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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智異山)
 
 
 
카페 게시글
♡ 사랑방 ♡ 스크랩 우울한 날 ㅠ.ㅠ 연휴(連休), 3일간의 반란(叛亂)
nolboo 추천 0 조회 179 08.12.28 15: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연휴(連休), 3일간의 반란(叛亂)

 

이른 아침에 잠이 깨이는 대로 트레이닝복에 운동모만 달랑 눌러 쓰고 집을 나왔습니다. 수안보(水安堡) 상록(常綠)호텔 사우나엔 금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어 적막하기 까지 했습니다.

사우나실에서 땀을 빼고 온탕(溫湯)과 냉탕(冷湯)을 번갈아 섭렵(涉獵)한뒤, 온탕에 몸을 담구고 비스듬이 누워 눈을 감았습니다. 홀연(忽然)히 잠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참으로 달콤하고 포근한 잠이었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갑자기 시장기가 들었습니다.

호텔앞 해장국 집에서, 주발의 밥을 통째로 얼큰한 콩나물국에 엎어 말아 땀을 흘리며 맛나게 먹고 나니 기분이 아주 상쾌했습니다.

 

운전석에 앉아 키를 꽂았습니다.

이대로 집으로 들어 가기는 좀 아쉽습니다. 어디로든 떠돌아 다니고 싶습니다.

더구나 오늘 부터는 1년에 몇번 안 돌아오는 3일의 연휴(連休)입니다.

황금 같은 연휴를 집구석에 들어박혀 있는다는 것은 보통 억울하고 아까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가족과 함께 하기엔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나는 아들 둘, 딸 둘 해서 애들이 넷이고, 그 때는 전부 중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애비를 닮아서 덩치들도 크고 아내 까지 합치면 모두 여섯명입니다. 

천천히 기어를 낮추고, 시동을 걸고, 엑세러더를 밟아 핸들을 남쪽으로 꺾었습다.

 

차가 없던 옛날에는 전국의 중요 지역에 역촌(驛村)이 있었고, 역촌에는 역참(驛站)이라는 기관이 있었습니다. 역참에서는 좋은 말들을 길러서 대기시켜 놓았다가 정부에서 지방으로, 또는 지방에서 중앙으로 소식을 전하는 관리들이 이제까지 타고 온, 힘들어 지친 말을 바꿔 타는 곳입니다. 이 말을 역마(驛馬)라고 했습니다. 역마는 외양간에 갇혀 대기하고 있는 자유롭지 못한 신세였다가, 발탁(拔擢)되어 나오면 이제 까지의 한을 풀듯이 힘차고 쏜살 같이 달렸다고 했습니다.

아주 가끔, 일년에 몇번 정도 오늘 처럼 뜻하지 않았던 돌출 행동으로 부산하게 떠돌아 다니는 나를 두고 친구들은 나를 '역마직성(驛馬直星)'이라는 별명으로 부를 때도 있습니다. 너희들이 딱 맞는 별명을 붙여 부른다면서 웃어 넘깁니다.

 

그럴 때는 무작정 집을 나와 싸돌아 다녀 풀어야 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오늘도 직장이라는 마굿간에 매여 있다가 3일간 풀려난 역마(驛馬)가 되어, 이렇게 또 헤매고 다녀야 할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내 성격이 덤벙 대거나 돌출(突出)행동을 하는 편이 아닙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아내 말을 빌리면 내 성격은 개울의 징검다리 돌도 두드려 안전을 확인하고 건너는 차분하고 쓸만한 물건이라고 하거던요.그런데 일년에 몇차례오늘 처럼 가슴 속 깊숙히 잠재해 있던 역마살이 되 살아 나면 억제 할 길이 없습니다. 아내도 그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용서해 줍니다.

대구(大邱)의 어는 주유소에서  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아내는 어쩐지 그런 예감이 들더라면서

'그래도 집에 들려서 옷이라도 갈아 입고 나가야지 않느냐, 운전 면허증과 현금 카드는 갖고 있느냐. 이번엔 동서남북 중 어는 방향이냐.' ---등,, 잔소리가 끝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끝에 가서는 운전 잘하고, 끼니 거르지 말고, 즐겁게 보내다 들어 오라는 말에 고마웠습니다.

 

대구에는 어린 시절, 가난에 찌들려 살기 힘들던 시절, 앞뒷집에 살고 학교도 함께 다니던 동갑내기 죽마고우(竹馬故友) 광수(廣壽)가 삽니다. 눈만 뜨면 서로 불러내 몸을 부대끼며 온 종일 싸돌아 다니던 그 친구네는 중학교 다닐 때 동네에서 빚을 많이 지고 가솔(家率)들이 야반도주(夜伴逃走)를 해버렸습니다.

그 친구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수도 있다는 아쉬움에 한동안 음식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설쳐댔습니다. 자라면서도 가끔 그 친구 생각이 나 울적해질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낼까. 얼마나 변했을까를 그려 보면서.

그렇게 헤어진지 3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저녁 밥상을 받고 식사를 막 시작하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전화기를 들고 내 이름을 댔습니다.

그랬더니 다짜고짜로 귀가 찡하도록 질러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야, 너 정말 역돌이 맞아." 어릴때의 기억이 번갯불 처럼 퍼뜩 스쳐 지나 갔습니다. 우리 집이 기차역과 아주 가까웠고, 그리서 밥만 먹으면 기차역 광장과 둘레를 싸돌아 다닌다고 또래들이 나를 '역돌이'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습니다.

