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마지막 영웅은 '살아있는 성녀'라 불리던 마더 테레사 수녀(이하 마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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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사진의 거장 카쉬展-마더 테레사(사진=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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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는 인도에서 꽤나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특히 그가 활동했던 꼴까따에서 마더를 모르는 이는 드물 게다. 그게 뭐 어쨌냐고? 이곳은 '인도'다. 무려 4억8천만에 이르는 신을 거느린 힌두교가 있고 브라만(사제)이 최고의 신분을 누리는 곳이다. 이슬람 문화권보다는 덜하다고는 하나 강한 가부장 문화를 가진 인도에서 연예인도, 정치인도, 범죄자가 아닌 '여성'을 알고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노벨평화상 수상이라는 이슈를 거론하기 이전에 소외된 자들에 대한 마더의 사랑과 헌신이 인도인들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백컨대, 난 인도여행을 결심하기 전까지 마더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활동지도 아프리카 어디쯤인 줄 알았다. 죽어가는 이, 장애인, 고아 등을 돌보며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고하니 그저 아프리카를 떠올렸을 뿐이다. 인도가 그토록 가난한 국가였는지 몰랐을 뿐더러 빈민국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었다. 마더가 선종했을 때 또한 난 그저 '돌아가셨구나' 했을 뿐 다른 이야기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이기적인 삶을 살진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모르게 사랑, 헌신, 봉사, 노벨평화상, 죽음, 장애 등의 단어의 무게에 짓눌려 일부러 피해왔던 것 같다.
그랬다. 내가 마더와 같은 마음으로 봉사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일종의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가장 마음에 걸렸던 단어는 '헌신'이었다. 내 코가 석잔데 무슨 희생을 한단 말인가. 내어 줄 게 있기는 한 건가. 무엇보다 봉사활동 한답시고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난 저들 보다는 낫잖아. 덕분에 삶의 용기를 얻었어"라는 식의 말들이 싫었다. 나에게 봉사활동이란, 마더 정도가 아니라면, 졸렬한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약자들을 이용하는 위선이었다. 나를 억압했던 단어는 또 있었다. '사랑'이다. 물론 난 거대하진 않으나 나름의 인류애를 가지고 있었다. 타인의 슬픔이나 아픔에 동감할 만한 상상력도 있었다. 그러나 거의 극에 다다른 인생고(人生苦)를 겪는 장애인이나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동감하고 사랑을 느낄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나에게 희생·사랑·봉사의 상징인 마더에 대한 거부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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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라역 (출처-흑우의 사진이야기 http://blog.naver.com/prologue/PrologueLi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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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낡은 지도'와 '때 묻은 카메라'를 손에 들고서 발로 즐기는 모험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나 보다. 범접할 수 없는 선(善)에 거부감이 들었던 테레사 수녀의 봉사단체가 '여행'하려는 인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친근하게 다가왔다. '맛만 보자' 싶었다. 게다가 난 게으르지만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가. 생각이 예까지 닿으니 오히려 설렜다. 봉사활동을 '헌신'으로 하는 게 아니라, 여행 중 '체험'으로 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힘들면 언제든 도망칠 수 있다는 사실이 부담감을 떨치게 했다. 여행은 새로운 곳으로 자신을 밀어넣는 모험이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는 도피이기도 하다는 면이 덜 죄스럽게 만들었다.
