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5세(프랑스어: Louis XV)는 1715년 9월 1일부터 그가 죽은 1774년까지 59년 동안 프랑스와 나바라를 통치한 왕이다.
다섯 살에 왕위에 오른 루이는 자신의 열세 번째 생일 날짜인 1723년 2월 15일까지 그의 재종조부이자 이복 왕고모부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섭정과 함께 통치하였다.
루이15세 즉위직후 나이 5세
[루이 15세] 나이10세 때
그 뒤로는 자신이 직접 정식으로 국가를 다스렸다.
이때 플뢰리(André-Hercule de Fleury)를 재상으로 등용, 평화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폴란드 왕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48년)에 휩쓸렸으며 이어서 7년 전쟁(1756~63년)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7년 전쟁에서는 해상과 인도(印度) 및 미국 식민지에서 패배하여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으며,
많은 비용의 지출은 재정난을 초래하였다.
정치상에서는 퐁파두르 후작 부인과 뒤바리 백작 부인 등의 충동으로 인하여 실패가 많았고,
계몽사상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부르봉 왕조의 절대주의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이다.
갑작스럽게 죽은 대부분의 왕족보다 오래 살아남은 그는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인자한 행동으로 명성을 얻어 “친애왕” (le Bien-Aimé)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어린 나이에 일찍 어머니를 여의어 위안을 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를 갈망했던 그는
자신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믿음직한 여자를 찾고자 1745년 이후 많은 여인을 가까이하여 나라 살림을
소홀히 하고 나라 재정에 큰 손실을 냈으며, 이로 인해 국민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1725년 8월 15일에 왕위에서 물러난 폴란드의 스타니슬라스 레친스키의 딸
마리 레슈친스카 공주와 결혼했다
마리 레슈친스카 왕비
그러나 1744년에 가끔 수렵을 하러오던 루이 15세에게 우연히 퐁파두르의 아름다운 미모가 눈에 띄어
내연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곧 후작 부인의 칭호가 주어져 귀족으로 신분이 격상되었으며,
남편과 이혼하여 1745년 9월 14일 정식으로
왕의 정부(情婦)로서 인정되어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1721년 당시 파리의 부유한 금융업자였던 샤를 프랑수아 폴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의 딸로 태어났다.
잔느 푸아송은 평민이란 신분에 속했었지만, 부르주아 계층이었던 어머니 애인의 호의 덕분에
귀족의 자녀 이상급의 교육을 받고 자라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성적이 매우 우수했으며, 예술을 애호하게 되었다.
그녀는 모든 연극의 대사를 암송할 수 있었고 클라비코드를 수준급으로 연주할 수 있었으며,
열정적인 정원사이자 식물학자였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
1745년부터 그의 애첩인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그녀가 사망한 1764년까지 실제로 궁정의 대소사를 좌우했다.
퐁파두르 부인은 20여 년 동안 프랑스 정치를 좌우했다. 그녀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을 후원하였고
정부 고관의 임명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베르사이유궁전 대정원-그랑띠아농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매우 지성적이었고,
예술 전반에 걸쳐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학예 보호에 힘쓴 그녀의 샬롱에는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녀의 다양한 예술적 취미는 프랑스의 문예를 진흥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으니, 극장이나 소극장의 건립은 물론 당대의 예술가들도 모두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후원을 받았다.
그녀는 가구나 도자기, 그릇, 의상, 보석, 그림, 책 등 많은 수집품을 모았는데,
그녀가 갑작스레 죽은 뒤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는 데에만 1년이나 걸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시대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우아한 로코코 양식이 발달했던 시대가 되었다.
왕실성당
1710년 성 루이성당으로 축성하얐으며 결혼식이 있었던 곳으로 매일 오전 10시에 미시가 있었고
천정화는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을 감상할 수 있다.
30살을 넘었을 무렵부터 루이 15세와 한 침실에서 같이 자는 일은 없어졌지만,
루이 15세는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43살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을 때까지 계속 총애했다고 한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베르사유 궁전 안에 녹원을 조성하고는
그곳에 전국 각지에서 데려온 미녀들을 모아놓고 루이 15세에게 고르게 하여 매일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대령했다고 한다.
그래서 7년간은 뚜쟁이였다는 악평을 듣게 된다.
< 위키백과>
귀족의 방
왕비가 사용한 응접실로 18세기 가구와 루이 15세의 양탄자초상화가 있다
1774년 5월 10일, 루이 15세는 천연두에 걸려,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64살로 사망하니,
왕세자 루이 페르디낭(루이 15세보다 9년먼저 사망)의 아들 루이 16세가 즉위했다.
아무도 루이15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위키백과>
첫댓글 잘 보고 새겨 갑니다..몰랐던것 알았을때 대게 흐뭇하죠~^^*
프랑스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기억나네요;;그땐 정신업이 서대는라 이어폰설명도 안들었는데 다시보니 머리에쏘옥 들어오느만요;;;;감사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