그때 말고는 내 별명은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나도 잊혀진 지 아주 오래입니다.

얼떨결에 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어눌(語訥)한 말투로 되물었습니다.

"야, 임마!, 나 광수야. 아니 깜수. 너 나 잊었냐?" 어릴적 환상(喚想)이 번갯불 처럼 머리 속을 스쳐 지나 갔습니다. 광수는 살결이 유난히 검고 이름과도 비슷해서 나는 항상 그놈을 '깜수'라고 불렀습니다.

"야---!, 깜수! 너 살아 있었구나, 만나면 주리를 틀어 놓으려고 별렀다. 지금 전화를 거는 곳이 어디냐?"

"응, 나 지금 충주야, 죽기 전에 너 한번 만나 보겠다고 큰 맘 먹고 별러서, 떠난 뒤 처음 찾아왔다. 야, 충주가 이렇게 달라졌냐, 하긴 30년도 넘겨 지났지만,

나, 지금 어느 다방에 들어와 있다. 다방 이름이 뭐드라----.'

"야, 임마. 너 거기 꼼짝하지 말고, 무릅 꿇고 손들고 반성하고 있어. 역돌이 형님이 당장 달려 갈께. 빨리 마담  바꿔 임마."

우리는 이렇게 오랫만에 만나 저녁 먹고, 술집을 세 군데나 옮겨 다니며 허벌지게 퍼 마시고 떠들어 대다가 자정이 넘어서 여관을 찾아 들었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일년에 두세번 정도는 만납니다. 더 보고 싶은 놈이 찾아 오도록 했습니다. 날마다 만나도 좋겠지만 사는 곳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이 요란하고 시끄러운 풍진세계(風塵世界)에서 처자식들과 먹고 살자니 힘들거든요. 

깜수네는 그 옛날 충주에서 야반 도주하여 떠난 뒤 갈 곳이 없어서 며칠을 헤매다가 대구에 살고 있는 깜수 막내 이모네 집을 찾아가 곁방을 한간 얻어서 살림을 시작 했습니다. 깜수 아버지가 막노동 판에 나가 일을 해서 겨우 연명을 했습니다. 깜수는 몇 달을 놀다가 중학교 교과 과정을 가르치는 고등공민학교(중학교 과정)에 편입학 하여 졸업을 하고. 고등학교는 야간부를 선택해 다녔습니다.

깜수 아버지는 깜수와 달리 몸집도 작고 허약 했습니다. 잔병치례가 많은 분이었습니다. 막노동판에 일자리도 많지 않았고, 하루 나가면 다음 날 하루는 몸이 아파 앓아 눕는 편이었습니다. 깜수는 주간에 돈을 벌어서 가사를 도왔습니다.

깜수는 덩치도 크고 몸도 실했습니다. 이목구비(耳目口鼻)가 훤칠하고 눈이 샛별처럼 반짝였습니다. 어릴 때에 마을 어른들이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들 했습니다.

내 생각엔 개천 보다 훨씬 작은 또랑에서 용이 난 것 같았는데.

공부도 잘 했습니다. 학교에 함께 다니는 동안, 학급에서  1-2등 이하로 밀려난 적이 없었습니다.

깜수의 낮 직장은 자기가 다니는 고등학교입니다.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의 잔심부름이나  사역(使役)을 하는 사환(使喚)입니다. 시키지 않아도 제가 할일을 스스로 찾아서 말끔하게 매듭 짓는 성격에 선생님들의 칭찬이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심지어 화장실에 갈때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1학년말 학력 평가 성적이 야간부 학생 전체에서 1등을 했습니다.

학기말 종업식에서 깜수는 학력상(學力賞)과 근면상(勤勉賞)을 받았고, 교장 선생님은 전교 학생들 앞에서 칭찬과 격려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학년말 방학은 1주일입니다. 교감 선생님께서 부르시더니 1년 동안 고생 많이 했다고 칭찬 하시며 봄방학 동안은 학교 나오지 말고 집에서 편히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깜수는 쉴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밀어 주는 학교와 선생님들의 은혜를 생각하면 도저히 집에서 편히 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나가서 새 학기 준비를 하시는 선생님들의 일을 도와 드렸습니다.

 

봄방학을 시작 한지 닷새째 되는 날, 선생님들 전원이 아침 일찍 출근을 하시어 교장실과 교무실 청소 정돈을 손수 하시고, 분주히 돌아 다니셨습니다.

수시로 교장 선생님을 댁으로 직접 부르시어 학교 현황을 보고 받으시고, 학교에는 별로 나오시지 않으시는 학교 재단 이사장님께서 오늘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열시 쯤 돼서 나오신 이사장님은 선생님들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교장실로 들어 가셨습니다.

깜수는 선생님들의 전용 화장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인기척이 나서 뒤 돌아 보니 담임 선생님께서 손짓으로 부르셨습니다. 헝클어진 내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려 주시고 옷매무새를 바로 잡아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광수야, 이사장님께서 너를 만나 보시겠단다. 교장실로 들어가 뵈어라." 

깜수는 놀랬습니다. "당황해 할것 없다. 좋으신 말씀을 해 주실거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는 듯 했습니다.

