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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āsava(와사와)와 brahmā(브라흐마)
인도-유렵 지역에도 다양한 신들에 대한 믿음이 존속했던 것 같다.
그 다양한 신들도 다양한 변위를 거쳐
지금 믿고 있는 신들 중에 일부분을 구성하는 것으로도 짐작된다.
여호아( ? vāsava)는 욕계 천신의 모습이지만 색계 천신의 모습이 섞여 있는 것 같고
아직도 인도에서 유력한 신인 브라흐마는 여러 화신(avart < ava√kram)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모습은 색계 천신의 모습(名色)으로 여겨진다. 그것도 초선의 범천이 대표적인 것 같다.
그 둘, vāsava(와사와)와 brahmā(브라흐마)를 합쳐진 표현이
[범천이요 대범천이고 지배자요 지배되지 않는 자요 전지자요 전능자요 최고자요 조물주요
창조자요 최승자요 서품을 주는 자요 자재자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조물주 여호아 아버지> 많은 듣는 칭호가 아닌가요?
이러한 신들이 모습은 거의 대부분 [地水火風 즉 名色]과 연관이 있는데
불교에서도 이들 外道들의 주장에 대해
반론적인 교설이 거의 대부분이고 일부는 수용하기도 하는 것 같다.
맛지마 니까야 첫 번째 경(M1)도 그 당시의 인도인들의 믿음 체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그 말씀을 하시는 맥락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짐작하는 것은 그 당시 인도인들의 믿음이 사견이라는 취지이지 싶다.
그 말씀 중에도 먼저 나오는 것이 [地水火風]이다.
디가 니까야 첫 번째 경(D1)은 brahmā(브라흐마)들의 사견(梵網)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디가 니까야에도 [地水火風]에 대한 말씀은 자주 나타난다.
세존께서 성도하시기 전에도
이미 인도 땅에는 까시나 수행(地水火風, 청황적백, 空識)은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다.
이 보다 더 수승한 수행이 아마 無所有, 非想非非想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선정 수행은 감각적 욕망을 수용하는 세속적인 태도와 육체의 학대를 통한 정화,
이 양 극단과는 다르지만 욕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수행인 이른바 禪定 전통이다.
그 수행은 '자신 등이 있다.'는 有我論(梵我一如 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지 싶다.
즉 [地水火風] 등을 '나 등'으로 여기는 것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梵住(慈悲喜捨)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범천의 세상(색계 초선천 등)에 태어나더라도
욕계를 완전히 벗어나는 수행은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
불교와 가장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결국은 완전히 다른 교리체계를 가지고 있는
니간타들도 [地水火風]에 대한 교설이 있으나,
찟따 장자와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초선을 넘어서지는 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S41:8)
이러한 점은 <조물주 하나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범천과도 동일한 상황이다.
물론 그 초선도 욕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일시적으로 머무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교에서는 이들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고 근본적인 입장을 다르지만
그들의 주장이나 사용하는 용어를 재해석하거나 재가공해서 수용하고 있다.
특히 4梵住(brahmavihāra, 慈悲喜捨)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특히 색계 초선의 尋伺에 가장 잘 어울리는 내용은
他에 대한 내용은 慈(심해탈)이고 自에 대한 태도는 자기절제(慾을 벗어남)이다.
이와 같이 自利利他의 思惟를 지니시는 분들 중에, 대승불교에서는 菩薩님들이겠지만
천주교 수녀님들 중에도 이러한 분들을 가끔 접할 수 있지 싶다.
이 분들이 하느님에 대한 지극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인간들에 대한 끝없는 慈愛의 마음상태는
아마 색계 초선의 [尋伺, 喜樂, 心一境]과 가장 유사한 모습으로 상상한다.
이때 이 분들의 喜樂(ecstasy)는 마약이 아니다.
물론 여행자가 正北이 아니라 1도라도 방향이 어긋나면 원하는 북극지점에 도달하지 못하듯이
전제가 약간만 틀어져 있어도 도달하는 지점은 많이 벗어나게 된다.
“tena hi, devānaminda, bhāsassū”ti.
“yesvāhaṃ , bhante, maññāmi samaṇabrāhmaṇā āraññikā pantasenāsanāti,
tyāhaṃ upasaṅkamitvā ime pañhe pucchāmi, te mayā puṭṭhā na sampāyanti,
asampāyantā mamaṃyeva paṭipucchanti —
‘ko nāmo āyasmā’ti?
tesāhaṃ puṭṭho byākaromi — ‘ahaṃ kho, mārisa, sakko devānamindo’ti.
