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부는 주변보다 약간
높은 네모난 석축 위에 있는데 귀부의 머리인 귀두(龜頭)는 절단되어 없
어지고
부러진 목 아랫부분만 쓰라리게 남아있다. 지금이라도 엉금엉금 움직일 것 같은 앞발에
는 5개의 발톱이, 뒷발에는 1개가 적은 4개의 발톱이 있으며, 귀부의 등에는 6각형의 등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등 중앙에는 비석을 심었던 네모난 비좌(碑座)가 허전하게 자리를 지키
고 있다.
등무늬와 당초문(唐草紋)이 새겨진 8세기 중엽 신라시대
비석으로 비록 건강이
많이 안좋긴 하
지만 그 시절 귀부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보물이다.
※ 신라 33대 군주. 성덕왕(聖德王 ?~737 <재위
702~737>)
성덕왕은 신문왕과 신목왕후 김씨의 아들로 효소왕의 친아우이다. 원래 이름은 김융기(金隆基)
였으나 당나라 현종(玄宗)과 이름이 같아서 나중에 흥광(興光)으로 이름을 갈았다. <또는 김지
성(金志誠)이었다고 함>
702년 7월 효소왕이 붕어하자 진골 귀족들이 화백(和白)회의를 열어 그를 왕위에 세웠다. 그의
나이는 불과 10대 초반(많으면 14살)이었다.
702년 9월, 민심 수습과 신하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문무관리들의 관작
을 1단계씩 올려주었으며, 여러 지역의 조세를 1년간 면제했다. 또한 아찬 원훈(元訓)을 중시로
삼았으며, 10월에는 삽량주(歃良州, 경남 양산)에서 도토리가 밤으로 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703년 정월, 신궁(神宮)에 제를 지냈으며,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선물했다. 7월에 영
묘사(靈廟寺)에 불이 나고 서울에 홍수가 나서 죽은 이가 속출했다. 중시 원훈이 관직에서 물
러나자 아찬 원문(元文)을 중시로 삼았다. 또한 왜국에서 204명에 이르는 사신단을 파견했으며,
아찬 김사양(金思讓)을 당나라에 보냈다.
704년 정월, 웅천주(충남 공주)에서 금빛 영지를 바쳤고, 3월에 당나라에 갔던 김사양이 돌아와
'최승왕경(最勝王經)'을 바쳤다. 5월에는 소판(蘇判)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왕비(성정왕후)로
삼았다.
705년 정월, 중시 원문이 사망하여 아찬 신정(信貞)을 중시로 삼았다. 3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으며, 5월에 가뭄이 들었다. 8월에는 노인들에게 술과 밥을 내렸고, 9월에 살생을
금하는 조서를 내렸다. 10월에 동쪽 지방에 흉년이 들자 왕은 사람을 보내 백성을 구제했다.
706년 정월, 이찬 인품(仁品)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나라에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
제했고, 3월에 뭇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8월에 중시 신정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면서 대아찬
김문량(金文良)을 중시로 삼았다. 8월과 10월 당나라에 조공을 했고, 12월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707년 정월, 전년 흉년으로 백성들이 많이 굶어죽자 1명당 하루 좁쌀 3되씩을 7월까지 나눠주었
으며, 2월 대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달랬다. 또한 백성들에게 5곡 종자를 어려운 정도에 따라 차
등있게 나눠주었다.
708년 정월, 사벌주(경북 상주)에서 상서로운 식물(금잔디)을 바쳤다. 2월에는 지진이 났으며,
4월 진성(鎭星, 토성)이 달을 범하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709년 3월, 청주(菁州)에서 흰 매를 바쳤다. 5월에 가뭄이 들었고, 8월에 죄인들을 사면했다.
710년 정월, 천구성(天狗星)이 삼랑사(三郞寺) 북쪽에 떨어졌다. 지진이 나자 죄인을 사면했다.
711년 3월, 봄인데도 눈이 많이 내렸다. 5월에 짐승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금했으며, 10월에 왕
이 직접 남쪽 지방을 시찰했는데, 이때 중시 김문량이 죽었다. 11월에는
친히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군신에게 보였다. 백관잠의 내용은 아쉽게도 전하지 않으나 신하들이 지켜야 될
덕목들을
정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712년 3월, 이찬 위문(魏文)을 중시로 삼았다. 당나라 현종이 노원민(盧元敏)을 사신으로 보내
왕의 이름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 이유는 당 현종의 이름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중으로 이
름을
갈았다. 4월에 온천에
행차했으며, 8월에 김유신의 처를 부인(夫人)으로 봉하고 해마다 곡
식 1천 석을 주었다.
