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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智異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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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방 ♡ 스크랩 이제는말할수있다 왜(倭)똥강아지와 꽁(共)똥강아지
nolboo 추천 0 조회 116 09.01.18 10: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왜(倭)똥강아지와  꽁(共)똥강아지

 

1950년, 6.25 남북전쟁(南北戰爭)이 일어 났습니다. 나는 그때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3학년이 었고, 새 학기(學期) 교과서(敎科書)도 아직 받지 못했을 때입니다. 그때 그 3하년 1학기를  시작으로 해서 5하년 2학기 까지 교과서는 물론, 학교도 다니지 못한 가슴 저린 아픈 추억(追憶)의 앙금이 지금 까지도 마음 속에서 가끔 꿈틀거려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전쟁(戰爭)이 일어 났다는 소문(所聞)이 난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주변(周邊) 세상이 온통 붉은 천지(天地)로 변했습니다. 조금 크다고 하는 건물은  빨간 바탕에  다섯개의 끝이 칼날 처럽 뾰족한 별이 새겨진,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섬뜩한 큰 깃발이 하늘 높이 걸려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큰 길 뿐만 아니라 작은 뒷골목 까지도 평소에 왕래(往來) 하던 그 많은 젊은이들은 신기(新奇)하게도 몽땅 사라져 버렸습니다. 보이는 것은 젖은 빨래 처럼 풀이 죽어 생기(生氣) 잃은 노인들과, 기를 펴지 못하고 주눅 들어 종종걸음 치는 아낙들, 그리고 아이들 뿐이었습니다.

퇴색(退色)된 군복(軍服)의 왼팔에 빨간 색 완장(腕章)을 두루고, 모자에도 빨간 별이 번쩍이는 소위 '인민군(人民軍)'이라고 하는 사람들만이 거리와 마을, 집집을 휩쓸고 설쳐대며 돌아쳤습니다. 그 들은 아직 까지도 후퇴(後退)하지 못하고 남아,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국방군(國防軍:우리 대한민국 군인)을 잡아내 처단(處斷)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군화(軍靴)를 신은 채 총을 겨누고 집안으로 들어 와 방이며 벽장  속은 물론이고 장농이며 헛간 까지 샅샅히 뒤졌습니다. 방 구들장 속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 해서 부엌의 불 때는 아궁이 속에 따발총을 들이 대고 쏘아 댓고, 장독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국방군을 사살하기 위해 장독대에다 대고 집중(集中) 사격(射擊)을 해, 장독이 깨져 된장, 간장, 고추장 등이 쏟아져나와 차마 눈 뜨고 볼수 없는 참혹(慘酷)한 광경(光景)이 날마다 계속 이어졌습니다.

집집마다 온 집안 식구들이 한방에 모여 앉아 문을 닫고 생사를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그때만 해도 시내에서 몇째 안되는 아주 호화로운 개인 저택(邸宅), 대문 밖의 조그만 헛간방에 세들어 살았습니다. 집 주인은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분이라는데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이었습니다. 주인집 선생님의 할아버지가 조선(朝鮮)시대 의정(議政)의 대신(大臣), 정승(政丞) 벼슬을 하셨고, 그때는 그 후손들이 이 지방에서는 제일 부자이고, 또 가장 존경 받는 집안이라고 했습니다. 

그 짚 대문 앞에는 험악(險惡)하게 생긴 공산군 병사 두사람이 '앞에 총'의 부동(不動) 자세로 보초(步硝)를 섰고, 공산군 장교(將校)들이 끊임 없이 드나들었습니다. 어른들끼리의 귓속말로 속삭이는 내용은 선생님은 일본 유학 시절 부터,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빨갱이가 됐고,  남한에 거주하면서도 북한 공산당과 간첩(間諜)을 통해 자주 연락을 주고 받아 북한의 비밀(秘密) 지령(指令) 임무(任務)를 수행(遂行)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서도 남한에 거주하는 거물급(巨物及) 간부로 인정(認定)을 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하(南下)한 공산군 병사들이 상부(上部)의 지시에 의해 저처럼 극진히 모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남한에 은신(隱身)해 사는  지방 빨갱이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훗날 공산군이 북으로 퇴각(退却)할때 그 분도 함께 월북(越北)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어쨋던 우리는 그 집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 났습니다.

