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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첫사랑 하는 남자
“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 처음에 약속하신 것과 다르군요.”
고개를 깊이 숙이며 사과하는 남자의 말을 수혁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끊어냈다. 남자는 급기야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는 이마를 한 번 훔쳐냈다. 남자는 이 고액의 의뢰를 놓치기 싫다는 듯 다시 한 번 수혁의 인정에 기대어보려 입술을 열었지만 보기 좋게 수혁의 다음 말에 가로막혔다. 수혁의 표정에선 조금의 관용도 찾아볼 수 없었다.
“ 여기, 사례금입니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수고하신 것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고, 정확히 말하면 이 일에 대해선 철저히 함구해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 아, 아이고 입단속이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사장님 부탁하신 거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했는데 제가 이걸 받아도 될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봉투에 손을 뻗었다. 수혁이 알게 모르게 조소했다. 남자는 지금 당장 봉투를 열어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손가락으로 두께를 가늠해보았다. 얇다. 남자가 입가에 걸리는 웃음을 꾸역꾸역 삼켰다. 그는 두꺼운 봉투보다 이렇게 얇은 봉투가 더 많은 금액을 담고 있는 것이 보통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의뢰를 제대로 해내지도 못했는데 이 정도라니… 남자는 아쉬운 마음이 더해 우물쭈물 거리며 말을 꺼냈다.
“ 제가 다른 생각이 있어 하는 말이 아니라 시간을 좀 더 주시면 정말….”
“ 됐습니다.”
남자의 말을 무 자르듯 뎅강 잘라먹는 수혁은 인터폰 위의 수많은 버튼들 중 하나를 눌렀다.
“ 채비서, 손님 배웅해드려.”
그렇게 남자를 쫓아내듯이 보내고 넓은 사무실에 언제나처럼 홀로 남은 수혁은 세게 쥔 주먹을 소파 팔걸이 위로 힘껏 내리쳤다. 뭐 하나 자신의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 몇 번이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며 시간을 끌던 흥신소에서는 결국 시우를 찾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마치 일부러 꼭꼭 숨은 것처럼 도무지 소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미진 달동네 이후로 새로 접수된 전입신고도 없고 시우의 명의로 개통된 핸드폰조차 지금은 없어 위치추적도 불가능한 상태라고 했다. 아무래도 서울을 뜬 것 같으니 앞으론 지방 쪽으로 눈을 돌려보겠다는 남자를 수혁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었다. 사례금을 높이려는 수작인가 싶기도 했다.
포기해야 하나. 그래. 그가 평소처럼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면 아마 진즉 포기했을 일이다. 그가 이십팔 년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집착했던 상대는 피아노와 일, 그리고 민시우. 딱 세 가지였다.
이사 가긴, 아주 쫓겨났지.
중년 여성의 말이 다시 떠오르고, 수혁은 그래서 시우를 찾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시우는 정말 일부러 꼭꼭 숨었을지도 모른다. 그 조차도 찾지 못하게 흔적도 없이.
이건 9년 전의 상황이랑 얘기가 달랐다. 그 땐 그가 그녀를 떠났었다. 보상받지 못하는 사랑에 지치고 힘들어서, 오기 반 체념 반의 마음으로 시우를 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벗어나려 발버둥 쳤었다는 말이 옳다. 그러나 지금 이 불안하고 초조한 상태가 말해주듯이 그는 아직도 민시우에게서 벗어나질 못했다. 제대로 끝을 맺지 못해서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이 없었으니 당연히 거절도 없었다.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매듭을 짓지 못한 감정이 그 자신도 모르게 9년을 자라온 모양이다.