713년 2월, 전사서(典祀署)를 설치했다. 당나라에 김정종(金貞宗)을 사신으로 보내 조공을 했는
데, 당 현종이 문루까지 나와 사신을 맞이했다. 10월 중시 위문이 나이가 많아 퇴직을 청하자
승낙했으며, 12월에 죄수를 사면하고 개성(開城)을 쌓았다.
714년 정월, 이찬 효정(孝貞)을 중시로 삼았다. 2월 상문사(詳文師)를 통문박사(通文博士)로 고
쳐 표문(表文)을 쓰는 일을 맡게 했으며, 왕자 김수충(金守忠)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宿衛)하게
하니, 당 현종이 집과 비단을 주어 크게 관심을 보이며 조당(朝堂)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급찬 박유(朴裕)를 당나라에 보내 새해 인사까지 하니 현종은 기분이 좋아 조산대부(朝
散大夫) 원외봉어(員外奉御)의 관작을 주어 돌려보냈다.
여름에 가뭄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으며, 가을에 삽량주에서 도토리가 또 밤으로 변했다.
10월에
당 현종이 내전(內殿)에서 재상과 4품 이상급의 신라 사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715년 4월, 청주에서 흰 참새를 바쳤으며, 5월에 죄수를 사면했다. 6월에 크게 가뭄이 들자 왕
이 하서주(河西州) 용명악(龍鳴嶽)에 살고 있는 거사(居士) 이효(理曉)를 불러 임천사(林泉寺)
연못가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했더니, 비가 열흘 동안 내렸다.
9월에 태백(太白, 금성)이 서자성(庶子星)을 가렸고, 10월에 유성이 자미(紫微)성좌를 침범하였
다. 12월에는 유성이 천창(天倉)으로부터 태미(太微)성좌로 들어갔고, 이때 죄인들을 사면하면
서 왕자 중경(重慶)을 태자로 책봉했다.
716년 정월, 유성이 달을 범해 달빛이 없어졌으며, 3월 성정왕후를 궁밖으로 내보냈다. 전년 하
반기에 일어났던 여러 번의 천문 현상을 통해 외척 세력과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외척의 세력을 꺾을 요량으로 태자의 생모를 폐위하고 내쫓은 것이다. 그래도 12년을 같
이 산 부인인지라 채색 비단 500필, 밭 200결, 벼 10,000섬과 강신공(康申公)의 옛 집을 구입하
여 하사했다.
얼마 뒤 커다란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라갔으며, 숭례전(崇禮殿)이
무너졌다.
아마도 외척들이 모반을 꾀하면서 숭례전이 손상된 것이 아닐까 싶다.
6월 가뭄이 들자, 거사 이효를 다시 불러 기우제를 지내니 곧 비가 왔으며, 죄인들을 사면했다.
717년 2월, 의박사(醫博士)와 산박사(筭博士)를 각각 1명씩 두었다. 3월에 새로 궁궐을 지었으
며, 4월에 지진이 났다. 6월에는 태자 중경이 어린 나이에 죽자 시호를 효상(孝殤)이라 하였다.
9월에 당나라에서 왕자 김수충이 돌아와 문선왕(文宣王, 공자)과 10철(十哲), 72제자의 초상화
를 바쳤다. 그래서 그것들을 대학(大學)에 안치하여 유학을 더욱 장려했다.
718년 정월, 중시 효정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파진찬 사공(思恭)을 중시로 삼았다. 2월에 왕이
직접 서쪽 지방을 시찰했는데, 나이 많은 사람과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이 없는 노인들을 몸
소 위로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물건을 차등있게 하사했다.
6월에 황룡사(皇龍寺) 탑에 벼락이 떨어졌으며, 처음으로 누각(漏刻, 물시계)를 만들었다. 10월
에 유성이 묘(昴)성좌에서 규(奎)성좌로 들어가고, 여러 작은 별들이 이를 뒤따랐으며, 천구성(
天狗星)이 동북방에 떨어졌다. 그리고 한산주(漢山州) 관내에 여러 성을 쌓았다.
719년 9월, 금마군(金馬郡, 전북 익산) 미륵사(彌勒寺)에 벼락이 떨어졌다.