“신들의 왕이여, 그렇다면 말해 보십시오.”
“세존이시여, 저는 숲에 머무는 수행을 하는 외딴 거주처에서 사는 자로 보이는 자들을
만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가서는 이런 질문들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답 대신에 '존자는 누구십니까?'라고 제게 되물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을 받고 저는 '존자들이여, 저는 신들의 왕 삭까입니다.”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te mamaṃyeva uttari paṭipucchanti — ‘kiṃ panāyasmā, devānaminda , kammaṃ katvā imaṃ ṭhānaṃ patto’ti?
tesāhaṃ yathāsutaṃ yathāpariyattaṃ dhammaṃ desemi.
te tāvatakeneva attamanā honti —
‘sakko ca no devānamindo diṭṭho, yañca no apucchimhā, tañca no byākāsī’ti.
te aññadatthu mamaṃyeva sāvakā sampajjanti, na cāhaṃ tesaṃ.
그들은 제게 '신들의 왕이시여, 그런데 존자께서는 무슨 업을 지어서 이런 지위를 얻었습니까?'라고 다른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들은 대로 배운 대로 그들에게 법을 설했습니다.
그들은 그 정도로도 마음이 흡족해서 '우리는 신들의 왕 삭까를 친견했다.
우리가 질문한 것을 모두 우리에게 설명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들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저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tyassu yadā maṃ jānanti, sakko devānamāgato.
tyassu mameva pucchanti, ‘kiṃ katvā pāpuṇī idaṃ’.
대신에 그들은 신들의 왕 삭까가 왔다고
저에 대해서 알게 되자
오히려 저에게 묻기를
'무엇을 행하여 이것을 성취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tesaṃ yathāsutaṃ dhammaṃ, desayāmi jane sutaṃ .
tena attamanā honti, ‘diṭṭho no vāsavoti ca’.
들은 대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오히려 그들에게 법을 설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마음이 흡족해져서
'우리는 와사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바라문은 범천과 합일한다. (梵我一如)
brāhmaṇā brahmunā saddhiṃ saṃsandati sameti
“iti kira, vāseṭṭha, sapariggahā tevijjā brāhmaṇā apariggaho brahmā.
api nu kho sapariggahānaṃ tevijjānaṃ brāhmaṇānaṃ
apariggahena brahmunā saddhiṃ saṃsandati sametī”ti? “no hidaṃ, bho gotama”.
33. “와셋타여, 참으로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소유물을 가졌고 범천은 소유물이 없다.
그런데도 소유물을 가진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소유물이 없는 범천과 합류하고 합일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seyyathāpi, vāseṭṭha, balavā saṅkhadhamo appakasireneva catuddisā viññāpeyya;
evameva kho, vāseṭṭha, evaṃ bhāvitāya mettāya cetovimuttiyā
yaṃ pamāṇakataṃ kammaṃ na taṃ tatrāvasissati, na taṃ tatrāvatiṭṭhati.
ayampi kho, vāseṭṭha, brahmānaṃ sahabyatāya maggo.
와셋타여, 예를 들면 고동을 부는 자가 힘이 세면
별 어려움 없이 사방에서 다 들을 수 있게 하는 것과 같다.
와셋타여, 그와 마찬가지로 이처럼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 닦은 자에게,
제한된 [욕계의] 업은 여기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
여기에 더 이상 정체해 있지 않는다. 와셋타여, 이것이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이다.
“iti kira, vāseṭṭha, apariggaho bhikkhu, apariggaho brahmā.
api nu kho apariggahassa bhikkhuno apariggahena brahmunā saddhiṃ saṃsandati sametī”ti?
“evaṃ, bho gotama”.
“sādhu, vāseṭṭha, so vata vāseṭṭha apariggaho bhikkhu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apariggahassa brahmuno sahabyūpago bhavissatī”ti, ṭhānametaṃ vijjati.
와셋타여, 참으로 비구는 소유물이 없고 범천도 소유물이 없다.
그러면 소유물이 없는 비구가 소유물이 없는 범천과 합류하고 합일하겠는가?”
“그렇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와셋타여, 참으로 소유물이 없는 비구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소유물이 없는 범천의 일원이 될 것이라는 이런 경우는 존재한다.