항상 교장 선생님께서 앉아 계시던 안쪽 제일 큰 의자에 머리가 반백(半白)의, 태도가 점잖고 마음이 너그럽게 보이시는 중후(重厚)한 노신사(老神士) 한분이 앉아 계시고 그 앞에 교장 선생님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깜수는 황송(惶悚)해서 두손을 모으고. 머리를 깊숙히 숙여 인사를 올렸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당신이 앉으신 앞자리에 앉으라고 손짓으로 안내를 하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이사장님께서 내 아래 위를 훑어 보시는 눈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너무 높으신 어른 앞이라 황송하고 진땀 까지 났습니다.

"네 이름이 최광수지?"

이사장님의 물음에 깜수는 작고 또렷한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을 올렸습니다. 이사장님께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시고 말씀을 이으셨습니다.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들께서 너를 많이 칭찬 하시더구나."

                                                                                                                                                                           '시잠시 침묵(沈默) 하시더니.

"너를 직접 만나보기 위해서 오늘 내가 나왔다. 네 가정 형편을 내게 말해 줄 수 있겠니?"  내 앞자리에 앉아 계신 교장 선생님께서 "아주 소상(昭詳)하게 말씀을 올려라." 하시고 부축여 주셨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나는 입을 열었읍니다

충주에서 태어 나고, 아버지는 빚을 많이 지시고 야반도주 해서 대구의 막내 이모 네집 단간방을 빌어 살고 있다는 것, 지금 아버지가 막노동을 하여 생계를 잇고 있으며, 어머니는 몸이 많이 아프셔서 안 살림도 겨우 하시는 형편이라는 것까지 낮은 소리로 긴 말씀을 올렸습니다.

이사장님께서는 잠시 침묵을 지키시더니 무슨 결심을 하신 듯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 보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희망이 무엇이냐."

잠시 생각하다가 평소에 가슴에 품고 있던대로 말씀을 올렸습니다. "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말해줄 수 있겠니?" 하고 되 물으셨습니다.

" 지금까지 학교 다니면서 선생님들께 많은 사랑과 좋은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다. 저도 훌륭한 선생님이 돼서 제가 받은 것 이상으로 되돌려 주고 싶습니다."

이사장님은 교장 선생님을 바라 보시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씀 하셨습니다.

"지금 부터 내가 하는 말이 조금 어려운 말 같지만 너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학교 재단은 영리(營利)를 목적으로 하는 이익추구(以益追求) 단체가 아니다. 훌륭한 인재를 길러내 국가와 국민에게 기여(奇與), 봉사(奉仕)하는 단체다.

이미 교장 선생님과 합의를 봤다, 너를 우리 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 해 네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주겠다. 우선 야간부(夜間部)에서 주간부(晝間部)로 옮겨서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해라. 그래서 네 목적을 꼭  달성해라."

사람은 참 이상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슬퍼도, 기뻐도, 감격해도 눈물이 납니다. 깜수는 주체할 수 없이 뜨거운 눈물을 계속 흘렸습니다.

이사장님은 교장 선생님을 바라 보시며 말씀 하셨습니다.

"교장 선생님, 학교 기사(技士) 자리 하나 아직도 비어 있죠?" 학교 기사란 특별한 기능을 갖고 있지 않아도 됩니다, 학교에서 잡다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 광수 아버님을 채용하면 어떻겠소?"

"예. 지시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이사장님께서는 다시 깜수 쪽으로 몸을 돌리시어 손을 뻗어 깜수의 손을 덥석 잡으셨습니다.

"나한테 은혜를 입는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 희망 대로 훌륭한 스승이 돼서, 제자들에게 몇 곱으로 갚아라. 이 나라, 이 민족을 바르게 이끌어 나갈 많은 인재(人材)를 길러 내라." 하시면서 내 손을 꼭 쥐어 주셨습니다.

깜수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별할 수 없는 비몽사몽(非夢似夢)의 상태에서 쏟아지는 눈물만 훔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아래로 고개만 크게 끄덕였습니다.

 

내 친구 광수, 아니 깜수.

고향에서 함께 뛰놀던 개구쟁이 시절 부터 그 놈은 싹수가 있었던 놈입니다.

긍정적이면서도 고집이 세고, 끈질기고.

놀이나 싸움에서도 항상 끝을 보고야 마는 질기고 질긴 놈이었습니다.

깜수는 독하게 공부에만 전념했습니다. 그래서 해 내고 말았습니다.

깜수는 서울의 명문 국립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 하고 , 서울의 공립고등학교로의 발령을 마다 하고 , 저를 길러 준 대구의 사립고등하교로 왔습니다.

그 놈 말에 의하면 인두껍을 쓴 사람이라면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알아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은혜를 알면 반드시 갚아야 하는 지은보은(知恩報恩)이 인간의 바른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구의 국립대학 영어 교육과를 줄업하고 공립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저를 길러 준 사립고등하교 이사장님 막내딸과 결혼을 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깜수는 그 고등하교 교장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그 옛날의 깜수와 역돌이는 몇 차례의 술집을 거쳐, 여관에 들어 와 힘들고 고통(苦痛)스러웠던 지난 날의 추억을 서로 바꿔 나누며 긴 밤을 하얗게 새웠습니다.

