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일 용서하오니 용서하시고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단둘이든 여럿이 가든 어떻게 해서든 그를 타일러 그가 돌아오게 하라’는 예수님 말씀에 베드로 사도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다.(마태 18,21) 함께 사는 건 축복이자 십자가다. 십자가는 구원의 표지이니 그 또한 축복이겠다. 그 대상이 없는 사랑과 용서는 없을 테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이는 언제나 그리고 끝까지 용서해야 한다는 뜻이다. 용서는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위다. 그래서 우리 하느님을 가장 닮은 인간의 행위라고 하겠다. 내가 사랑받음은 축복보다는 용서로써 더 깊이 느낀다. 예수님이 해 주신 비유에서 만 탈렌트 돈은 그 당시 가장 큰 액수다. 만은 가장 큰 숫자고, 탈렌트는 가장 큰 액수 단위다. 개인이 그렇게 큰 빚을 질 수 없지만, 내가 그동안 하느님께 받은 용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이 봐준 일들을 돈으로 환산하면 만 탈렌트가 될 거다.
동료를 용서하지 않은 그 종에게 주인은 말한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2-33) 하느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서로 용서하기를 바라신다. 하느님은 사랑 이외에는 다른 분이 아니라서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길은 하느님처럼 사랑하고 용서하는 길뿐이다. 예수님이 그걸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셨다. 십자가 위에서도 없는 힘까지 끌어모아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병사들은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루카 23,34)
내가 정말 만 탈렌트나 되는 빚을 탕감받았을까? 내가 그렇게 나쁜가? 문득 과거 행적이 떠올라 괜히 혼자 너무 부끄러워 가슴이 조여오기까지 할 때가 있다. 그 순간에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고, 그 과거를 지워버리고 싶다. 누군가 내 일생을 녹화해 보여준다면 어떨까? 세속적인 차원이라면 그 벌로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다. 부끄럽고 괴로워하는 거 말고는 그 죗값을 치를 방법이 없다. 나는 용서받은 게 분명하다. 만 탈렌트 빚을 탕감받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버젓이 살아갈 수 없다. 아니면 지극히 뻔뻔하거나. 그 용서받은 은혜를 느끼고 싶다면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해야 한다. 그래야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매일 하는 이 기도가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나는 훌륭하지는 않지만 나쁘거나 사악하지는 않다. 부족하고, 불완전하고, 나약해서 바라는 선의만큼 선한 행동을 잘 못한다. 이웃도 마찬가지일 거다. 내가 이웃에게 악의를 품고 대하지 않듯이 그도 그렇다. 함께 사니 사랑하고 눈감아주고 용서할 수 있는 거다. 심판은 내 몫이 아니니 내 알 바 아니다. 나중에 하느님이 알아서 다 하실 거다.
예수님, 제 눈의 들보는 못 보고 남의 티만 잘 봅니다. 그렇게 큰 게 들어 있으니 잘못 보는 걸 겁니다.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눈감아주고 참고 용서할 때마다 주님이 저를 용서하셨음을 알고 느끼게 됩니다. 이 불쌍한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죄인들의 피난처이시니 그 안에서 제가 용서받은 죄인임을 더 깊이 깨닫게 도와주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