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신의 놀이 (외 1편)
주민현
복도에 옹기종기 펼쳐진 우산들 누구 머리를 위한 걸까
탈모는 현대인의 질병이래 머리가 다 빠진 미래의 인간을 상상한다
비가 오면 잠기기 좋고 떠오르는 기억을 뜰채에 가두기 좋아
탄천에 조용한 쓰레기 밀려 내려오고 나무들 귀밑까지 잠기고
빅토리아풍 교회와 서툰 이발사 춤추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며 걷는다
왜 이 동네엔 헌옷수거함이 없을까 모두들 영원히 버리지 않아도 좋을까
버리지 않게 되는 기억도 있지
너 기억의 첫 번째 집에서 시간의 멱살을 잡고 우수수 코를 터트리러 다녔지
골목을 메우는 건 동네 아이들 웃음, 비명소리
두 번째 집에서는 품속에서 굳어 가는 개를 묻었고 세 번째 집은 재개발되어 사라졌다
네 번째 집을 너 떠나올 땐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지
악기상의 딸은 자라 부모를 모르게 되고 빌라는 점점 작아져 도시의 굴뚝이 되네
연기는 빠져나가기에 좋고 비 오는 소리는 다른 소리들을 덮기에 좋아
죽으려는 사람의 가스 불 소리 행복에 겨운 두 사람이 포개지는 소리
비가 너무 많이 온다면 그 모든 곳이 연결될 거야
체육공원과 물놀이장 학교의 주먹다짐 어린 시절의 방학천
어둠 속에서 학생들이 담배를 나눠 피우며 조용히 눈빛을 교환하고 있어 진짜 나쁜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어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하는 데에는 얼마간의 위선이 있지 생활의 아름다움이 너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지
불이 난 양말 공장 일요일 교회 앞 뻥튀기 트럭 옆의 비둘기들
네가 탄천을 지나가며 보는 것 너는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알고 싶어 하네
길 없음, 누군가 고쳐 쓴 글씨를 읽으며 숲길을 바라본다
저기에 유령이 산대
유령의 존재란 무슨 뜻일까 그건 인간에게 놀라움이 필요하다는 뜻
신화 속 여성들이 벌거벗은 이유는 세상이 유혹하는 존재를 원한다는 뜻
숲길은 혼령들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네
낮은 주택의 구름과 이상은 높고 네 글은 재보다 가벼워
밤은 신의 놀이 삶과 죽음은 주사위 놀이
정말 이상한 오리들이 정말 이상한 모양으로 떼 지어 내려온다
창가에 매달려 있는 여자는 사실 비 내린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니라 자기의 전 생애를 발끝에 걸어 보고 있는 거야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웹진》 2022년 9월호
그림 없는 미술관
아직 전시가 시작되지 않은 미술관을 거닐며 당신과 나는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지구 저편에 있는 그림 없는 미술관에 대한 이야기에 금세 빠져들었어요
미술관에 그림이 없다면 무엇이 전시될까요
지구에서 동물이 사라진다면 작고 약한 것부터 무릎 꿇리게 될까요
그림 없는 미술관을 상상하다가 이 모든 것이 삶에 관한 은유라는 것을 깨닫고
밖에 불이 났나 봐요 소방차가 왔으나 아직은 하늘이 거무스름하고
나는 창 안에서 개를 안고 있어요 개는 따뜻하고 인간을 맹목적으로 믿는 듯이
맹목적인 따뜻함
개를 사랑하지만 양을 먹어요 소를 입고요 말은 탑니다
인간과 동물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타오르던 하늘이 걷히고 이제 그만 돌아갈게요
가볍게 눈 내린 아침에 인공눈물, 인공항문, 인공지능, 그 모든 인공에 대해 생각하다가
가볍게 내린 것들은 가짜 같군요
역 안에는 구찌 샤넬 루이비통 없는 게 없고 가품에는 표정이 있고 가품은 흥미로워요
쉽게 구겨지는 쪽으로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간직하고 우리의 자동차, 모피코트, 개들의 움직임 언제나 새들은 가볍게 날아오르고
엔진이 꺼진 곳에서 숨 쉬고 있는 작은 동물을 깨워 차를 몰고 도착하는 그곳에서
늙은 개는 아주 인간적인 미소를 띠고
프레임 없는 뒤바뀐 프레임을 초과하는 부정하는 뒤틀린 그림 아닌 그림 속으로 우리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어요
(제12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 ―계간 《시산맥》 2021년 봄호 ---------------------- 주민현 / 1989년 서울 출생. 2017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시로 등단. 시집 『킬트, 그리고 퀼트』. 창작동인 〈켬〉으로 활동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