이튿 날 아침 해장국으로 속을 달래고 헤어졌습니다.

차에 오르기 전 깜돌이는 내 손을 잡아 꼭 쥐며 " 이제는 우리 헤어지지 말자. 가능한 한 자주 만나서 한 풀이, 속 풀이를 하며 살자." 하며 크게 흔들어댔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일년에 3-4차례는 만났습니다.

재작년(再昨年) 봄에는 깜수로 부터 결혼 청첩장이 왔습니다.

봉투를 열었더니 제 맏아들 결혼이었습니다. 그런데 청첩장 아래에 굵은 싸인펜으로 "결혼식 주례(主禮)는 '내 친구 역돌이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사실 나는 결혼식 주례는 많이 선 편입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별 볼일 없는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흔히들 내 세우는 명예, 돈, 학식, 인품 등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춘 것이 없습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어떻게 몇번 서다 보니 이리 저리 소문이 퍼지고, 남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깜수는 내가 주례 섰다는 전력(前歷)을 알 까닭이 없읍니다. 그리고 너무 친한 사이라 그놈 앞에서 점잖을 빼고 주례를 서야 한다는 것이 생각 해도 좀 어색하고 고역(苦役)일것 같아 거절 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다.

나는 바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야, 이건 곤란해. 너는 대구에서 명문사학(名門私學) 교장 선생님이고 하객(賀客)들도 귀빈(貴賓)들이 많으실텐데. 나는 별 볼일 없는 시골 촌놈이야. 많이 부담 스러워. 다른 사람으로 바꿔." 솔직한 내 심정이었습니다.

단번에 저쪽에서 귀가 찢어질 듯이 내 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야, 임마. 너 나한테 별 볼일 없는 촌놈이라고 함부로 말하기냐. 나도 촌놈아야.

내 평생 가슴 속에 묻고 살았던 친구, 그러면서도 존경하는 친구가 너 하나 뿐인데---. 우리 식구, 그리고 결혼 할 당사자 애들이 있는 자리에서 쾌(快)히 합의(合意)를 봤어. 잔소리 말고 네가 우리 애들 결혼식 주관(主管)해 줘. 그렇지 않으면 너와 나와는 의절(義絶)이야."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도저히 빠져 나올 길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만, 그만해라. 알았다. 내가 졌다. 결혼식 할 애들의  근황(近況)이나 대라.

네 그 큰 아들이 공군사관학교에 다닌다고 전에 들은 것 같은데---."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나 화나게 해서 너 득 볼것 있냐?"

빨리 덥는 구들이 빨리 식는다고 깜수의 성깔이 바로 누그러졌습니다.

" 응, 맞아. 그 놈 공군 대위고 빠일롯트야. 전투비행단 소속인데 항상 바쁜 모양이야. 며느리 감 하고는 연애를 오랫동안 한 모양인데, 시내 공립고등학교 교사야. 예의 바르고 성격이 좋다고 우리 식구가 홀딱 반한 것 같아.

그건 그렇고, 너 결혼식 전날 내려 와. 내가 숙소 예약(豫約)해 놀께. 네가 있는 곳이 거리가 멀어서 당일 날 와서는 피로할 꺼야."

이렇게 해서 나는 깜수 맏아들 결혼식 주례를 주관 했습니다. 

 

 이야기가 많이 길어진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 대구에 와 있습니다.

이 깜돌이 친구가 연휴기간이라 출근을 안했을 것 같았습니다. 지갑에서 명함을 찾아 그래도 우선 교장실로 전화를 했습니다.

" 예. 최광수 입니다." 굵직한 귀에 익은 그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습니다.

"야, 너 큰 죄 짓고 숨어 다니는 놈이구나, 가명을 대니까 말야. 네 이름이 깜수지 왜 광수야 임마. 본명을 다시 대봐." 이 친구 수화기를 든 채 한참을 웃더니.

"역돌이구나. 그래 나 깜수다. 어디서 전화 하는거니?"

"나, 네가 돈 벌어 먹고 사는 큰 집 대문 앞이다. 쉬는 날인데 뭐하러 껴 나와 있냐? 직원들에게 미운 눈총 맞으면 오래 못살아."

"그러지 않아도 3일 연휴가 있어서 역마직성(驛馬直星)님이 괘도를 벗어나 왈림(枉臨)하시는 은총(恩寵)을 베풀어 줍시오 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10분만 기다려. 내가 결재하던 서류 마저 마치고 나갈 께.

아, 그리고 내가 지금 기사 한테 전화 걸어, 네 차 학교 직원전용 주차장에 옮겨 놓으라고 할테니까 나가거든 키 줘. 우리 택시 타고 돌아 다니자."

'이 친구가 술이 마려운 모양이구나. 하긴 맨숭맨숭 돌아 다니기는 심심하니까.'

학교 앞에 있는 조촐하고, 그렇지만 아담하게 꾸며진 카페에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두어시간 쯤 지났을까. 깜돌이가 자기 집에 가서 저녁을 먹자며 일어 났습니다.

"아까 네 전화 받고 바로 집으로 전화 했더니, 너를 집으로 꼭 모시고 오래. 자기도 마침 연휴라 쉬고 있으니까 음식을 손수 만들어서 대접하고 싶대. 내가 만나는 고향 친구가 너 뿐이 더 있냐. 그래서 식구도 너를 끔찍히 생각하고 있어"

나는 깜수네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또 둘이 나와서 자정 가까이 쏘다니다가

굳이 제 집에 가서 자자는 것을 뿌리 치고 여관을 찾아 들었습니다.

