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수 저자에 대하여
1. 적천수 저자는 삼재의 원리를 달통했을 것이다
동양삼국의 역학계에서는 적천수 저자에 대하여 모든 역학자가 완전히 신빙하고 수긍할 만한 설이 아직까지는 없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경도와 유백온 양설이 있으나 유백온이 적천수의 저자일 것이라는 가설이 역학계에 정설처럼 굳어진 것이 현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본인은 적천수의 저자로 유백온보다는 경도를 더 인정하는 편에 속한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적천수는 본인이 그 제명에 대해서 논란한 바와 같이 천지인 삼재의 원리를 관통하지 않고서는 쓰기 어려운 책이며, 그렇다면 적천수의 저자도 또한 천지인 삼재의 원리에 달통했을 것임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2. 지혜를 갖춘 자만이 적천수를 쓸 수 있다
사람은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지혜를 갖추고 복덕도 갖추었으면 최상격일 것이고, 지혜는 부족하나 복덕을 갖춘 경우와 지혜는 갖추었으나 복덕이 부족한 경우는 순위를 정하기는 어려우나 그 다음 중격일 것이며, 지혜도 부족하고 복덕도 부족하면 마지막 하격일 것이다. 이는 불교의 용어를 빌려서 크게 네 가지로 표현한 것이며, 지혜와 복덕의 많고 적음에 따라 그 차등도 백천만 가지가 될 것이다. 이를 유교나 도교 기독교의 용어를 빌리면 달리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적천수를 쓸 수 있는 범주에 속하는 사람은 복덕과 상관없이 지혜를 갖춘 사람 중에 하나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식과 재능 경륜 등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서는 지혜 대신에 경륜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3. 유백온이 적천수를 썼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무릇 이 세상에 경륜을 갖추고 시대를 만나서 뜻을 펼친 사람은 지극히 적지만, 경륜을 갖추고서도 시대를 만나지 못해서 뜻을 펼치지 못한 사람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경륜이 있으면서도 시대를 타고나면 일세를 풍미할 수 있고 시대를 만나지 못하면 그저 역사에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상례이다.
유백온은 경륜이 있으면서 시대를 만난 사람에 상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제갈공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는 못될 것이다. 어떻든 유백온만큼 경륜을 갖추었지만 시대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그 당대라 할지라도 열명도 되고 백명도 될 만큼 많을 것이다. 더구나 다른 시대까지 합하면 유백온 생존 전후 2~3백년 사이에 얼마나 많은 기인이사가 출생하였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유백온보다 다른 기인이사가 적천수를 썼을 가능성도 또한 백배나 천배가 많을 것이다. 적천수를 유백온이 썼다는 명확한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유백온이 적천수의 저자일 것이라 추정하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 극에 이르렀다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아래 기록에 의거하여 결론으로 말하면 적천수의 저자가 경도라는 점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적천수의 저자로 경도를 배제하고 유백온을 내세울만한 확실한 증거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4. 가장 신빙할 수 있는 문헌은 소암노인의 적천수집요이다
적천수와 관련한 문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청초에 소암노인素菴老人 진지린陳之遴이 순치順治(1644~1661 재위 18년) 무술년(순치15년 서기1658년) 2월에 편찬한 적천수집요滴天髓輯要는 적천수와 관련한 최초의 문헌이고 적천수 저자에 대한 언급도 최초가 아닐까 한다. 그 서문에 “적천수란 책은 곧 어떤 지명자知命者가 저술한 것으로 성의백誠意伯 유기劉基에 가탁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지명자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강희康熙(1662~1722 재위 61년) 시대에 황우직黃虞稷이 천경당千頃堂에서 목각본木刻本으로 간행한 명리수지적천수命理須知滴天髓 표제表題에는 경도京圖가 저술하고 유기가 주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옹정雍正(1723~1735 재위 13년) 13년 곧 1735년에 편찬한 명사明史 예문지藝文志(그 시대 현존한 서적의 이름을 수록한 책)의 삼명기담적천수三命奇談滴天髓에는 원시原詩를 유기가 기록했다고 전한다. 이를 근거하여 적천수의 저자가 유기로 알려지기도 한 것이다.
