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추를 심으며 -
불난 집터에 고추를 심기로 했다. 화재로 타고 남은 것들을 바로 집터에 파고 묻었었다. 포크레인 기사분이 앞으로 땅이 가라앉고 안정되기 전까지는 집을 못짓는다고 하였다. 최소한 3년은 기다려야 땅이 어느 정도 안정된다고 했다. 그때쯤 집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위로 겸 전해주었다.
두 마지기나 되는 땅을 놀리기도 그렇고, 혹시나 농사를 지으면 땅이 더 안정되지 않을까 싶어 동네 아우에게 부탁하여 땅을 갈아달라고 하였다. 노타리를 치면서 트랙터 농기계가 돌아다니니까 금방 평평해진다. 흙이 가루처럼 부셔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오늘이 집터에 고추를 심는 날이다. 장터에서 땅콩모종도 샀다. 토마토도 가지도 샀다. 망설이다가 맷돌호박 모종도 샀다. 고추는 청량고추부터 오이고추, 꽈리고추까지 손 닿는 대로 샀다. 맵지 않다는 오이고추도 붉게 익으면 얼마나 매운지 모른다. 오이고추도 익으면 따서 말리기로 하고 넉넉하게 품종 별로 샀다.
고추는 습기 많은 땅엔 심는 것이 아니었다. 해마다 장마철이 되면, 빗속에서 뿌리썩음병부터 탄저병까지 온갖 질병이 창궐하고, 해마다 우리집 고추는 습기에 시달리다가 다 죽고 말았다. 그렇게 실패를 하면서도 해마다 고추를 심지 않을 수가 없다. 반드시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되는 밑반찬 같은 것이 고추이기 때문이다. 여름철 입맛 없을 때, 보리밥에 물 말아서 된장에 고추 찍어먹는 맛을 어찌 잊을 것인가.
두둑을 치고 비닐을 씌우고, 조루에 물 담아서 곁에 놓고 고추를 심기 시작했다. 작은 꽃삽으로 비닐구멍을 조금 파고 물을 붓는다. 물이 들어가고, 흙이 가라앉으면 고추 모종판에서 고추 하나를 빼서 넣고 꾸욱 누른다. 다시 물을 붓고 훍을 덮는다.
비 오기 전(前)날이 좋았다. 그 전에 미리 비닐덮기까지 다 해놓고, 모종 심는 것은 비 오기 전(前)날을 골랐다. 그래야 고추가 비를 맞고 뿌리활착이 잘되기 때문이다. 뿌리가 흙맛을 보면 그때부터는 안심해도 된다. 곧 밑둥부분에 방아다리 새순이 나면 그건 꺾어줘야 한다. 고추 다수확을 하는 방법이다. 꺾은 순은 데쳐서 맛소금 마늘이랑 양념을 넣고 참기름도 조금 쳐서 무쳐먹으면 고추나물이 된다.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가급적 농약은 안하기로 했으나, 고추가 병들어 가면 그 모습 보면서 가만 있을 농부는 없다. 나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식구들 입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면서 제발 농약치는 일만 없었으면 하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
마늘이나 양파는 농약 없이 키운다. 못 먹게 생겼으면 버리고 말지라도 농약 하는 일은 없다. 다만 감나무나 복숭아 같은 과일나무엔 살균제 살충제를 적기에 맞춰 해 줘야 한다. 외국에서 왔다는 벌레들이 나무잎을 갉아먹어가고, 이내 나무가 하얗게 헐벗는 모습은 두고 볼 수가 없다. 가만 놔두면 감도 다 떨어져버리고 뭐 하나 먹을 것이 없게 된다. 봄부터 비료 주고 나무 전정해 주는 모든 일이 허사가 된다. 눈물을 머금고 농약을 할 수밖에 없으나, 그것도 수확하기 한 달 전까지만 한다. 한 달이면 농약기운이 다 빠진다 하였다.
고추를 심고 나니, 터가 남는다. 수박도 심어본다. 참외도 몇 개 심었더니, 여주도 강낭콩도 작두콩도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총선을 치르고, 들숨날숨이 거칠어져서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가급적 하늘 보는 것이 싫어서 땅만 보기로 했다. 하늘이 사람을 속인다는 뜻밖의 일을 겪은 후로, 하늘에 대한 배신감이 컸다. 하늘이 옳다는 말도 믿지 않기로 했다.
땅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하기에, 이번엔 땅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벌레를 잡아주고 거름을 주고 병을 고쳐주면, 땅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는 그 말을 믿기로 했다.
거짓말을 징계하지 않는 하늘, 거짓말 하는 자를 선택한 백성들을 믿지 않기로 했다. 이제 우리는 신(神)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한다. 천벌을 내리지 않는 신(神)은 생명을 다한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도 여호아도 믿지 않기로 했다.
일에 집중하지 않고선 울컥이는 가슴을 달랠 수가 없었다. 입맛도 없이 살았다. 대파 심은 텃밭에서 상추 몇 잎 따다가 밥을 싸먹었으나 목구멍에 걸려서 혼이 났다. 의연하게 산다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일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 옛날 무너진 담장에 철망을 치고 넝쿨장미를 심었더니, 고추 심는 날부터 꽃덤불을 이루고 있다. 담장이 장미꽃으로 뒤덮인다. 하우스 앞 이팝나무에도 쌀밥 같은 무더기무더기 하얀꽃들이 핀다. 오디가 그리고 앵두랑 보리수가 파란 열매를 달고 있다. 보름이 지나면 먹을 수 있겠다.
하늘을 믿지 않기로 했으니, 내가 고추를 심든 감자를 심든 보리수를 따든, 하늘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갈수록 선(善)은 악(惡)을 이기지 못하니, 이제부터 내가 욕을 하든 술을 마시든 하늘이 관여할 일은 더욱 아니다. 푸른 것이 어디 하늘뿐이겠는가.
2024. 5. 10,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