"내일 아침 내가 올때 까지 꼼짝 말고 자고 있어. 시원한 콩나물 해장국으로 속 풀자."   "알았어, 임마."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나는 전날 술을 마시면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잠을 깨는 버릇이 있습니다.

학교에 가서 기사를 만나 차를 찾아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경주에 가서 아침겸 점심을 먹고, 자주 온 곳이지만 명승지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리고 곧장 해운대로 차를 몰았습니다.

이틀 내내 운전을 하고 어제 저녁 술까지 펐더니 많이 피로(疲勞)했습니다.

숙소를 잡아 들어, 긴 낮잠을 자고 일어 났습니다. 저녁 여덟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밖에 나오니 기온이 많이 쌀쌀해서 자동차 트렁크에 있는 등산용 방한 파카를 꺼내 걸쳤습니다. 저녁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간단히 요기(療飢)를 하고 바닷가로 나왔습니다. 청명(淸明)한 하늘 아래 바람기도 별로 없어, 바닷물이 장삼(長衫)을 걸치고 춤을 추는 고운 여인네의 치맛자락 처럼 흐느적거렸습니다.

올 여름 백만이 넘는 인파(人波)가 몰려 광란(狂亂)의 축제(祝祭)를 펼쳤다는 해변엔, 휴가철이 지난 지 3주 뿐이 안 됐는데 한적(閒寂)했습니다.

 상점들도 몇개 남지 않고 문이 닫혀 있습니다. 나 같이 게으른 손님이라도 맞겠다고 몇개의 상점에 희미한 불빛이 가물거렸습니다. 백사장을 한 바퀴 돌아와 바닷물 가까이에 있는 비취 파라솔 밑 라운드 테이블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상점에 손짓해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주문 했습니다.

아주 천천히 맥주잔을 기울이면서 지나온  긴 내  인생여정(人牲旅情)에 있었던 희노애락(喜怒哀樂)과, 그리고 내 과오(過誤)로 인해 남과 나의 가슴에 각인(刻印)되었을 상처(傷處)들을 반추(反芻)하면서 오랜 사색(思索)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해바라기 처럼 나만 쳐다 보고 사는 내 아내, 네명의 새끼들, 그리고 내가 이세상에서 만나 연(緣)을 맺은 벗들과 그 외에 많은 사람들------,

나는 과연 누구이며, 남은 삶을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정답(正答)도 못 찾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갔습니다.

 

반짝이는 하늘의 별과, 게으르게 꿈틀 거리는 파도에 영혼을 뺏겨 있는데, 옆에서 조용한 인기척이 났습니다. 언제 왔는지 옷차림이 단정한 젊은 아낙이 커피가 담긴 종이 컵을 내 앞으로 살며시 밀어 넣고 있었습니다.

"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손님도 없어 오늘은 그냥 들어 가려고 하다가, 날씨는 썰렁한데 혼자 계시는 모습이 외로워 보여서 따뜻한 것 한잔 드시라고요."

보온병에 끓인 커피를 담아 밤 해변 손님들께 파는 '이동 커피 아줌마' 였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더운 커피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사람도 없는데 뭐하러 나오셨어요. 날씨도 찬데---."

"그래도 몇잔이라도 팔릴까 하고 나왔는데 -----."

"아줌마, 실례가 안 된다면 맞은 편 자리에 앉으세요. 맥주도 한잔 하시며 외로운 사람 말벗도 해 주시고요. 그것도 부처님께 공덕(功德)을 쌓는 일이에요."

아줌마는 잠깐 망서리더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조용히 앉았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런 험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예의 바르고 교양이 있어 보였습니다. 술은 많이 못하는 듯 했습니다. 내가 마시고 건너면 꼭 3분의1 정도씩만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대작(對酌)을 해 가며 꽤 오랜 동안 말을 나누었습니다.

초면인데도 오래 묵은 친구처럼 속내를 들어내는 편안한 분위기였습니다.

 

커피 마담은 양(梁)여사였습니다.  대학 2학년때 부터 같은 과(科) 한해 선배를 만나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는 부산 해운대가 고향인 장(張) 선배로 한 학년 위였습니다.

양여사의 고향은 전남 영광이었고 아버지는 그 곳에서 논밭 농사를 짓고, 틈틈이 고기잡이도 해가며 힘겹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들 하나, 딸 둘 삼남매가 다행이

공부를 잘 해 모두 서울에 올라 와 대학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자식들 잘 두어 크게 성공 하겠다고 칭찬 반 부러움 반으로 치켜 세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시골에서 농사와 고기 잡이를 병행(倂行)해도 다섯 식구 생활하고, 삼남매 중고등학교 공부시키는 것에도 쪼들려 조합에서 빚을 해마다 늘려 쓰고 있는 형편이었는데, 하나 둘 자식들이 서울로 올라 가면서

빚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 났습니다.

양여사의 부모는 고심 끝에 큰 결단(決斷))을 내렸습니다. 논밭과 고기잡이배 집 등을 팔아 조합빚을 청산(淸算)하고 서울로 올라와 강동구 고덕동에 동네 수퍼를 넘겨 받아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말이 수퍼지 조그만 구멍 가게였습니다.