1933년 원수산袁樹珊이 찬집한 적천수천미滴天髓闡微의 형원주인蘅園主人 손서孫序에 의하면 “적천수란 한권의 책은 경도가 저술하고 유성의劉誠意가 각주한 것으로 상전相傳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5. 적천수 저자는 경도가 아니면 지명자일 뿐이다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적천수는 경도가 저술하고 유백온이 주석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경도는 송말원초의 인물로 추정되며 이로써 원대 초기에 적천수를 저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37년 서락오徐樂吾가 저술한 적천수보주滴天髓補註 서문에서 “연보年譜에 보면 경도가 찬하고 유기가 주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글을 자세히 살펴보니 본문과 주석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다.”라고 하여 원문과 주석을 모두 유기가 저술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적천수를 주석하여 적천수천미滴天髓闡微라는 불후의 명저를 남긴 임철초任鐵樵는 그 사망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적천수 관살편에 기재된 그의 사주 곧 건륭 38년 4월 18일 진시(계사 무오 병오 임진)에 의거하여 1773년생임을 알 수 있을 뿐이고 그 이외의 기록은 전혀 없다. 혹자는 1846년에 적천수를 출간했다고 전한다.
6. 결론
이상을 종합하여 적천수의 저자를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자 한다.
1. 적천수의 저자는 청초 소암노인이 1658년 2월에 편찬한 적천수집요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어떤 지명자 곧 은자일 것이다. 지금은 결정적인 문헌이 나오지 않는 한 350여년 전 소암노인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증거가 없는 갑론을박은 모두 공허한 이론에 불과하다.
2. 강희(1662~1722 재위 61년) 시대에 황우직이 간행한 명리수지적천수에 의거하여 저자는 경도이고 유기가 주석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 이외의 여러 설들은 모두 믿을 것이 못된다.
3. 적천수 원주는 원문의 본의를 손상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서락오의 주장처럼 동일인의 작품으로 인정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임철초의 천미에서도 원주를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서락오의 보주에서도 원주를 배제하고 있다.
4. 만일 적천수의 저자가 경도가 아닌 지명자라면 지명자가 서거한 뒤 그의 제자가 원주를 쓰고 경도와 유백온에게 가탁했다고 판단된다.
5. 적천수를 유백온이 썼다면 유백온의 명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원주를 유백온이 썼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유백온의 명성을 모독하는 것이 될 것이다.
첫댓글 위 글은 2011. 1. 10. 작성한 글입니다.
적천수 저자에 대한 생각을 일단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런들 저런들.. 적천수의 뜻을 알고 펼치기에도 벅찬데..어쨋던 과거에 집착보다는 현실에 접목하여 틀을 다시잡지않아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육갑이 어디서 나왔던 그를안다고 명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적천수를 누가지엇는지 알아냈다고 명리를 알아지는 것이 아닌데//수고하셨습니다.
삘리리님의 말씀에도 일면 공감합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한가하다고 생각되는 글만 쓰고 있으니
바쁜 분상에는 따분한 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격이 본래 하나씩 정리해가며 매듭을 짓는 형이다 보니 이런 글도 썼습니다.
어차피 오래된 책들은 이본도 많고 저자가 불투명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글처럼 원류를 찾아가는 노력을 통해서 책의 내용을 좀더 심도있게 이해하는 발판이 되기도 하니 탐구해볼 주제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글 잘봤습니다.
책으로 공부하는 이가 어떤 사람의 책을 보는지를 아는 것은 좋은 내용을 남겨준 선학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아닐까요. 이런 과정이 있어야 시간이 지나며 나오는 오기나 오류도 바로 잡을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