꼴까따는 인도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였다. 아쉬운 마음에 하나라도 더 기억에 남기고 싶어 눈을 크게 뜨고 다녔다. 꼴까따의 '하우라' 역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건 노란택시와 깨끗한 도로. 마더하우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처절한 곳이라 믿었던 꼴까따는 의외로 정비가 잘 돼있었다. 또한 영국의 식민수도 답게 당시의 분위기가 가득했다. 강을 가로지르는 화려한 대교, 영국 양식의 낡은 건물, 도로위를 달리는 전차 '트램', 고딕형식 성당 등은 흑백 영화 속 영국을 떠올리게 했다. 특히 '빅토리아 메모리얼'이라는 박물관은 더욱 영국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런데 빅토리아 메모리얼의 정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식민지 산물을 버젓이 박물관으로 만들어 '기념'까지 하는 셈이 된다. 우리로 치면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 당시 일왕이었던 '히로히토(裕仁)' 박물관쯤 될 터인데 속이 좋은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꼴까따에서 묵은 곳은 여행자의 거리로 불리는 '서더 스트리트'. 서더스트리트부터 뒤쪽 영화관이 있는 곳까지는 꽤나 부촌인지라 거리가 깨끗하고 화려했다. 다만 여행객들과 봉사자들로 넘쳐나느 곳이라 숙소잡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특히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장기 봉사자들 때문에 싸고 괜찮은 방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이들은, 짧게는 한두달에서 길게는 일년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더 하우스 근처에 따로 세들어 사는 봉사자도 있지만 사람, 음악, 파티를 좋아하는 히피풍의 봉사자들은 게스트하우스를 고집했다. 덕분에 동네를 몇 바퀴나 돌다가 겨우 잡은 숙소가 빈대출몰지로 악명높은 '호텔 파라곤'. 이곳에서 만큼은 정말 묵고 싶지 않았는데... 내 기준에서는 이곳은 공짜라고 해도 비싼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밤새 배가 간지러 손으로 확 때리니 피가 툭 터져 죽은 빈대 꼴을 보고는 이튿날 즉각 도망나왔다. 그래도 일단 숙소를 잡고나니 마음이 한결 평화로워졌다. 슬슬 봉사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어야 했다.
꼴까따에 오기 전, 가난한 봉사자들의 배를 두둑히 채워줘 '마더하우스人'들이 늘 북적대는 노상 음식점에 대해 누군가로부터 들은적이 있었다. 이곳에서 어지간한 정보는 다 얻을 수 있다며 알려줬었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머리를 쥐어박으며 가이드북을 뒤지다보니 숙소 바로 앞에 '티루파티'라는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혹시나 해 찾아봤다. 남루하고 땀에 젖은 행색을 한 이들이(봉사자의 포스다) 줄까지 서있었다. 책에 따르면 이 식당 주인은 한국에 있는 인도식당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단다. 그래서인지 볶음밥, 김치죽 등 한국풍 음식을 싸면서도 꽤나 훌륭하게 내놓았다. 처음 맛을 보고는 금세 단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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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내 배를 두둑히 채워주었던 노상 음식점 '티루파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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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이 이유만으로 단골이 된 것은 아니었다. 가게 주인인 '기쇼리'씨는 슬하에 딸내미 셋을 두고 있었는데, 다들 인물이 범상치가 않았다. 한국인들(정확히는 한국 남자들) 사이엔 이미 소문이 파다했다. 특히 열일곱살난 막내 딸의 인물이 빼어나단다. 하지만 나와는 영 타이밍이 맞질 않았는지 며칠을 시커먼 남자 직원들만 봤다. 그러던 어느날 웬 꼬질꼬질한 여자 아이가 서빙을 하고있었다. 주문을 하다가 그 소녀와 눈을 딱 마주쳤다. 순간 그 눈에 쑥 빨려 들어갈듯한 느낌을 받았다. 막내 딸임을 직감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좀 더 깨끗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면 '난리났겠다' 싶었다. 그 때 이후로 티루파티를 더욱 줄기차게 이용했다. '열일곱'이라는 말에 서른인 날 두고 '도둑놈' 이라고 하지마시길. 젖살도 빠지지 않았던 '가수 아이유', '배우 문근영', '피겨여왕 김연아' 등에게 열광했던 삼십대 삼촌팬들과 다름없는 순수한(?) 마음이었으니까. 그녀에게 소속사가 있었다면 주식이라도 사줬을텐데...
어쨌든, 티루파티에 줄지어 놓인 의자에 앉아 왁자지껄한 떠들어대는 한국인들 사이에 나도 끼어 앉았다. 내가 먼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니 다들 반갑게 인사를 받아줬다. 한국에서는 이웃 간에도 인사가 없지만, 인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소개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인연을 만들어 나간다. 지속하기 힘든 인연들이라하여 그리 냉소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여행에서 생기는 가장 특별한 추억은 결국 사람으로부터 오기 마련이니까. 다행이 이곳에서 마더하우스까지 '길 잃은 어린양'을 안내해줄 봉사자 한 분을 만났다. 삼십대 중반은 훌쩍 넘어 보이는 여성분이었는데 꽤 진지한 불교 신자였다. 봉사활동이 좋아서 6달 째 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지만 눈치 100단인 내가 볼 때 출가를 결정하기 위한 분별의 시간을 가지는 듯했다. 그가 말하길 새벽6시에 집전되는 미사(참여는 자유)가 끝난 7시부터 봉사자들이 모이기 때문에 6시 30분까지는 나서야 한단다. 이런. 난 '아침꿀잠형' 인간인데.