 

장(張)군은 부산 해운대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일당(日當)을 받고 남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했으며, 어머니는 광주리에 생선을 담아 머리에 이고 돌아 다니며 행상(行商)을 했습니다.

벌이가 좋지 않아 장군 하나 공부 시키기도 여간 힘겨운게 아니었습니다.

 

양양(梁孃)과 장군(張君), 두사람은 교내외(校內外)에서 2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어울려 다녔습니다. 학교 식당, 도서관, 강의실, 그리고 교외에서도=========.

특히 두사람은 산행을 좋아 했습니다. 주로 서울 근교의 산을 택했습니다.

북한산의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의 삼봉(三峰). 그리고 소요산, 관악산, 도봉산,

수락산 등을. 그리고 시외 버스를 타고 나와 서울 근교의 산들도 올랐습니다.

처음에는 친구로 어울린 것이 만남을 계속할 수록 정이 두터워져 사랑으로 변했습니다. 끝내 두사람은 결혼까지 굳게 약속하는 두터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두사람의 집에서는 극력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들의 굳은 약속과 결심을 꺾끼에는 불가항력(不可抗力) 이었습니다.

양양은 삼학년, 장군은 졸업이 가까운 사학년 가을이 왔습니다. 장군은 군대를 갔다와서 취직을 해야겠다고 자원입대(自願入隊)를 희망해서 11월 중순에 가기로 입영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2년 넘는 결별(訣別)을 두려워 하며 만남이 더욱 잦아 ?습니다.

마지막 결별(訣別)의 향연(饗宴)을 아주 멋진 장소에서, 멋지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 장소를 북한산 백운대로 정했습니다. 서울에서 제일 높고, 맑은 날 정상에서 바라 볼수 있는 시계(示界)가 사방 100리가 넘는다고 합니다. 더구나 백운대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인수봉과 만경대의 깎아 지른 듯한 암벽과, 가을 철 오색단풍(五色丹楓)의 화려(華麗)한 향연(饗宴)은 신(神)들의 축제(祝祭)라 하지 않던가.

두사람은 우이동 종점에서 만나 도선사 주차장을 경유하는 등산로(登山路)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구름 한점 보이지 않는 쾌청(快淸)한 가을 날씨입니다.

입으로 "호---"하고 불면 빙글 빙글 돌며 날아 갈 것 같은 하얀 새털 구름이 하늘 가장 자리에 걸려 졸고 있습니다. 산과 계곡은 온통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물들어 환상(幻想)적인 감흥(感興)을 일깨워 줬습니다. 양양이 준비해 온 점심과 간식은 장군이 등에 지고 같습니다.

도선사 주차장을 지나고, 매표소를 거쳐, 우이 산장에서 잠쉬 쉬었습니다. 갈림 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서 깔딱고개에 올라 발 아래 펼쳐진 청,,황, 적, 백 ,흑(靑,黃,赤,白,黑)의 오색찬연(五色燦然)한 수목(樹木)들의 향연(饗宴)과, 그 자리에서 울려 퍼지는 천지(天地)를 매혹(魅惑) 시키는 율동(律動)과 함성(喊聲)이 온 천하(天下)를 들먹이고 있는 듯 했습니다.

두 사람은 젊어 힘이 넘치고, 산을 탄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오르는 평범한 등산로 보다는, 어렵고 힘들고 위험하다고 하는 험로(險路)를 텍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하면 등산의 묘미(妙味)와 쾌감(快感), 그리고 성취감(成取感)을 몇배로 더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대부분의 등산객이 오르는 등산로를 버리고, 그 옆의 절벽을 타기로 했습니다.  계곡(溪谷)의 경관(景觀)이 훨씬 더 환상(幻想)적이었고, 젊은 몇사람이 로프도 없이 기어 오르는 것을 보고 자신감(自信感)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양양이 앞서 오르고 장군이 뒤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혹시 앞사람이 미끄러지려 할 때 뒤의 힘센 사람이 손이나 몸으로 받쳐줄 수 있어서 두 사람은 등산때 마다 험한 절벽일 수록 그렇게 올랐습니다.

바위의 돌출 부분이 있으면 더듬어 손가락들의 끝을 모아 힘 주어 잡고, 다음 발 디딜 부분을 더듬으 디뎌, 가슴을 바위에 바짝 붇혀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나무나 풀이 있으면 더듬어 잡고 살며시 당겨봐서 안전을 확인 하고, 가능한한 뿌리에 가까운 아랫 부분을 택해 움켜 줘야 합니다. 초목(草木)의 끝 부분이나 중간 부분은 뿌리에 가까운 부분 보다 약해 부러지거나 끊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절벽(絶壁)의 3분의2 쯤 전진(前進) 했을 때, 양양이 한 곳에 멈춰 꼼짝하지 못하고 달라 붙어 있습니다.

"양아, 힘내. 정신 바짝 차려=====. " 장군이 벼락 치듯 외쳐 댔습니다.

"오빠. 도저히 안 되겠어. 도저히----"

힘이 빠져 헐떡이는 가냘프게 흐느끼는 목소리입니다.

"임마, 꼭 잡고 붙어 있어, 내가 올라가 받혀 줄께."