그래서 수혁은 이번만큼은 확실히 결론을 내고 싶었다. 시우와의 행복한 미래 같은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니 거절을 받더라도 부딪쳐보자 하는 심산이었다. 9년 전처럼 흐지부지하게 도망쳤다간 이 감정이 앞으로 또 몇 해를 갈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 틀렸다. 사람을 시켜 도원의 유골함을 안치한 납골당에 일주일 밤낮을 지키게도 해 보고 시우뿐만 아니라 지원의 거처를 알아보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보기도 했다. 결과는 모든 게 다 헛수고라는 것이다. 수혁은 한숨을 길게 내 쉬며 탁상달력을 쳐다보았다. 12월 24일. 쓸데없이 사내가 떠들썩하다 했더니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러나 수혁에겐 오늘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도원이 죽은 지 한 달, 고로 9년 만에 시우와 재회한지 한 달이 지난날이다. 과연 그걸 재회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아마 어디서 울고 있겠지. 수혁은 침잠하는 배처럼 우울한 생각들을 벗어던질 수가 없었다. 울고 있을 시우의 곁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아니 머저리같이 기회가 있었음에도 두려움에 놓쳐버렸다는 것이 그의 마음에 격랑을 일으켰다. 그렇게 끝없이 시우에게로 뻗어가는 생각의 고리를 끊어내려는 듯 짧은 노크소리와 함께 미란이 들어왔다. 고개를 가볍게 숙여 예를 차린 그녀가 공손한 어투로 입술을 열었다.
“ 사장님, 아래 차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슨 스케줄이 있던가 뒤늦게 떠올렸다. 세영미디어 7주년 기념행사. 그걸 잊을 뻔 하다니.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 나가겠다는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문이 조심스레 닫히는 소리가 났다. 수혁은 소파에서 일어나 코트를 걸치며 생각했다. 시우를 다시 만난 이후 또 이 뇌란 놈이 제 할 일을 망각하기 시작했다고.
수혁이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춰 하나같이 함박눈을 펑펑 쏟아내는 하늘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더니. 로맨틱해. 애인으로 보이는 남자의 허리를 꽉 껴안은 여자가 중얼거렸다. 로맨틱? 여자의 말을 되새김질한 수혁은 차에 올라타며 조소를 흘렸다.
점점 굵게 변하는 눈송이 때문에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했다. 도로 구석은 벌써 진회색으로 변해버린 눈들이 지저분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고 차들은 녹은 눈이 빙판이 될까 걱정스러운지 거북이보다도 못한 속도로 운전을 하고 있었다. 수혁은 이 모든 상황을 인색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생각했다. 로맨틱은 무슨 얼어 죽을 로맨틱. 그가 보기에 눈은 거추장스럽기만 했고 거리를 수놓은 색색의 불빛과 크리스마스 장식은 정신없기만 했다. 딸랑딸랑 울리는 구세군의 종소리도, 크게 울려 퍼지는 캐럴도 그가 듣기엔 그저 소음이었다.
“ … 잠깐.”
그렇게 수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에 든 보고서로 다시 집중하려는 찰나였다. 작게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에 운전기사는 백미러를 통해 수혁을 살폈다.
“ 차 세워.”
“ 예??”
“ 차 세우라고, 당장!”
수혁이 버럭 고성을 내지르는 바람에 당황한 운전기사가 서둘러 바깥 쪽 차선에 차를 세웠다. 여기저기서 경적소리가 난무했고 하마터면 서로 부딪힐 뻔 한 운전자들이 창문을 내리고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내뱉었다. 수혁은 마치 귀머거리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서둘러 차에서 내려섰다. 그의 구두 끝에 기름때로 범벅이 된 진회색 눈이 묻었다. 그러나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아니 그의 의식은 오로지 한 곳에 쏠려 있었다. 차도 위에서 머뭇거리던 수혁의 발걸음에 이내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는 빛을 향해 나아가는 나방처럼 흔들림 없이 누군가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 크리스마스를 맞아 저희 Noel레스토랑 매장을 찾아주시는 연인 분들께는요, 무료로 달콤한 와인을 선물해드리는 특별한 행사를 진행… 아!”
시우의 놀란 눈이 수혁을 향했다. 갑작스레 팔을 잡아 돌려세운 수혁 탓에 시우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손에서 마이크를 떨어뜨렸다. 영문을 모른 채 커진 눈동자는 수혁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서는 마치 헛것을 본 사람의 것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 … 민시우.”
