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이날 전 주말에 시골 엄마네 집에 갔다가 떡방앗간에 갔다. 전날 주문해 둔 쑥떡을 찾아 돌아오려다, 마침맞게 장날이라 방앗간 건너 오일장터에 들어갔다. 우산을 쓰기도 쓰지 않기도 어설플 만큼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요즘 재래시장에는 큰 지붕이 있어 우산을 접을 수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면 5분이 뭐야, 3분 만에 통과할 수 있는 장이지만, 날씨 탓에 할 일 없는 우리는 평소보다 적게 나온 매대 사이를 한갓지게 슬슬 걸었다. 엄마는 비싼 햇감자를 한 봉지 사고, 땅콩 모종을 샀다. 할머니 제사상에 올릴 참외를 사고, 한길 가 빵집에서 파프리카와 양배추가 든 시그니처 버거를 샀다. 여름이 장터 구석에 놀러 나온 순한 강아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할 때, 무심결에 두리번대던 나는 건어물 상점에 눈길이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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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들
시퍼런 천막 아래 오징어와 쥐포, 미역과 다시마와 멸치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건어물 매대 뒤쪽 낡은 양옥 벽과 이어진 자리에 할아버지 대여섯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어둑신한 자리에서 마른오징어 안주로 아침부터 소주 한 잔을 기울이는 어르신들은 말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도란도란 보다 조용한 목소리로 띄엄띄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며 자세히 보니, 할아버지들의 손에 바나나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한 손에는 소주잔, 한 손에는 바나나를 든 모습이 어찌나 귀여우신지.
비둘기색 중절모를 쓰고 모래색 점퍼를 입은 할아버지의 실루엣이 돌아가신 지 30년 다 된 내 할아버지와 똑 닮았다. 집에 있을 때면 늘 상방에서 따로 밥상을 받고, 솔 담배를 태우거나 시조를 읊던 점잖고 잘생긴 나의 할아버지는 저녁 버스를 타고 돌아올 때마다 껌이나 사탕을 사서 손주들에게 나눠주기는 자상한 어른이기도 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장터에서 소주를 마시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제사 때에는 갓을 쓰고 매일 아침 중절모에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버스를 타고 경로당으로 향하던 할아버지는 밭일을 전혀 하지 않아서일까? 동네 어른들 중 그만큼 피부가 흰 남자는 없었다. 때로 향교에서 여는 무슨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기도 한 할아버지는 늘 고상했다. 할아버지는 아주 가끔 건조기에서 꺼낸 고추를 다듬는 일, 가을에 마당에 선 대추나무 터는 일, 감 주워서 곶감 만들고 땡감 삭히는 소일거리 정도만 했다.
그러니 장남이 낳은 첫 자식이 여자아이라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울며 '아들이 태어나지 않아 어른이 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는 어이없는 그 시절 에피소드는 모르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집에서 그렇게 놀 거였으면, 손주들 서예나 한문이라도 좀 가르치지. 어쩜 그리 혼자만 재미나게 놀았을꼬? 겨울 방학 숙제로 서예가 나왔을 때 할아버지 도움으로 퀄리티를 높이려고 시도했으나, 한문만 잘 쓰고 한글은 반듯하게 쓰지 못하는 할아버지에게 실망한 기억이 있다. 할아버지 방에는 양옆으로 드르륵 나무문을 열어야 볼 수 있는 텔레비전이 있었다. 그 티브이로 미스코리아 대회를 볼 때 할아버지는 혀를 끌끌 찼는데, 그러면서도 채널을 돌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텔레비전으로 본 심청전 애니메이션의 화면이 아직도 생생하고, 커다란 카세트플레이어로 들은 인어공주 테이프의 목소리도 선명히 떠오른다. 뒤뜰이 보이는 상방 장지문을 열면 쌓여 있던 장작더미와 아빠가 나무 패던 그루터기까지 떠오르지만, 할아버지는 가물가물하다. 학교 가기 싫다고 생떼 부리며 우는 나를 보고 헛웃음을 지으며 “입에 걸레를 물려라.”라고 했던 멋대가리 없는 순간과 아들 며느리 등골 뽑아서 홍콩 여행 다녀오며 사 왔던 허접한 양산(접고 펼 때마다 손가락이 끼어서 아팠다)이 자꾸 떠오른다.
아직 시골집에 가면 할아버지가 홍콩 여행에서 찍은 사진이 박힌 동그란 기념 접시가 거실에 놓여있다. 황토색 점퍼를 입고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 여행에서 일행을 잃어버려 우왕좌왕하다가 그래도 한자를 잘 알아서 종이에 쓴 글로 길을 찾았다는 이야기는 온 가족에 자랑스러운 에피소드였다. 한문 수업을 지루해하지 않고 시험 성적도 좋았던 나는 한문학과에 가서 한시를 공부하고 싶기도 했었는데,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런 점에서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스스로 자랑스레 여기는 마음도 있었던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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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여든셋(둘인가?) 돌아가시기 하루 전까지도 혼자 화장실에 다녀올 정도로 평생 정정했다. 담배를 그렇게 자주 피우지 않았다면 백 세는 거뜬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할아버지는 내가 중2가 된 학기 초 4월에 돌아가셨다. 대구에서 우리와 살던 엄마가 급히 시골에 들어간 그날 저녁에 할아버지는 숨을 거두었다. 다음 날 아침 버스로 동생들과 시골에 가야 했는데, 그때 내게 중요한 문제는 회색 미니스커트였다. 친척 집에서 얻어온 회색 미니스커트가 퍽 마음에 들었는데, 장례식에 갈 때 꼭 입고 가고 싶은 거였다. 여동생에게 비둘기색 스타킹(요즘도 이런 이름으로 파는지 모르겠다)을 사 오라고 심부름까지 시켰는데, 할아버지와 각별하던 여동생에게 ‘지금 치마 따위가 중요하냐?’라는 일침을 들었다. 그 치마를 입고 갔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는 건 언제 돌아봐도 확신할 수 있는 마음이다.
5일 장으로 치른 장례식은 떠들썩한 잔치의 연속이었다. 마당에 걸린 국솥이 종일 끓었고, 손님들이 끝없이 찾아왔다. 마을 아주머니들과 엄마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아빠는 손님이 올 때마다 곡소리를 했지만, 그 누구도 크게 슬퍼 보이지 않았다. 고모들이 울었던가? 그것도 잘 기억나지 않고 사촌 여동생이 종일 ‘돼지머리 압축’ 고기(편육인 듯)를 찾았던 게 얄미웠다. 아이들끼리 온 동네를 쏘다니며 신나게 놀아서 여느 명절보다도 즐거웠던 장례식. 하관 후에 마지막으로 관을 열었더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하얀 삼베로 동여맨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고, 그제야 이별이 실감 나 눈물이 찔끔 났지만, 그 슬픔도 거기까지였다. 아주 오래 ‘어찌 이리 슬프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그리움보다 열 배는 깊었던 할아버지와의 이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