장군이 혼신(渾身)의 기(氣)를 써 오르려는 순간, 양양의 몸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극히 짧은 찰나(刹那)의 순간(瞬간)이었습니다. 

장군은 비몽사몽(非夢似夢)의 혼미(混迷)한 상태에서, 팔을 뻗혀 미끄러져 내려 오는 양양의 몸을 잡아 가슴에 꼭 껴 안고 암벽에 부딪히며 아래로, 아래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조금 전까지 암벽(巖壁) 아래에서 영원한 사랑과 행복의 찬가(讚歌)를 구가(謳歌)?던 그들이, 일순간(一瞬間)에 천당(天堂)에서 지옥(地獄)의 나락(那落)으로 추락(墜落)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주위가 낮은 소리로 웅성거리고,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 양양이 눈을 떴습니다. 자기 몸이 하얀 병실 침대 위에 눕혀 있었고 옆 침대 위에 있는 환자는 잠 속에 빠져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머리 속에 인수봉 암벽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던 환상이 불현듯이 스쳐 지나 갔습니다.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여 봤으니 전신(全身)이 곰짝달싹 못하게 침대에 묶여져 있었습니다. 온 몸에 통증(痛症)이 심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제서야 팔과 다리에 보목(保木)이 매여져 침대 모서리에 결박(結縛) 되어있음도 발견했습니다.

병실 복도를 지나던 간호원이 열려진 문틈으로 이 광경(光景)을 목격(目擊)하고 잰 걸음으로 달려 들었습니다.

"정신이 돌아 오셨군요. 절대 움직이시면 안 되십니다."하며 허트러진 침대를 정리 했습니다, "환자님은 오른 쪽 팔과 왼쪽 다리 뼈가 골절(骨切)이 되셨어요."

"오빠는요?"

"아-,함께 실려 오신 남자 분 말씀이죠. 지금 중환자실(重患者室)에 계세요. 아직 의식(意識)이 회복(回復)되지 않으셨어요."

"많이 다치셨나요." "글쎄요, 저희들은 중환자실 담당이 아니라 잘 몰라요. 그러고 안다고 해도 담당 과장님 외엔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우선은 자신만 생각 하세요."하며 고개를 까딱하고 나갔습니다.

 

그 험한 암벽(巖壁)에서 떨어져 내리는 순간, 양양(梁孃)은 장군(張君)이 잽싸게 받아 품에 꼭 껴안고 내려 굴렀기 때문에 팔과 다리의 골절(骨絶)외엔 별다른 부상(負傷)이 없었고 젊은 나이이기 때문에 쉽게 치유(治癒)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군은 온 몸이 바위에 부딪쳐 구르고, 밑바닥 바위에 떨어지는 충격(衝擊)으로 아주 형편 없이 엉망이 된,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었습니다.

다행이 머리 부분은 별로 다치지 않았으나 척추(脊椎) 부분의 심한 충격과 골절로

여러번의 수술과 치료에도 불구하고, 하반신(下半身)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 받는 6개월여 동안, 먼저 치료를 마친 양양이 극진히 환자의 수발과 물리 치료를 도와 퇴원후 두사람은 해운대의 장군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양양의 집에서는 결혼식도 안한 딸이 반신불수의 장군과 살겠다는 완강한 고집을

꺾지도, 용서할 수도 없었습니다. 네 고집대로 하겠다면 딸 하나 죽고 없는 셈 칠테니 다시는 서울 집에 왕래도 연락도 말라는 폭탄선언으로 의절(義絶)까지 선었했습니다.

장군의 아버지는 남의 고깃배에 타 품팔이를 했고, 어머니는 어시장(漁市場)에서 생선을 사서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돌아 다니며 행상을 했습니다.

양양은 집에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 가며 장군의 수발과 병원에서 가르쳐 준 대로의 물리 치료를 도왔습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몸집이 큰 남자의 몸을 다루는 일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특히 대소변의 배설(排泄)을 돕고, 치우고, 손빨래로 궂은 옷을 빨아 말려 하루에도 몇차례씩 갈아 입히는 일에 양양은 많이 지쳐 갔습니다. 몸이 여위고 몰골이 흉하기 까지 했습니다.

더구나 장군의 성격이 거칠어 지고 화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양양 보고 서울로 올라가 다시 공부를 계속하고 해운대로 내려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양양이 싫어졌다는 것입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내 앞에서 없어져 달라고 했습니다. 때로는 말도 안하고, 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심지어는 차려 온 밥상을 던져 엎어 버리고, 험한 욕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통곡도 합니다. 네가 내게서 없어져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양양은 장군의 속내를 꿰뚫어 알고 있습니다. 자기를 이 궂고 힘든 일에서 해방시려는 것을. 양양은 장군의 앞에 앉아 흐느껴 울면서 말했습니다.

"오빠, 내가 정말로 없어져 줘?" "그래 없어지라니까!"

"오빠,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했쟎아. 입장(立場)을 바꿔서 우리 둘의 처지가 반대로 되었다고 가정(假定) 했을 경우 오빠가 나를 버리고 떠나 가서 살때, 그때의 오빠의 한평생이 행복할까?"