찾았다, 민시우. 수혁은 조심스레 시우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 속에서 불이 일어난 듯 뜨거운 뭔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둑이 터진 것 같았다. 내내 수혁을 가로막던, 혹은 수혁 스스로가 가로막고 있던 어떤 것이 한꺼번에 밖으로 쏟아져 넘칠 듯 출렁이고 있었다. 낯선 이 감정을 정확히 어떤 단어로 정의해야할지 수혁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가슴이 터질 듯 벅차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말라버린 얼굴을 보면 머릿속이 하얘질 만큼 화가 나다가도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 수혁은 그 찰나의 순간에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는 스스로 당황스러워 얼굴을 굳혔다. 아마 시우가 내내 그렇게 그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더라면 수혁은 야윈 팔을 잡은 손에 힘을 푸는 것조차 잊었을 것이다.
“ 아파.”
반가워하진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불쾌한 듯 말하자 수혁은 허탈감이 밀려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수혁이 손을 털어내자 시우는 잠깐 그의 얼굴을 살피고는 이내 허리를 굽혀 떨어뜨린 마이크를 다시 쥐었다. 수혁의 시선은 그런 시우에게 자석처럼 따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럼에도 시우는 그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옆에서 호기심으로 얼굴을 붉힌 연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미안, 창현씨 좀 불러줄래? 떨어뜨리면서 뭐가 잘못됐나봐.”
시우가 마이크의 버튼을 만지작거리며 동그란 부분을 손가락으로 탕탕 두드려보고는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끄덕인 연주가 수혁을 위아래로 살피며 이내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도 여전히 마이크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시우를 향해 수혁이 ‘하.’ 하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차가운 공기 속으로 그의 입김이 유난히 하얗게 흩어졌다.
“ 여기서 뭐해.”
수혁의 말에 시우가 투명하리만큼 옅은 갈색 눈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그런 걸 네가 왜 물어. 그 눈이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 그의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수혁이 입술을 열지 않자 시우는 쪼그려 앉아 옆에 높이 쌓아놓은 전단지 위에 쌓이는 눈을 장갑을 낀 손으로 쓸어냈다. 수혁의 코트 역시 어느새 조금씩 젖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신발 끝에 더러운 눈이 묻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조금도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 여기서 뭐하냐고 묻잖아, 민시우.”
어느새 그의 목소리는 짜증스럽게 변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두껍게 껴입고 다녀도 추운 날씨에 시우는 엉덩이를 겨우 가리는 짧은 치마와 얇게만 느껴지는 타이트한 패딩 점퍼만을 외투로 입고 있었다. 추위에 빨갛게 얼은 코끝을 보자 수혁은 우선 화부터 났다. 그 날카로운 음성을 느꼈는지, 시우는 전단지 몇 장을 품에 안은 채 일어나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 그걸 네가 왜 물어.”
“ 뭐?”
“ 네가 그게 왜 궁금한데. 내가 여기서 뭘 하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 위수혁.”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우는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수혁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에게 손에 든 전단지를 일일이 나눠주었다. 자신을 대할 때와는 다른 사근사근한 미소와 다정한 목소리에 수혁은 심장이 날카로운 흉기로 베이는 듯 쓰라려 견딜 수가 없었다.
“ 아, 창현씨. 이거 내가 떨어뜨렸는데 소리가 안 나서….”
“ 잠깐만요. 우선 다른 걸로 교체하고 나중에 손보는 게 났겠어요.”
연주와 함께 가게에서 나온 창현은 마이크를 잠깐 살피더니 진행용품을 둔 승합차 쪽으로 달려갔다. 연주는 전단지를 나누어주는 데 열중인 시우의 곁에 은근히 다가가선 그녀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 언니, 누구에요?”
남자친구일리는 없고. 연주는 뒷말을 삼키며 장승처럼 버티고 선 수혁을 흘끔거리며 시우의 대답을 재촉했다. 시우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다가 잠시 숨이 찬 듯 심호흡을 했다.
“ 그냥, 아는 사람이야. 신경 쓰지 마. 아, 음악 좀 다른 걸로 바꾸자.”
딱히 친구라고 하기에도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아 대충 얼버무린 시우가 연주의 관심을 다른 데로 환기시키려는 듯 쓸데없이 덧붙였다. 그런 시우의 뒤에서 수혁은 기가 막힌 듯 시린 웃음소리를 뱉었다. 그냥 아는 사람? 머릿속이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 얘기 좀 해.”