우리 가족은 그 무섭고 살아 남기 힘든 공포(恐怖) 분위기(芬圍氣)를 견뎌 내기도 힘들었지만 따로 셋방을 얻을 수도 없어 아버지가 태어나고 자란 그리 멀지 않은 시골로 이사(移舍)를 했습니다. 그 시골 마을은 이씨(李氏)들의 집성촌(集性村)으로 아래 웃말 합쳐 백여호쯤 되는 꽤 큰 마을이었습니다. 먼 친척쯤되는 집의 문간 방을 얻어 새 살림을 차렸습니다.

 

아버지는 일본이 우리 나라를 침범해 강제로 빼앗은, 한일(韓日) 합방(合邦) 사건이 일난 전해인 1909년에 이 마을에서 태어 나셨습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마을 서당(書堂)에서  꽤 여러해 한학(漢學)을 공부 하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관혼상제(冠婚喪祭) 예식(禮式)의 진행(進行)이나 중요한 문서(文書)를 작성할 때에는 아버지를 모셔다가 자문(諮問)을 받고, 서류를 작성하여 대행(代行) 하도록 하는 것을 자주 본 나는 그것을 큰 자랑으로 알고 지냈습니다.

아버지는 자존심(自尊心)이 강하고, 성품(性品)이 강직(强直)했으며. 불의(不義)나 결례(缺禮)를 보시면 당신과 관계가 없는 일이라도 꼭 뛰어 들어 자잘못을 가려 판결(判決)을 내리시며, 훈계(勳戒)까지 하시고 일어서는 대쪽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 성품이 좋을 때도 있지만 사회 생활에선 적응이 잘 되지 못했습니다. 어느 직장에든 들어 가시면 단  며칠도 적응을 못하시고 주인이나 동료들과 싸우시고 뛰쳐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엔 직장 생활은 아예 때려 치우고 논밭이나 공장에서 노동일을 하셨습니다. 차라리 그게 몸은 고되어도 마음이 편해 좋으셨던 것 같았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던 왜정치하(倭政治下) 시대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군청, 경찰서,학교 등을 비롯한 모든 관공서(官公署)에는, 기관장이나 윗자리는 일본 사람들이었고, 한국 사람들은 하위직(下位職) 몇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특히 일본 순사의 앞잡이가 돼 그들의 뒤만 쫄쫄거리고 따라 다니는 한국 사람들을 '왜(倭)똥강아지'라고 불렀습니다. 왜놈들의 뒤꽁무니만 따라 다니면서 똥내만 맡는다고 멸시 했습니다. 대개가 이 똥강아지들은 왜놈들이 들어 오기전, 마을에서 잔머리나 굴리고 못된 나쁜짓을 도맡아 해서 상대 못할 몹쓸 놈, '망난이'로 부르던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을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날 자기의 잘못은 추호(秋毫)도 인정(認定)할 줄 모르고, 마을 어른들만 원망하며 자기들의 학대, 멸시에 대한 앙가픔의 기회만 노려 왔던 사람들입니다. 없는 말을 만들어 내고, 어쩌다 있을 수 있는 작은 허물을 보태고, 확대(擴大) 재생산(再生産)해서 일본 순사들에게 고자(告者)질 해 바쳤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 왜똥강아지들 때문에 일본 순사들로 부터 혹독(酷毒)한 앙가품을 받았습니다.

경찰 지서의 순사(巡査:지금의 경찰)들은 2-3일에 한차례씩 꽁무니에 왜똥강아지를 달고 관내(管內) 순찰(巡察)을 나왔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집을 뒤지며 도벌(盜伐), 밀주(密酒), 그리고 사상(思想)등을 탐색(探索) 해서. 소위(所謂) 그들이 말하는 범법자(犯法者)를 잡아가는 일을 주로 한 것으로 압니다.

순사가 마을에 온다는 소문이 전해지면 모든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가 숨고. 울던 아이들도 울음을 뚝 그쳤습니다. 순사들은 정복(正服)의 모자와 가슴, 어깨 등에 붉은 색과, 노란 금색의 표장(表裝)을 붙이고 무릎 까지 올라 오는 긴 가죽 장화를 신었습니다. 허리에서 발목까지 내려진 긴 립뽄도(군인들이 전쟁할때 쓰는 긴 일본칼)을 차고 다니는데 걸음을 걸을때 마다 발등과 부딪쳐 철거덕 소리를 냈습니다. 위풍이 당당하고 기세가 등등 했습니다.