새벽 기상은 봉사를 하는 기간 내내 나를 괴롭혔다. 알람이 울린 뒤 씻으러 가기까지는 단 5분 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사이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다. 새벽미사를 빠지고(그래도 이틀은 다녔다) 봉사만 할지, 그것도 힘들면 오후봉사를 갈지, 내가 왜 이짓을 하고 있는지, 전날엔 뭔 술을 그리 많이 마셨는지 등등... 심지어 그 일이분 새에 꿈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다 한 번 더 울리는 알람에 놀라 기어이 일어난다. 누운채 옷을 겨우 껴입은 뒤 고양이 세수를 하고 후다닥 문을 나서면 나의 자양강장제, 인도의 아침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인도의 아침은 꼴까따 뿐 아니라 대부분 짙은 오랜지 빛을 띄는 듯하다. 심각한 먼지로 인한 빛의 난반사가 그 원인이라는 걸 무시할 수만 있다면 이 분위기는 큰 활력소로 작용한다. 아침은 모든 것들이 용서하게 한다는 느낌이랄까.
숙소에서 마더하우스까지는 걸어서 대략 15~20분 정도 걸린다. 처음에는 이 길이 은근히 헷갈려 나름의 이정표를 만들어 놓았다. 숙소를 나서 몇 걸음 가면 내가 늘 물을 사는 가게가 나온다. 이를 지나 직진을 하면 수돗가가 나온다. 수도 보급률이 낮은 인도에서는 아침마다 공동수도에 모여 목욕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좀 민망하다. 이를 지나 좌측으로 꺾어 걷다보면 작은 시장이 나온다. 특히 인상적인 곳은 식육점. 인도의 대부분은 고기를 금기시하는데 꼴까따는 달랐다. 꼴까따에는 무슬림과 화교가 많고, 힌두교 개혁운동의 발생지라는 특색이 겹쳐 브라만이라도 굳이 채식을 고집하진 않는다. 다만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걸어 놓고 팔지만 않는다면 좀 더 좋은 느낌으로 봤을 텐데. 닭들도 그 자리에서 목을 치고 털을 벗겨 바닥이 온 바닥이 피 투성이었다. 안타까웠던 건, 가게의 주인 식구들. 이들은 따로 집이 없는지 바닥을 물로 대충 씻어내고 그 위에 나무 판 몇 개 덴 뒤 이불을 깔고 잤다. 식구만 다섯이었다. 하지만 코까지 골며 자는 이들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충격적이던 장면이 어느새 따뜻한 아침풍경으로 다가왔다. 이를 지나 큰길에 접어들면 걸인들이 길 한구석에서 모포하나에 의지해 새우 잠을 자고 있다. 이들을 밟지 않기 위해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계속 가다보면 드디어 마더 하우스가 나온다. 마더하우스까지 가는 나만의 이정표는 '걸인'들이었던 셈이다.
마더하우스 입구에는 마더테레사 이름이 쓰인 문패가 보인다. 그 밑을 자세히 보면 테레사 수녀가 집에 있고 없고를 알리는 장치가 있는데, 작은 나무를 움직여 IN, OUT을 표시할 수 있게 해뒀다. 마더가 선종한지 수 년이 지난 현재 이 문패의 장치는 IN, OUT 중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 대부분 사람들은 마더가 돌아가셨으니 그 부재를 알리는 OUT에 있을거라 여길 게다. 그러나 IN에 있다. 이는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테레사 수녀의 무덤이 마더 하우스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마더는 죽어서도 이곳에 머물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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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가 돌아가신 뒤 언제나 이 문패는 언제나 IN을 가리키고 있다(좌). 마더하우스 외벽(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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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마더하우스에 대해 잠깐 설명을 해야겠다. 마더하우스는 하나의 건물, 하나의 봉사처가 아니다. 테레사 수녀가 세운 수도회인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 이하 MC)본원을 지칭한다. 이곳에는 수녀님들이 기거하는 거처가 있고, 미사를 집전하는 경당이 있다. 또한 봉사자들이 매일 아침 모이는 곳이자, 봉사자 전체를 관장하는 센터이기도 하다. 실제로 봉사하는 기관은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보통 5곳 정도 추천 받는다.
