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북한군에 딘 소장을 팔아넘기다! 趙甲濟
6.25 때 大田공방전을 지휘하다가 낙오된 뒤 한국인의 밀고로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던 윌리엄 F 딘 소장은 해방직후엔 군정장관으로 일했던 이다. 6.25남침 소식을 그가 들은 것은 일본 큐슈 고쿠라 24사단 사령부에서였다. 그가 지휘하던 24사단과 다른 3개 사단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었다. 참전을 결정한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에게 駐日미군을 투입할 것을 명령했다. 딘 소장은 선발대로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1개 대대 병력을 보냈다. 1950년 7월 초 이 부대는 오산에서 압도적인 북한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거의 전멸했다. 24 사단의 임무는 북한군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었다. 지연작전이었다. 북한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는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 미군은 한국으로 전개되어 진지를 확보하기로 했다. 7월18일부터 3일간 24 사단은 大田에서 잘 버티었다. 딘 소장은 2차세계대전 때 유럽에서 용맹을 날린 사단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단이 戰死 968명, 부상 4300명, 실종 374명, 포로 42명의 피해를 본 것을 자랑하다시피했다. 포로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는 포로가 되는 것을 가장 큰 수치로 여겼다. 大田 공방전에서 딘 소장은 전투대열의 앞장을 섰다. 사단장이 그렇게 나서면 안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衆寡不敵 상태에선 지휘관이 이렇게 솔선수범해야 병사들의 사기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후퇴할 때도 딘 소장은 부상자 구호에 앞장섰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걸어서 후퇴했다. 그는 부하 부상병을 위해서 물을 얻으러 갔다가 길을 잃고 대열에서 벗어났다. 그의 부관은 딘을 찾지 못하자 남쪽으로 걸어가서 이틀 뒤 미군 부대와 합류했다. 혼자가 된 딘 소장은 산속을 헤매다가 넘어지고 떨어지면서 기절도 하고 어깨를 골절하기도 했다. 딘 소장은 낙오병이 된 타보 중위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7월26일 두 사람은 산속에서 한국인을 만났다. 자신들을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주면 40 달러를 주기로 약속하였다. 이 한국인은 두 미군을 오막사리 집으로 데려갔다. 그래놓고는 동생을 북한군에 보내 밀고했다. 딘과 타보는 북한군이 접근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집을 에워싸더니 '나오면 죽이지 않겠다'고 소리쳤다. 두 사람은 총을 쏘면서 집을 뛰쳐나가 논으로 기어들어갔다. 타보 중위는 딘 소장을 따르지 못하고 헤어졌다. 타보 중위는 며칠 뒤 북한군의 포로가 되어 북한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죽었다. 딘 소장은 논에 엎드려 있다가 어두워지자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벼이싹을 씹어먹었다. 친절한 한국인이 주는 밥을 먹기도 했다. 8월2일 딘 소장은 산에서 한국인을 만났는데 아주 호의적이었다. 그는 딘 소장을 외딴 집으로 데려갔다. 4일간 머물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틀째 형제가 말다툼을 벌였다. 미군을 보호해주면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동생이 이겨 딘 소장은 이 집을 나가야 했다. 그는 또 4일간 걸었다. 노인을 만났다. 이 노인은 미군이 있는 대구까지는 이틀만 걸으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희망이 보이자 딘 소장은 대담해졌다. 그는 큰 길로 나서서 걷기 시작했 다. 여기서 한두규, 최천봉이란 두 사람을 만났다. 딘 소장은 두 사람에게 미군군표와 선물을 주기로 약속하고 대구까지 안내를 받기로 했다. 세 사람은 대구를 향해서 걸었다. 앞장 서서 걸어가던 한국인이 뒤따라오던 딘 소장과 동료를 향해서 손짓을 했다. 길가에서 쉬고 있으란 시늉이었다. 그래놓고 그는 앞으로 달려가더니 스무 명의 북한군인들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딘 소장은 자동소총을 꺼내려고 했다. 이때 옆에 있던 한국인이 붙들고 늘어졌다. 그때 딘 소장은 체중이 25kg이나 줄어든 상태였다. 딘 소장은 북한군 손에 넘겨졌다. 밀고한 한국인은 5달러에 해당하는 3000원씩을 북한군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딘 소장은 35일간 헤매다가 붙들린 것이다. 그가 붙들린 장소에서 미군부대까지는 약89km였다. ///////////////////////////////////////////////////////////////////////////// 6.25 전쟁 때 낙동강 전선을 死守하여 한국을 구한 제1공로자 워커 8군 사령관(중장)은 1950년 12월 23일 서울 도봉구 근방에서 지프차를 타고 가다가 한국군이 몰던 트럭에 받혀 죽었다. 李承晩 대통령은 한국군 운전병을 처형하라고 명령했으나 옆에 있던 미군 장교 하우스맨이 말려서 재판을 받고 3년간 옥살이만 하도록 했다. 한국전선에 가장 먼저 투입되었던 미 24사단의 윌리엄 F 딘 소장은 대전 공방전에서 밀려 후퇴하던 중 길을 잃고 헤매다가 포로가 되어 북한에서 3년간 고생했다. 그는 휴전 때 풀려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2차 세계대전 때도 사단장으로 용맹을 떨쳤던 그는 1950년 7월18일부터 3일간 북한군의 총공세에 맞서 大田을 방어했다. 이 3일은 부산 교두보를 강화하는 데 소중한 시간이었다. 戰史학자들은 이 지연작전이 한국을 구했다고 말한다. 딘 소장은 대전 전투에서 부하들의 앞장을 섰다. 그는 후퇴할 때도 부상자를 자신의 지프 차에 태우고 가는 등 끔찍이 아꼈다. 딘 장군은 혼란속에서 길을 잃었다. 이때부터 35일간 낯 선 한국 마을과 산을 헤매고 다녔다. 딘 소장은 한국인의 배신으로 포로가 되었다. 그는 세 번 배신을 당했다. 첫번째 한국인은 그를 보호하는 척하다가 북한군에 신고했다. 이때는 총을 쏘면서 달아났다. 두번째 배신은, 한국인 형제가 있는 집으로 숨어 들어 며칠간 보호를 받았으나 형제 중 한 사람이 "떠나라"고 쫓아낸 일이다. 세번째는 딘 장군이 대구를 향해서 길을 걸을 때였다. 韓, 崔라는 두 한국인이 딘 장군을 안내하는 척하다가 북한군에 신고했다. 딘 장군은 포로가 되었다. 그 代價로 두 한국인은 3000원(5달러)씩의 현상금을 받았다. 한국을 구하러 와서 목숨을 바친 미국인이 있는가 하면 그 미국인을 북한군에 넘겨주고 돈을 번 한국인도 있었다. 미국사람들이 고마운 것은 이런 배은망덕한 행위를 특별히 부각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워커 장군의 후임 8군 사령관은 릿지웨이 장군이고 릿지웨이 장군이 유엔군 사령관으로 영전한 이후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이는 밴 플리트 장군이었다. 그의 아들은 공군 조종사였다. 아버지 곁에 있기 위해 戰線 근무를 자원했던 아들은 북한지역 폭격임무를 수행중 실종되었다. 밴 프리트 장군은 아들에 대한 수색작전이 너무 지나치다고 중단시켰다. 북한군은 한국군 피란민으로 위장하여 美軍을 공격했다. 미군이 노근리 사건을 일으킨 것도 양민을, 피란민으로 위장한 북한군으로 오해한 때문이다. 노근리 사건에 흥분했던 한국인들중 과연 몇 사람이 딘 소장을 북한군에 팔아넘긴 이들이 한국인이었음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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