720년 정월, 지진이 났다. 상대등 인품이 죽자 대아찬 배부(裵賦)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3월
에 이찬 김순원(金順元)의 딸을 왕비(소덕왕후)로 맞이했다. (그해 6월 왕후로 봉함)
4월에 큰 비가 내려 산 13곳이 무너졌고, 우박까지 떨어져 볏모가 상했다. 5월에 해골을 땅에
묻게 했으며, 완산주와 웅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가을에 메뚜기들이 창궐하여 곡식을 해치
자 중시 사공이 그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나니 파진찬 문림(文林)을 중시로 삼았다.
721년 7월, 하슬라(何瑟羅, 강원도 강릉 지역) 지방의 장정 2,000명을 징발하여 북쪽 국경에 장
성(長城)을 쌓았다. 발해의 칩입에 대비하고자 그런 듯 싶다.
722년 정월, 중시 문림이 죽자 이찬 선종(宣宗)을 중시로 삼았다. 2월에 서울에 지진이 났으며,
8월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했다.
(우리나라 사회경제사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부분으로
정전은 나라가 백성에게
토지를 직접 지급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에 대해 나
라가 인정한 것을 뜻함)
10월에
모벌군성(毛伐群城, 경주시
외동읍)을 축성했다.
723년 3월, 당나라에 더욱 잘보이고자 미녀 2명을 선물로 보냈다. 이들은 나마(奈麻)
김천승(金
天承)의 딸인 포정(抱貞)과 김충훈(金忠訓)의 딸인 정완(貞菀)으로 모두 왕의 고종사촌인데, 의
복과 그릇, 노비, 수레, 말 등을 딸려 보내 예를 보이니 당 현종이 무안해하며 후하게 선물까지
딸려 돌려보냈다. 허나 정완의 비석에는 742년<천보(天寶) 원년>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고 나와있
으니 어느 것이 옳은 지는 모르겠다.
4월에는 당나라에 과하마(果下馬) 1필과 우황, 인삼, 머리 장식, 조하주(朝霞紬), 어아주(魚牙
紬), 매를 아로새긴 방울, 바다표범 가죽, 금, 은을 조공으로 보내며 간지나게 아부를 떨었다.
이때 당나라로 국서를 보내
'우리 신라는 바다 구석진 곳 먼 귀퉁이에 있어서 본래부터 천주(泉州) 상인의 진귀한 보배도
없고 남만인(南蠻人)의 귀한 재화도 없어서 감히 우리 토산물로 당 황제의 관청을 더럽히고 노
둔한 말로 황제의 마구간을 더럽히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요동에서 흰 돼지를 바친 일과
같고, 초나라의 닭과 비슷하니 참으로 부끄럽고 떨리며 진땀이 흐를 뿐이다'
724년 봄, 왕자 승경을 태자로 삼고 죄수를 사면했다. 웅천주에서 상서로운 식물을 바쳤다. 2월
에 김무훈(金武勳)을 당에 보내 조공을 했는데, 당 현종이 기뻐하며 온갖 비단 2,000필을 답례
로 보냈다. 12월에는 소덕왕후(炤德王后)가 죽었다. (이후 왕은 왕후도 없이 혼자서 지냄)
725년 정월, 일곱 색깔 무지개도 아닌 흰 무지개가 나타났다. 늦봄인 3월에 난데없이 눈이 내렸
고,
4월에 우박이 떨어졌다. 이에 중시 선종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이찬 윤충(允忠)을 중시로
삼았다. 10월에는 지진이 발생했다.
727년 정월, 죄인을 사면했으며, 4월에 일길찬(一吉粲) 위원(魏元)을 대아찬으로 삼고 급찬 대
양(大讓)을 사찬으로 삼았다. 12월에 영창궁(永昌宮)을 수리했으며, 상대등 배부가 늙어 물러나
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궤장(机杖)을 하사했다.
728년 7월, 왕의 아우인 김사종(金嗣宗)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신라 귀족들의 자제를 당나
라 국학(國學)에 입학시켜줄 것을 청하니, 당 현종이 이를 허락하면서 김사종에게 과의(果毅)의
관작을 주어 당나라에서 숙위(宿衛)케 했다. 상대등 배부가 다시 물러나기를 청하자 이를 허락
하고 이찬 사공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730년 2월, 왕족 김지만(金志滿)을 당나라에 보내 작은 말 5필, 개 1마리, 금 2,000냥, 머리카
락 80냥, 바다표범 가죽 10장을 조공했다. 이에 당현종이 김지만에게 태복경(太僕卿)의
관작을
주고 명주 100필, 자줏빛 두루마기, 비단 띠를 주며 숙위하게 하였다.