이 봉사처들 중 가장 먼저 생긴 곳이 그 유명한 NIRMAL HRIDAY(니르말 흐리다이). KALIGHAT(깔리갓)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곳은 임종 직전 환자를 돌본다. 한국인들에게는 '죽음을 기다리는 집'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외 장기치료가 필요한 지체 장애 노인(나병환자 포함)을 돌보는 Prem Dan(프렘단), 아주어린 고아 및 정신발달장애아를 돌보는 SHISHU BHAVAN(쉬슈바반), 지체장애아동을 돌보는 DAYA DAN(다야 단), 학대당한 여성과 영양결핍아동을 돌보는 SHANTI DAN(샨티 단) 등이다. 이들은 모두 다른 장소에 있고, 대부분 MC 본원과 멀어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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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봉사자들이 모이는 장소. 원래는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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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에서 새벽 미사를 마친 뒤 봉사자들은 7시부터 같은 건물 지하에 모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나나와 비스켓 그리고 짜이를 간식으로 나눠 먹는다. 그런데 이 맛이 또 기가 막혔다. 여행중에도 아침만큼은 배빵빵히 챙겨먹는 나로서 다소(솔직히 굉장히) 허전하기도 했으나, 익숙해지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자들을 돌보러 온 주제에 호사스러운 식사를 챙겨먹을 순 없다는 '헝그리 정신'이 내 입맛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어느순간 먹기 힘들던 인도 길거리 음식들도 거짓말처럼 맛있어졌다. 역시 사람은 '멘탈'이 중요하다.
식사가 끝날 무렵이 되면 종이 울린다. 그러면 모든 이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나 기도를 하고 노래를 부른다.
We have our hope in jesus (x2)
That all things will be well (x3)
In the load
이후 수녀님이 간단한 공지를 한 뒤 마지막 날인 봉사자들을 가운데로 불러 세운다. 이내 모든 봉사자들과 수녀님들은 이들을 빙두르고는 마더하우스의 명곡(?) '땡큐 송'을 불러준다. 이 노래를 선물받는 이들은 무엇 때문인지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별 가사도 없는데 말이다. 이 행사가 끝나면 그날 새로 봉사를 시작한 사람들에게 임시 출입증을 발급해주고 각자 배정받은 봉사처로 이동한다. 내가 배정받은 봉사처는 프렘단. 아이들이 있는 다야단에 가고 싶다고 수녀님께 말씀드렸지만, 그곳은 이미 봉사자가 넘쳐난다며 단칼에 거절당했다. 여기 수녀님들 단호할 땐 섭섭할 정도로 단호하다.
난 프렘단에 배정받은 이과 함께 버스를 타고 봉사처로 향했다. 버스를 내려 프렘단 주변을 둘러보니 그런대로 깨끗한 서더스트리트에 비해 거의 난민촌에 가까웠다. 도대체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외벽을 한 집들이 한사람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따닥따닥 붙어 있었다. 씻질 않아 온 얼굴에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아이들은 봉사단을 보자마자 돈을 달라고 붙었다. 마더하우스의 방침상 절대 돈을 주어선 안 된다. 미안하다고 말하며 프렘단 입구로 들어서면 순간 다른 세상인 것 마냥 깨끗한 장소가 나왔다. 아이러니했다. 가장 약한 이들이 호히려 호사(?)를 누리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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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램단 근처 빈민촌. 수도관이 새는 곳에 옹기종기모여 양치를 하기도, 뗄감으로 쓰기 위해 쓰레기를 모으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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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마더를 비판하는 수많은 논리 중 하나가 가난의 '구조'를 바꾸지 않고 그저 소외된 이들을 '수용'하는 데에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적 변화는 국가의 몫이지 종교의 몫이 아니다. 권력은 쥔 종교는 타락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다만 종교가 할 수 있는 건, 짐승 이하의 삶을 살던 이들을 사랑으로 보호하고 죽음을 지켜 봐주는 것 정도다. 이 작은 '행동'이 씨앗이 되어 나비효과처럼 사상, 철학으로 퍼져나가 정책으로 구체화 된다면 가난의 구조를 바꿀수 있지 않을까. 마더는 늘상 말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크기라고. 프렘단의 입구에 들어섬과 동시에 예상했던 대로 내 사랑과 희생 정신은 심각하게 시험받기 시작한다. 프렘단에서의 본격적인 봉사활동 이야기와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이야기는 다음편에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