“ … ….”
“ 얘기 좀 하자고.”
커다란 스피커에 연결된 mp3를 들여다보고 있던 시우에게 다가간 수혁이 끈기 있게 말을 붙였다. 시우는 그저 들은 척 만 척 이었다. 연주만 그 사이에서 안절부절 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수혁은 시우가 쓰고 있는 빨간 산타클로스 모자 위에 쌓이는 눈을 노려보다시피 했다. 이 추운 날씨에 아직 몸도 다 회복되지 못했을 시우가 이러고 있는 것이 그로써는 도무지 이해 불가능이었다. 계속 무시당하는 것에 대해 참을 인자를 여러 번 새기던 수혁은 점점 더 사나워지는 눈발에 참지 못하고 시우의 팔을 잡아 제게로 돌렸다.
“ 얘기 좀 하자니까!”
그의 언성이 높아졌음에도 그녀는 피곤하다는 듯 그 손을 털어내고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 일하고 있잖아.”
핑계를 대시겠다. 수혁은 날카로운 시선을 연주쪽으로 돌렸다.
“ 이 여자랑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 네? 아, 예에…. 그, 그렇게 하세요.”
수혁은 보란 듯이 거만하게 시우를 내려다보았다. 시우는 연주를 잠깐 쳐다보았다가 다시 수혁의 눈을 응시했다. 제게로 느릿하게 옮겨지는 시선에 수혁은 가슴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시우의 이 부드러운 감색 눈동자는 훔치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예나 지금이나 그의 혼을 마음껏 주무르는 능력이 있었다.
“ 너랑 나 사이에 딱히 할 얘기가 있어? 전에도 우린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 도대체 지금 무슨 얘길 하자는 건데.”
그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는 눈동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싸늘한 음성이 수혁을 얼어붙게 했다.
“ 그만 가줘. 일 하는데 방해 돼.”
시우는 조금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수혁이 하고 싶은 말에 대해선 궁금하지도 듣고 싶지도 않단 냉랭한 태도였다. 그 사이 마이크는 새 걸로 교체되었고 시우의 빨간 장갑이 그 것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추위로 보랏빛이 되어버린 입술을 열고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것인 듯 발랄해진 목소리에 수혁은 문득 두통을 느꼈다.
“ 사장님!”
그 때, 내내 이 광경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수혁의 운전기사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서둘러 그에게로 달려왔다. 수혁이 신경질적으로 그를 응시했지만 운전기사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야겠다 싶었는지 우물쭈물 거리면서도 결국 입술을 열었다.
“ 이러다 늦으십니다. 평소보다 차도 막히는데….”
수혁이 성의 없이 고개를 까딱이자 그는 혹시라도 차가 견인될까 무서운지 이번엔 차도 위에 세워놓은 차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수혁이 시우를 쳐다보았다. 시우는 어느새 말을 멈추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가. 빨리 가. 그만 귀찮게 해. 그 눈이 그렇게 수혁을 떠밀고 있었다. 그 거부의 시선을 수혁은 더 감당하고 있기가 힘에 부쳤다. 더 버티고 있다간 심장이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
수혁은 시우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비정상적일 정도로 쾌활한 목소리가 다시 그 ‘로맨틱’한 거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 크리스마스에 저희 매장을 찾아주시는 모든 고객님들께는요― 산타와 함께하는 특별한 사진 촬영의 기회까지 준비되어 있구요. 아이들에겐 귀여운 루돌프 인형을 선물로….”
시우의 말이 뚝 끊겼다. 그녀는 어깨에 갑작스레 느껴지는 이질적인 온기에 고개를 내렸다. 그녀를 폭 감싸고도 남음직한 커다란 검은 코트가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져 있었다. 수혁의 것이었다.
“ … 뭐야?”
“ 입고 해. 춥다.”
하아. 시우는 입매에 힘을 주곤 코트를 끌어내려 다시 수혁에게 건넸다. 그러나 코트를 받아든 수혁은 고집스레 다시 시우의 몸을 코트로 감쌌다. 시우는 연신 한숨을 쉬었다.
