해질수록 더욱 힘이 듭니다. 점점 자아가 커가니 하나님과 관계도 멀어지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도 멀어집니다. 자신이 외로워지고 고독해집니다. 미래를 생각하면 참으로 암담하게 느껴집니다. 점점 심판이 가까이 오니 죽는 그 순간이 가장 무서운 순간입니다.
사도바울은 과거 바리새인으로 율법 신앙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잘 살려고 하면 할수록 힘이 들었습니다.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자신이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죽기 전에 그는 옥중서신을 썼습니다. 죽음을 앞둔 그날에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의의 면류관이 자신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17~18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 즉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인생이 살아갈 길, 아주 좋은 삶의 공식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지키면 복을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연약하고 완악하여 그 십계명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십계명의 공식을 풀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에서 우상을 만들고 남창들이 성전 안에서 성행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어 책망하셨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를 돌로 쳐 죽이고 톱으로 썰어서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여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은 이스라엘의 십자가와 같은 사건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십자가를 통해서 변화되었습니다.
자발적으로 우상을 제거하고 말씀 중심이 되며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변화는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새 언약은 은혜와 진리의 언약입니다. 새 언약을 통하여 그들이 온전히 변화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첫째, 은혜와 진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율법을 다 지킨 것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율법으로 생긴 모든 죄, 저주, 죽음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됩니다.
둘째, 은혜와 진리는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은혜와 진리의 사랑으로 감싸서 율법을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길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율법이 낸 하나님 나라의 길은 가시밭길이라 걸어가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에 사랑의 비단을 깔아서 쉽게 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가시밭길을 꽃길로 만들어 기쁨으로 걷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삶의 공식을 가정교사가 되어 쉽게 풀어가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율법을 점점 잘 지키며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다섯 남편과 살다가 한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은혜로 감싸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진리로 거룩한 삶을 살게 도우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은혜로 용서하시고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진리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살게 도우셨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태양과 같은 분이라 하나님을 보면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오심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하나님의 공의를 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비신자들에게 천국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신앙생활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과 율법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율법으로 사는 사람을 힘들게 살고 미래를 생각하면 절망적입니다. 죽는 날이 가장 무서운 날입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감사가 많고 미래에 소망이 넘칩니다. 죽는 날이 가장 소망이 넘치는 날입니다. 우리는 은혜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성육신 예수님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은혜가 폭포수처럼 철철 넘쳐흐릅니다. 은혜의 쓰나미가 밀려옵니다.
우리가 거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복에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신앙이 성장할수록 나이가 들수록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육신은 쇠하여 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새로워집니다. 예수님은 커지고 나는 작아집니다. 우리의 인격은 점점 성숙해 갑니다. 죽는 순간이 기다려지게 하십니다. 죽는 그날이 우리의 은혜가 절정을 이루는 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리는 날입니다. 우리가 은혜 위에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