이 일본인 순사는 마을에 나오기만 하면 우리 집엔 꼭 들렸습니다.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어떤 날은 아버지를 밖으로 불러내 큰 소리로 언쟁(言爭)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큰 소리로 반항하며 대드는 아버지를 두 놈들이 주먹으로 내 지르고 발로 걷어차 코피까지 흐르는데 포승줄로 팔을 뒤로 묶고 앞세워서 끌고 갔습니다. 꽤  오랜 동안 후에 돌아 오신 아버지의 모습은 어린 나도 똑바로 못볼 정도로 참혹 했습니다. 그 뒤로 아버지는 오랜동안 자리에서 앓아 누워 계셨던것 같습니다.

 오랜 후에 알았지만 아버지 보다 세살 아래 아버지의 남동생, 내 작은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성격이 아버지와 꼭 닮았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았고, 하고저 마음 먹은 일은 꼭 끝장을 내는 분이었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평소에도 관계가 좋지 않던 왜똥강아지 한사람과 크게 싸우고, 그놈의 밀고(密告)로 경찰서로 끌려가 조선 독립군의 하부조직원으로 몰려 몇달간 취조, 고문, 감금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석방 되었습니다.

석방되고 열흘쯤 지난 어느 날, 아침 밥을 차려 놓고 아버지께서 동생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 방문을 열어 봤더니 잠자리는 말끔히 정돈되어 있는데 동생은 없었습니다. '몸도 아직 성하지 못한데 어디로 갔는가' 하고 두리번 거려 봤더니, 이부자리 위에 접어, 얹어 놓은 종이 쪽지가 있었습니다. 쪽지에는 '형님 죄송합니다. 저는 중국 상하이로 갑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계시는, 평소에 존경해 오던 김구 선생님을 찾아가 뵙고, 독립 운동에 가담해 일본놈들과 싸워 나라를 되찾겠습니다. 그리고 꼭 이 원수를 갚겠습니다.----------. 이 쪽지는 부엌 아궁이 불 속에 넣어 태우시고 형님은 저를 행방불명(行方不明)으로 소문(所聞) 내 주세요. 우리 나라는 꼭 해방이 됩니다, 살아 돌아 오면 뵙겠습니다." 아버지는 온 몸에 힘이 쏙 빠지고, 허탈(虛脫)해져 그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일본 순사들이 마을에 나오면 우리집, 가택수색(家宅搜索)을 했고, 아버지를 끌어다가 공갈(恐喝), 협박(脅迫),고문(拷問)을 해, 작은 아버지의 거처(居處)를 알아 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떠나 가신 작은 아버지는 8.15해방이 되고, 6.25 전쟁이 터져도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까지 영영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셨습니다.

 

 다시 살던 곳에서  6,25 전쟁으로 쫓겨나 피난(避亂) 살이를 하게 된 아버지의 고향 마을입니다. 그 마을은 이씨들의 집성촌(集姓村)이고, 소위 양반들의 아존(我尊)과 아집(我執), 그리고 독선(獨善)의 전형적(典型)的)인 양반촌(兩班村)입니다. 백여호(百餘戶)중에 타성(他姓)은 일곱집 뿐입니다. 그 일곱집은 소위(所謂) 상민(常民)으로, 주로 양반가의 궂은 일, 예를 들면 죽은이의 시신(屍身)을 씻긴 후에 옷을 입히는 염습(殮襲)이나, 산역(山役)을 해서 매장(埋葬)을 하는 일, 그리고 대사(大事)때 소나, 돼지 등을 잡는 험한 허드렛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타성(他姓)이 또 있습니다. 동네 양반들 중에서는 직계(直系)의 선조(先祖)가 벼슬을 했거나, 전답(田畓)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잣집에는 하인과 머슴을 여러명씩 거느리고 살았습다.