장군이 갑자기 말문이 막혔습니다. 멍하니 넋나간 사람 처럼 바라만 봤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내게 도움이 되면 계속하고, 짐이 되면 떨어진 헌 신짝 처럼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것이었을까? " 장군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내가 서울에 올라가 대학 공부를 마져 하고, 환경이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애들을 낳아 기르며 남보기엔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해도 그건 빈 껍데게의 행복이야. 내 정신, 내 영혼의 행복은 오빠 곁을 떠나서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어.

이대로 오빠를 돌봐 가며 힘겹게 사는 것이 차라리 행복해.

오빠는 내 신념과 고집이 쇠심줄 처럼 질기다고 했지? 나도 그런 나를 인정해.

궂이 나가라면 나갈께. 그리고 영원히 안 돌아 올께. 학교도, 서울의 집도 아니야.

내가 나가서 갈길은 한 군데 뿐이야."

기죽은 장군의 목소리가 작게 나옵니다. "

"그럼 죽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그걸 꼭 내 입으로 말을 해야 알아?" 이번엔 양양이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두 사람은 얼싸 안고 통곡(痛哭)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기로 서로 다짐을 했습니다.

 

이러기를 여러 해, 둘 사이에는 딸과 아들 남매가 태어나 자라, 초등학교에 다닙니다. 남편도 휠체어를 타고 집안 살림을 돕고, 집 밖에 나와 돌아 다닙니다.

이 곳은 여름 한철, 관광과 해수욕객으로 붐빕니다. 그때는 민여사도 음식점의 주방일과 도우미로 돈벌이를 합니다. 그 철이 지나 요즘 처럼 한산해지면 이동 커피라도 갖고 나와 돌아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손님이 아주 없었습니다.

"지금 후회는 안하십니까" 질문을 하고서 바로 '아차'하고 후회 했습니다.

이런 질문을 해서 가슴 아픈 상처를 건드린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세상에 태어 나서, 처음이자 지금 까지 사랑한 유일(唯一)한 남자에요. 백운대 절벽에서 그 사람이 자기 목숨을 담보(擔保)로 날 구해 줬어요. 그때 나를 버렸으면 자기는 다치지도 않았어요.

우린 지금도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금년 겨울 방학 때 우리 네 식구가 서울 친정에 올라 가 아버지 어머님께 용서(容恕)를 구하고, 딸과 사위로서의 인정(認定)을 다시 받을 꺼예요. 지난 달에 동생에게서 부모님들이 그러기를 바라고 계시는 듯 하다는 전갈을 받았어요." 손 수건으로 눈가의 눈물을 찍어 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처음 뵙는 분께 즐겁지도 못한, 너무 긴 넋두리를 해서요. 사과 드리는 뜻으로 제가 한잔 따라 올릴께요. 마음이 후련 해 졌어요."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감사 해야죠. 나 같이 떠돌아 다니는 보잘것 없는 나그네에게, 속에 맺힌 한을 털어 놔 주신 다는 것이 쉽지 않으셨을 텐데---

참, 잘 하셨습니다. 그리고 존경 스럽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사랑도, 결혼도 손익(損益) 계산을 따져서 자기에게 불리(不利) 하면, 앞뒤 돌아보지 않고, 가차(假借)없이 중도(中途) 해약(解約)해 팽개쳐 버리는 경향(傾向)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감탄고토(甘呑苦吐)'라고 해요. 그러나 세상을 오래 살아 온 현명한 사람은 달아도 삼키고, 써도 삼키는 감탄고탄(甘呑苦呑)의 더 슬기로운 방법을 택하죠. 입에는 쓴 한약이 오히려 몸에는 훨씬 더 이롭다는 논리(論理)로 이해가 가실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판단 하기로는 두분은 절대로 헤어지지 않으실 현명한 분들이에요. 만약에 헤어져 산다면 두 사람은 각기 작은 가슴에, 바윗덩어리 처럼 크고, 무겁고, 단단한 철천지한(徹天之恨), 하늘을 꿰뚫는 통한(痛恨)의 바윗돌을 안고, 그 고통에 몸부림 치다 죽어 가야 해요. 그런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죽어가는 것입니다."

고개만 숙이고 있던 양여사가 얼굴을 들어 눈을 크게 뜨고, 넋나간 사람 처럼 내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두분은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했죠"

양여사가 고개를 크게 끄덕여 답했습니다.

"그것 만으로 충분합니다, 그것만 있으면 지금의 좋지 않은 환경과 어려운 조건에서 탈출(脫出)하고, 극복(克復)해 나가기에 충분합니다.

나도 많은 감명(感銘)을 받았어요. 앞으로의 내 삶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시간이 벌써 12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오늘 저녁 양여사가 들려 준 한 풀이의 대가와 , 보온병의 커피 값은 내가 지불해 줘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야 마음이 오래도록 편할 것 같았습니다. 

맥주를 몇 잔 더 주고 받고 헤어지면서 한사코 뿌리치는 것을 보온병 가방속에 찔러 넣었습니다.

"오늘 말동무 해 줘서 외롭지 않았습니다. 부디 행복 하세요."

 이렇게 해서 사흘건 떠돌던 역마직성(驛馬直星)은 다음 날 오후 귀가(歸家)했습니다.

             연휴(連休), 3일간의 반란(反亂)을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 왔습니다.

             내일 부터는 처자식하고 먹고 살기 위해 다시 일터로 나가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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