“tasmātiha tvaṃ, ānanda, imaṃ dhammapariyāyaṃ atthajālantipi naṃ dhārehi,
dhammajālantipi naṃ dhārehi, brahmajālantipi naṃ dhārehi, diṭṭhijālantipi naṃ dhārehi,
anuttaro saṅgāmavijayotipi naṃ dhārehī”ti.
"아난다여, 그렇다면 그대는 이 법문을 뜻의 그물[義網] 이라고 받아 지녀라.
법의 그물[法網]이라고도 받아 지녀라. 범천의 그물[梵網]이라고도 받아 지녀라.
견해의 그물[見網]이라고도 받아 지녀라. 전쟁에서의 위없는 승리[無上戰勝]라고 받아 지녀라.
“tatra, bhikkhave, yo so satto paṭhamaṃ upapanno tassa evaṃ hoti —
‘ahamasmi brahmā mahā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daso
vasavattī issaro kattā nimmātā seṭṭho sajitā vasī pitā bhūtabhabyānaṃ.
mayā ime sattā nimmitā. taṃ kissa hetu? mamañhi pubbe etadahosi —
“aho vata aññepi sattā itthattaṃ āgaccheyyun”ti.
iti mama ca manopaṇidhi, ime ca sattā itthattaṃ āgatā’ti.
비구들이여, 그러자 그곳에 먼저 태어난 중생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범천이요 대범천이고 지배자요 지배되지 않는 자요 전지자요 전능자요 최고자요 조물주요
창조자요 최승자요 서품을 주는 자요 자재자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나야말로 이 중생들의 창조자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전에 내게 '오, 다른 중생들이 여기에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일어났고
그러한 내 마음의 염원 때문에 이 중생들이 여기에 생겨났기 때문이다.'
tatiyampi kho so, kevaṭṭa, bhikkhu taṃ mahābrahmānaṃ etadavoca —
‘na khohaṃ taṃ, āvuso, evaṃ pucchāmi —
“tvamasi brahmā mahā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daso vasavattī
issaro kattā nimmātā seṭṭho sajitā vasī pitā bhūtabhabyānan”ti.
evañca kho ahaṃ taṃ, āvuso, pucchāmi —
“kattha nu kho, āvuso, 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ṃ — 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께왓다여, 세 번째로 그 비구는 대범천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나는 당신이 범천이요 대범천이요 지배자요 지배되지 않는 자요 전지자요 전능자요
최고자요 조물주요 창조자요 최승자요 서품을 주는 자요 자재자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인가를 묻지 않았습니다.
도반이여, 나는 당신에게 도대체 어디서 이 네가지 근본물질[四大], 즉 땅의 요소[地界],
물의 요소[水界], 불의 요소[火界], 바람의 요소[風界]는 남김없이 소멸하는지를 묻습니다.'
“atha kho so, kevaṭṭa, mahābrahmā taṃ bhikkhuṃ bāhāyaṃ gahetvā
ekamantaṃ apanetvā taṃ bhikkhuṃ etadavoca —
‘ime kho maṃ, bhikkhu, brahmakāyikā devā evaṃ jānanti,
“natthi kiñci brahmuno aññātaṃ, natthi kiñci brahmuno adiṭṭhaṃ,
natthi kiñci brahmuno aviditaṃ, natthi kiñci brahmuno asacchikatan”ti.
tasmāhaṃ tesaṃ sammukhā na byākāsiṃ.
께왓다여, 그러자 대범천은 그 비구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한 곁으로 가서는 이렇게 말했다.
'스님, 이들 범신천의 신들은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범천이 모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범천이 보지 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범천이 체험하지 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범천이 실현하지 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그래서 저는 그들의 면전에서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ahampi kho, bhikkhu, na jānāmi yatth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ṃ — 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스님, 도대체 어디서 이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 즉 땅의 요소[地界],
물의 요소[水界], 불의 요소[火界], 바람의 요소[風界]는 남김없이 소멸하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tasmātiha, bhikkhu, tuyhevetaṃ dukkaṭaṃ, tuyhevetaṃ aparaddhaṃ,
yaṃ tvaṃ taṃ bhagavantaṃ atidhāvitvā
bahiddhā pariyeṭṭhiṃ āpajjasi imassa pañhassa veyyākaraṇāya.
gaccha tvaṃ, bhikkhu, tameva bhagavantaṃ upasaṅkamitvā imaṃ pañhaṃ puccha,
yathā ca te bhagavā byākaroti, tathā naṃ dhāreyyāsī’ti.
스님, 그러므로 당신이 그분 세존을 뛰쳐나와
밖에서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잘못 되었고 나쁩니다.