731년 2월, 김지량(金志良)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당현종이 채색비단 500필, 무늬없는 비
단 2,500필을 답례로 보냈다. 4월에 죄수를 사면하고 노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다. 또한 왜
국이 수군 300척을 보내 동해바다를 공격하자 왕이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9월에는 백관들을 적문(的門)에 모이게 하여 수레에 달린 쇠뇌를 테스트했다. 신라는 활과 쇠뇌
를 잘만들었는데, 아마도 새로운 형태의 쇠뇌를 개발한 모양이다.
732년 12월, 각간 사공과 이찬 정종(貞宗), 윤충, 사인(思仁)을 각각 장군으로 삼았다.
733년 7월, 발해(渤海) 2대 군주인 무왕(武王)은 당나라를 위협하고자 장문휴(張文休)를 장군으
로 삼아 바다를 건너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등주(登州)를 공격했다. 발해군은 등주를 쑥대밭으
로 만들고 등주자사 위준을 죽였는데, 이에 뚜껑이 뒤집힌 당 현종은 급히 군사를 보냈으나 발
해군은
그들이 오기 전에 유유히 바다를 건너 회군했다.
발해에게 완전히 농락당한 당 현종은 당나라에 머물던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
을 급히 신라로 보내 발해의 남쪽을 치도록 요구했다. 그래서 왕은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金
允中)을 대장으로 삼아 발해를 공격했으나 때마침 큰 눈이 한 길이 넘게 내려 산길이 막히고 강
추위로 죽는 병사가 속출하여 별다른 소득도 없이 철수했다. 아마도 함경남도 개마고원(蓋馬高
原)까지 진군했다가 후퇴한 듯 싶다.
12월에 왕이 조카 김지렴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을 했다. 이에 앞서 당현종이 흰 앵무새 암수 1
쌍과 자주색 비단에 수를 놓은 두루마기와 금은으로 세공한 그릇, 상서로운 무늬의 비단, 오색
으로 물들인 비단 300여 단을 보내주었는데, 그 답례로 당 현종을 격하게 찬양하고 아부하는 내
용의 국서를 보낸 것이다. 그 국서를 받은 현종은 기분이 좋아 김지렴을 내전에서 대접하고 비
단을 내렸다.
734년 정월,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려 자신에게 볼일이 있는 경우 직접 대궐 북문으로 들어와 진
언하도록 했다.
735년 정월, 형혹(熒惑, 화성)이 달을 범하였다. 김의충(金義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을 했는
데, 당현종은 앞서 신라가 발해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의 땅으로 인정했다. 허나 신라는 이미 패강과 원산 지역까지 점유하고 있던 상태였고, 그
이북은 발해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당나라가 패강 이남의 땅을 신라 땅으로 공식 인정하자(삼국사기에는 땅을 주었다고 나
옴) 왕은 무한 감동을 받으며 736년 6월 당 현종에게 국서를 보내 뼈가 부서지고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할 길이 없다며 심히 역겨운 아부를 떨었다.
736년 11월, 왕의 종제(從弟)인 대아찬 김상(金相)을 당나라에 보냈는데, 가는 도중에 죽었다.
이에 당 현종이 매우 슬퍼하여 그에게 위위경(衛尉卿)의 관작을 추증하였다.
이찬 윤충과 사인
영술(英述)을 북쪽 변경으로 보내 평양(平壤)과 우두(牛頭州, 강원도 춘천)의
지형를 조사하게
했으며, 난데없이 개가 궁성 누각에 올라가 3일간을 짖었다.
737년 2월, 사찬 김포질(金抱質)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을 했으며, 바로 그달 왕은 붕어했다. 이
에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성덕왕 시절은 정치/경제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던 시기였다. 그는 적극적
인 위민정책(爲民政策)으로 백성을 보살폈으며, 자주 순행을 나가 민생을 살피고 어려운 백성들
에게 곡식과 생필품을 하사했다. 또한 죄인에 대한 사면령도 수시로 단행을 했는데, 신라의 역
대 제왕 가운데 가장 많았다. 그리고 백성들이 마음껏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당나라의 균전제(
均田制)를 본받아 정전제를 실시해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이를 통해 신라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루던 시기로 널리 칭송받고 있다.