“ 됐어. 안 추워. 필요 없어.”
“ 아니, 너 추워. 얼어 죽으려고 작정한 거 아니면 고집부리지 말고 입어.”
“ 네가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자꾸 이러는 거 정말 일에 방해 돼. 가져가.”
시우는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하얀 뺨이 핏줄이 다 드러날 만큼 부르텄으면서도 끝까지 필요 없단다. 수혁은 으득 이를 갈았다. 그는 부디 제 표정이 여유로워 보이길 기도했다. 시우의 대답 하나하나에 휘둘리고 있다는 걸 들키기 싫었다.
“ 그럼 버려.”
“ 뭐?”
“ 알잖아. 나 다른 사람 손 탄 거 싫어하는 거.”
시우가 기가 막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수혁의 가슴은 어느새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 진짜 버려?”
시우가 도전적으로 수혁의 말을 받아쳤다. 수혁은 꽉 쥔 주먹을 주머니 속으로 감추며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묘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싸늘하게 웃었다. 그리곤 미련 없이 코트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수혁의 코트는 눈이 녹아 사람들의 발자국이 깊이 남은 거리 위에 툭- 하고 떨어졌다.
“ 너 꼭….”
이렇게 까지 해야겠어? 수혁은 그렇게 말하려다 겨우 뒷말을 삼켰다. 차짓하면 싸움이 될 것 같았다. 시우와 싸우기는 싫었다. 지금 수혁은 이러나저러나 약자인 셈이다. 그는 되도록 시우를 웃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싶었다. 이런 마음이 생기는 건 처음이라 그는 어떻게 다가가야할지 몰랐고 그만큼 서툴렀다. 수혁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저질렀다. 바닥에 떨어진 코트를 줍는 것이었다. 그는 잠깐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제 손으로 직접 먼지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 눈앞이 어지러운 극도의 혼란이 찾아와 수혁은 아무도 모르게 입 벽을 세게 깨물었다. 어쨌든 이러한 수고를 해서라도 수혁은 시우에게 이 코트를 꼭 줘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 그럼 쉬는 시간에라도 잠깐 덮고 있어. 춥잖아.”
“ 쉴 땐 차 안에 들어가서 쉬니까 괜찮….”
“ 부탁이다, 좀. 어?”
수혁이 사정하는 투로 얘기하자 시우는 곤란하단 표정이 되었다. 수혁은 그녀가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단 눈치였다. 아마 옷을 다시 주려면 자신을 만나야 하는 게 싫겠지. 수혁의 짐작을 확인이라도 시키려는 것처럼 시우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 이거 다시 돌려줘야….”
“ 아니, 그럴 필요 없으니까 부담 갖지 마. 오늘 쓰고 나면 정말 버려도 되고. 설마 내가 이걸 다시 입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시우는 수혁이 농담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제 손을 떠나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간 물건은 다시 손대는 법이 없었다. 학창시절부터, 하여튼 유난이었다. 시우는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으니까, 이만 가.”
그게 수혁에겐 ‘ 알았으니까, 먹고 떨어져.’ 라는 말로 들렸다. 이만 물러나야겠지. 수혁은 안타까운 마음을 접고 어색하게 싱긋 웃어 보인 후 발걸음을 뗐다. 차 가까이까지 걸어간 수혁이 다 떨어진 전단지를 챙기기 위해 부산히 몸을 움직이는 시우를 쳐다보았다. 수혁이 만족스럽게 씨익 웃었다.
또 보자, 민시우.
그렇게 수혁이 멀어지고 나서야, 시우는 그가 사라진 도로 위로 시선을 주었다. 뭘까. 어디서, 왜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을 어지럽게 하는 걸까. 시우는 잠깐 생각하다 작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깊게 생각할 필요 없는 사람이다. 그냥 우연히 보곤 어울리지 않게 적선할 기분이 든 모양이지.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금방이라도 떨어져나갈 것 같은 코를 훌쩍거리며 거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음악에 맞춰 연주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 으, 추워. 언니! 쉬는 시간이에요!”