스님, 돌아가십시오. 세존께 가셔서 이 질문을 드리십시오.
그래서 세존께서 상세하게 설명해 주시는 대로 호지 하십시오'라고.
na kho eso, bhikkhu, pañho evaṃ pucchitabbo —
‘kattha nu kho, bhante, ime cattāro mahābhūtā aparisesā nirujjhanti,
seyyathidaṃ — 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ti?
비구여, 그대는 '세존이시여, 도대체 어디서 이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 즉 땅의 요소[地界],
물의 요소[水界], 불의 요소[火界], 바람의 요소[風界]는 남김없이 소멸합니까?'라고 질문했는데
그렇게 질문해서는 안된다.
ettha āpo ca pathavī, tejo vāyo na gādhati.
ettha dīghañca rassañca, aṇuṃ thūlaṃ subhāsubhaṃ.
ettha nāmañca rūpañca, asesaṃ uparujjhati.
viññāṇassa nirodhena, etthetaṃ uparujjhatī’ti.
여기서 물과 땅과 불과 바람은 굳건히 서지 못하며
여기서 길고 짧고 미세하고 크고 아름답고 더러운 것과
정신과 물질은 남김없이 소멸한다.
알음알이가 소멸하면 남김없이 소멸한다.
첫댓글 식은 무상하지도 않고 괴로움도 아니고 오직 언어도단일 뿐입니다.
식은 "법" 일 수 없지요.
식은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라는 교리는 수정돼야 마땅하지요.
세존이 저렇게 설법하셨을 리 만무합니다.
그건 도대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식은 유위법이라고 말씀하셨나요 아니면 무위법이라고 말씀하셨나요?
만약 유위법이라면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라는 교리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고
만약 무위법이라면 상락아정이 맞겠지요?
세존께서 유위법이라고 설법하셨을리 만무합니까? ㅎ
아니면 식은 오직 언어도단입니까?
@봄봄
//식은 "법" 일 수 없지요.//
무엇을 법이라고 정의하십니까?
법 아닌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봄봄 법은 인식의 대상이지요.
식이 인식의 대상일 수가 없지요.
인식의 대상이 아닌데 어떻게 법의 특성(무상-고-무아)
을 부여할 수 있겠습니까?
@환희봉행 인식의 대상이 아닌 것은 법이 아니다라는 의미이지요?
눈의 알음알이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므로 법이 아니다. ... 등등
마노의 알음알이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므로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안식~의식은 무상, 고, 무아라는 설명은 성립하지 않는다.
안식~의식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므로
탐희애의 대상이 아니다.
.....
그렇다고 해서
식은 무위법은 아니지 않습니까?
법도 아닌데 무슨 무위법입니까?
그러면 법이 아닌 것은 무엇입니끼?
언어도단입니까?
@봄봄 무위법이라는 용어 또한 말 만들기 좋아하는 자들이 만든 장난에 불과합니다.
법이 아닌 것은 사실상 불가사의라는 의미지요.
탐희애의 대상일 수 없지요.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데 어떻게?
선의 최고봉이라는 상수멸정이 왜 최고봉인지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궁극에 이르면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궁극은...
@환희봉행
많은 것을 논하면 집중이 안되니
한 가지만 먼저 정리하고 그 다음의 논의를 이어가면 어떻겠습니까?
법이란 무엇인가? 즉 법이 아닌 것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봄봄 법이란 임지자성 궤생물해라 하지요. 다른 것과 구별되는 특징을 가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존재라고 흔히 해석되지요.
법 아닌 것은 우리가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요. 특성이 없기 때문이지요.
@환희봉행
//무위법이라는 용어 또한 말 만들기 좋아하는 자들이 만든 장난에 불과합니다//
dve dhātuyo — saṅkhatā ca dhātu asaṅkhatā ca dhātu.
ime dve dhammā abhiññeyyā.
두 가지 요소이니 형성된 요소[有爲界 = 有爲法]와 형성되지 않은 요소[無爲界 = 無爲法]입니다.
이 두 가지 법이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yāvatā, bhikkhave, dhammā saṅkhatā vā asaṅkhatā vā, virāgo tesaṃ aggamakkhāyati,
비구들이여, 형성된 법들[有爲法]이나 형성되지 않은 법[無爲法]에 관한 한,
탐욕의 빛바램[離慾]이 그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불리나니, (It3:41)
//말 만들기 좋아하는 자//는 누구를 지칭하신 것입니까?