성덕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회의의 대표인 상대등의 영향력을 줄여 상징적인 존재로 축소시
키고 대신 집사부(執事部)의 중시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중시는 일체의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됨
에
따라 편의에 따라 교체가 가능하여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유교를 장려하고자 당나라에서 가져온 공자와 10대 제자상 등을 국학에 봉안했고, 721년에
내성 기구 속에 소내학생(所內學生)을 두어 장차 문한계통에서 일할 인재들을 양성했다. 그리고
불교에도 크게 관심을 두어 '전광대왕(典光大王)'이란 불교식 왕명까지 지녔으며, 무열왕을 기
리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봉덕사(奉德寺) 등의 성전사원(成典寺院)을 건립했다.
또한
문무왕 이후, 많이 소홀해진 당나라에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펼쳐 35년의 재위기간 동안 무
려 46회나 사신을 보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와 백제의 속방이자 별채였던 왜국
등 주변 나라와도 사이가 좋지 못해 부득이 당과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는데, 당 역시 무섭게
팽창하는 발해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신라가 필요해 두 나라는 다시 호감적인 사이가 되었다.
당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유학생을 파견해 당나라 국학에서 공부하게 했고, 당의 선진문물과 정
책을 적극적으로 수입했던 것이다. 허나 지나치면 모자른 것만 못하다고 그의 친당정책은 너무
아부적인 감이 커 당에 과하게 조공을 하는 풍조가 심해지고 심지어 왕실 여인을 당 현종에게
진상하려고까지 했다. 그것이 바로 당시 천하에서 가장 작은 나라, 신라의 어쩔 수 없는 한계점
이었다.
발해는 당나라의 요구에 따라 733년 발해 남쪽을 공격한 것 외에는 딱히 없으며, 왜국과는 서로
사신을 보내는 등의 교류가 있었으나 왜국 입장에서는 그들의 모국(母國)인 백제를 멸망시킨
원
수다보니 그렇게 시원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왜는 731년 수군 300척으로 신라 동해바다를
공격했으나 크게 깨졌고, 이에 자신만만해진 신라가 735년 왜로 사신을 보내
'신라는 어제의
신라가 아니다. 이름도 왕성국(王城國)으로
고쳤다'며 왜를 위협하니 왜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하여 737년 2월에는 신라를 공격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상황이 좋지 못
해 실현되진 못했다. |
※ 경주 성덕왕릉, 효소왕릉 찾아가기 (2014년 12월 기준)
① 경주까지
* 서울역, 광명역, 천안아산역, 오송역, 대전역, 부산역에서 경부선 고속전철을 타고 신경주역
하차
* 서울 청량리역, 원주역, 제천역, 강릉역, 철암역, 영주역, 동대구역, 포항역, 부전역, 태화강
역에서 경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경주행 고속버스
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부천, 수원, 안산, 성남, 하남, 춘천, 강릉, 천안, 대전(복합), 전주, 광주, 구
미, 대구(서부, 북부, 동부, 동대구), 울산, 부산, 창원(마산), 진주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
스 이용
② 현지교통
*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 경주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 건너편(경주우체국 앞)에서 11, 600
번 계열 시내/좌석버스를 타고 한국광고영상박물관 하차, 길 건너편(박물관 방면)으로 건너가
서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효소/성덕왕릉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 신경주역에서 갈 경우에는 경주시내로 나가는 50, 51, 60, 61, 70, 203, 700번 시내버스를 타
고 시외터미널 건너편이나 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 경주우체국 앞에서 11, 600번 계열 시
내버스로 환승한다.
③ 승용차
* 경부고속도로 → 경주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배반4거리에서 우회전 → 한국광고영상박물관
앞 교차로에서 박물관 주차장으로 좌회전 (주차는 영상박물관이나 주변 공터 이용)
* 성덕왕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 산8 |
첫댓글 역사를 알고 양파 껍질을 벗기듯 하나씩 의미를 되새기며
유적지를 방문하면 재미는 두배가 되지요^^
오늘도 많은 공부를 하고 갑니다~~
그렇지요. 그게 알고 가는거랑 모르고 가는거에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신라의 유구한 역사가 살아있는 경주 나들이 길 거사님 덕분에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렇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