30분 쯤 지났을까, 연주가 신나서 소리쳤다. 시우는 총총걸음으로 앞서는 연주와 차 안에 들어가 히터를 최대로 틀었다. 그러나 내내 추위에 내몰렸던 언 몸은 쉽게 녹지 않았다. 시우는 떨떠름한 얼굴로 수혁이 두고 간 코트를 입었다. 그녀가 입기엔 턱없이 컸지만 코트는 최고급재질을 자랑하듯 금세 그녀의 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그녀는 몸을 쭉 늘어뜨리곤 습관적으로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 … 어?”
시우가 손에 잡히는 단단한 물건을 주머니에서 꺼내들었다. 연주가 보고는 옆에서 끼어들었다.
“ 어? 핸드폰이네요? 와! 이거 인터넷 기사에서 봤었는데, 이 부분이 진짜 금이래요. 사람들이 돈지랄 폰이라고 난리던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
연주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고 이리저리 뒤집는 걸 보고 시우는 머리가 빙글 도는 것을 느꼈다. 시우는 수혁을 다시 봐야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가 일부러 코트 속에 핸드폰을 넣어놨을지도 모른다는 꼭 해야 할 의심까지는 하지 못했다. 아마 알았다면 경악하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다.
여러분이 기대하신 달달한(?) 만남은 아니죠?ㅎㅎ
우선은 시우에게 상처가 아물 시간이 필요하답니다.
그래도 오래 걸리진 않을 거에요^_^ 수혁이가 설마하니 그렇게 놔두겠어요?ㅎㅎ
저번편에 댓글과 추천으로 응원해주신 고운 독자님들 애정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녹턴(Nocturne) http://cafe.daum.net/-fam-
묘아리 바니코코 필은 demisoda 기찻길동무 유사성 달콤한민트 모로미 샐리어 백민정 미스망고
업쪽은 '첫사랑'/ 업쪽문구만 있을 시 쪽지 안 가요
첫댓글 첫사랑. 달달한 만남은 아니지만 시우에게 꼼짝못하는 수혁의 모습이 참 짠하면서 귀여운것이. 수혁이 얼마나 시우를 생각하는지 얼른 시우가 알아줘야하는데 말이죠.ㅎㅎ재미나게 읽고 갑니다^^
첫사랑 달달하진않지만 앞으로는달달하겠죠
ㅋㅋㅋㅋ추천!!ㅋㅋ 그렇죠 치료할 시간이 필요하죠...ㅋㅋ 수혁의 앙큼한 짓 !!ㅋㅋㅋㅋ시우를 정말 좋아라 하네요~ㅋㅋㅋ우후후~ㅋㅋㅋ
오오오+_+~~ 두 사람이 드디어 만났어ㅜ0ㅜ 이 얼마나 기쁜 일이란 말이가!! 뙇!! 흥신소 사람이 밝혀내서 만나는 것보담 저렇게 우연히 만나는게 더 좋아ㅋㅋㅋ 시우가 냉정하지만, 시우 입장에서 수혁이는 친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별로 마음에도 들어하지 않았던 동창이니까 충분히 이해는 간다ㅜ0ㅜ 천대받는 수혁이는 안타깝지만, 유행은 지났지만 '나는 당신한테 무시받고, 그래도 될 사람이 아니야!' 하는 대사가 떠오르는건 왜일까?ㅋㅋ 하지만 시우니까 수혁이는 이해하겠징?ㅋㅋㅋ 저 귀하디 귀한 핸드폰은 아주 큰일을 했어ㅋㅋ 수혁이의 농간이지만 그래도 어찌되었든ㅋㅋ 얼른 시우의 상처가 아물었으면 좋겠다ㅜㅜ수혁이도 화이팅!
첫사랑 담편기대요!!
수혁이 좋아요 ㅋㅋ
재밌어요 ㅋㅋ
첫사랑 대박이군용
역시, 수혁은 시우에게 약했군요. 저. 저런 모습 너무 좋아요ㅠㅠ 만나서 다행이네요. 제발 농간에 넘어가서 좋은 일들이 마구마구 들이닥치길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