@봄봄 누구긴요. 아비담마논사들이지요
@환희봉행
(It3:41) 여시어경은 붇다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봉행님 오늘은 여기까지... _()_
@봄봄 봄봄임
이띠부따까를 인용하신 것을 설마 제가 몰라서 그랬겠습니까?
<형성되지 않은 법> 이라는 용어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임을 왜 모르십니까?
설마 저걸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믿으시나요?
형성되지 ==도 않은 것이 어떻게 법일 수 있나요?
[정신과 물질은 남김없이 소멸한다.
알음알이가 소멸하면 남김없이 소멸한다.]
식이 소멸하면 명과 색(여기서는 명색이 아님)이 남김없이 소멸한다.
식은 법이 아니기 때문에 소멸하거나 생겨나지 않습니다.
명색이나 법 같은 대상들이 지들 멋대로 왕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놈들이 무아라는 것입니다.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한다 할 때 식이 멸하는 것을 본 사람은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지요.
사실 행연 식, 식연 명색에서도 필요에 의해 식을 거론은 하지만
식이란 언어도단의 자리인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vijjā ca vimutti ca. ime dve dhammā sacchikātabbā.
영지(靈知)와 해탈 입니다. 이 두 가지 법이 실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D34)
디가 니까야에 해탈(vimutti)도 법(dhamma)이라고 했습니다.
이 해탈도 형성된 것인가요?
해탈이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지요.
해탈이 법일 수는 없습니다....
봉행님의 인식은 아마도 識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식은 반야와 분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경문은 아실겁니다. 그래서 전식득지라는 표현도 사용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식의 대상은 욕계 중생이라면 6경(색, 성, 향, 미, 촉, 법)에 한정될 것입니다.
경문에 무수히 나오는 정형구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ñāṇa>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itthattāy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pajānāti>]
아마 봄봄님이 "다독제일" 이시리라 믿습니다.
전식득지, 정법안장
진리는 이미 봄봄님 안에 함께 늘 언제나 지금까지..._()_
오늘은 이만 물러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zc9C6Cjl9Q
PLAY
강성용 교수의 강의는 들을 만합니다. 지금은 2번째 시리즈가 진행중입니다.
처음부터 아마 거의 다 본 것 같습니다.
인상에 남는 몇 가지는 다르마(법)에 대한 그들의 용례...
그리고 禪(자나)에 대해서 어떤 누구(학자)도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지 못한다는....
그리고 경문에 자주 나오는
전륜성왕들의 바퀴굴리는(전륜) 내용이
'말(馬) 풀어'라고 나오는데
그 의미는 '나의 왕권에 대항하는 자 나와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 등등등
인도인들의 의식세계를 유추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sīlaṃ samādhi paññā ca, vimutti ca anuttarā.
anubuddhā ime dhammā, gotamena yasassinā.
계와 삼매와 통찰지와 위없는 해탈 -
명성을 가진 고따마는 이 법들을 깨달았노라.
계와 삼매와 통찰지와 위없는 해탈(vimutti) - ime dhammā 이 법들 -
任持自性 軌生物解: 아래는 저의 해석인데, 틀릴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 맡아 지닌다(임지), 자신의 성품을(자성). / 수레가 가는 길이 바퀴자국을 남기듯이, 그런 것이(궤) 생기게 한다(생) 사물에 대한 이해를(물해).
* 의역하면, 법이란: 자신의 성품을 맡아 가지며, 조건에 따라 어떤 현상으로 나타난다.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지(知)와 견(見)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so evaṃ pajānāti — ‘ayaṃ kho me kāyo rūpī cātumahābhūtiko mātāpettikasambhavo
odanakummāsūpacayo aniccucchādana-parimaddana-bhedana-viddhaṃsana-dhammo;
idañca pana me viññāṇaṃ ettha sitaṃ ettha paṭibaddhan’ti.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압니다.
'나의 이 몸은 물질로 된 것이고,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로 이루어진 것이며,
부모에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되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의 이 알음알이는 여기에 의지하고 여기에 묶여 있다.'라고.
purisassa ca viññāṇasotaṃ pajānāti,
ubhayato abbocchinnaṃ idha loke appatiṭṭhitañca paraloke appatiṭṭhitañca.
그리고 이 세상에도 확고하게 머물지 않고 저 세상에도 확고하게 머물지 않고,
둘로 끊어지지 않은 인간의 알음알이의 흐름<*viññāṇasota>을 꿰뚫어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