머슴은 대개 일년 계약직(契約職)입니다. 그때는 절대적인 영농사회(營農社會)였기 때문에 전답(田畓)이 없는 빈민(貧民)은 생계를 이어 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 나와 부잣집에 혼자 들어와 살며, 그 집에서 숙식(宿食)을 해결하고, 일을 하고, 1년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약정(約定)한 품삯을 받아 나가거나 다시 재계약을 하게 됩니다. 1년 품삯은 머슴의 일할 능력, 나이, 고분고분하여 주인의 명령이나 지시에 절대 복종하는 품성(品性) 등에 의해 결정 됐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그 당시 일 잘하는 상머슴의 1년 품삭이 쌀 일곱 가마니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대개 양반집 대문의 양쪽에 걸쳐 있는 하인들이나  머슴이 거처하는 행랑채에 살며 주인댁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천민(賤民)으로 살아 온 사람들입니다. 주인이나 양반들의 혹독(酷毒)한 학대(虐待)와 멸시(蔑視)에 대한 원한(怨恨)이 뼈속 깊이 사무친 사람들입니다.

 

마을의 통치(統治)를 담당한 공산군은 바로 이 점을 교묘(巧妙)히 이용 했습니다. 그들에게 그럴싸한 직책을 주고 공산군들의 복장(服裝)을 입혔으며, 붉은색 노란색의 휘장(煇裝)을 달아 주고 마을의 소위 그들이 말하는 반동분자(反動分者)와 못된 지주(地主)들을 색출(索出), 처형(處刑)하는 막대한 권한(權限) 까지 부여(附與)했습니다. 

그들은 살아 오면서 받은 양반에 대한 사무친 원수(怨愁)를  갚을 수 있는 하늘이 준 절호(絶好)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안하무인(眼下無仁)이었습니다. 옛날의 상전(上典)인 양반, 주인(主人), 연장자(年長者)등이 모두 하잘것 없는 저희들의 졸개들로 보였습니다. 어른들 말로는 '저 놈들은 간뗑이가 부어 배 밖으로 삐쳐 나왔고, 눈깔이 튀어 나와 하늘이 돈짝만하게 뵈이는 미친 놈들' 이라며 울화통(鬱火桶)이 터졌지만, 그사람들이 들을까봐 기어드는 목소리었습니다. 빨간 완장과 모자를 쓰고 공산군의 꽁무니를 졸졸 거리고 따르며, 제 세상을 만난 듯이 으쓱거리고 뽐내는 그들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귓속말로 '꽁똥강아지'라고 불렀습니다. '공산군(共産軍)의 꽁무니만 따라 다니며, 그 놈들의 똥냄새를 즐기는 강아지'라는 뜻이겠지요.

하여튼 지금 까지 '내노라.'하고 긴 장죽(長竹)의 담뱃대를 물고, 갈짓자(之)의 양반 걸음 걸이로 큰 기침하고, 호령(號令)하고, 거들먹 거리던 양반들의 수난시대(受難時代)가 돌아왔습니다. 양반, 그리고 부자들의 전성시대(全盛時代)는 막을 내리는 듯 했습니다.

 U.N군 비행기의 공습(空襲)을 피하기 위해 마을을 둘러 싼  산의 능선(陵線)에 방공호(防空戶)를 파는 일, 반동분자를 즉결(卽決) 심판(審判)으로 사형(死刑)시켜 시체(屍體)를 매장(埋葬) 하는 일. 전쟁 물자 나르는 일 등에 거들먹 거리던 양반들이 동원(動員)되었습니다. 꽁똥강아지 들은 자기들을 많이 학대, 멸시한 양반들을 더 험하고 힘든 일에 자주 끌어 냈습니다. 불응(不應)하면 반동분자로 상부에 보고하여 즉결 심판으로 사형(死刑)을 시켰습니다. 물론 타성(他姓)받이라고 다 그런 것 만은 아닙니다. 예외(例外)도 있습니다. 심성(心性) 반듯하고 착하며, 평소(平素)에 주인의 관대(寬大)한 대접을 받은 사람들은 예외(例外)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릴적 그 고향을 떠나 오랜 동안 타향살이로 고생하시다가, 전쟁을 피해 돌아 오셨습니다. 고향에 사는 사람들이 거의 낯선 사람들이었습니다. 가까운 친척도, 서로 왕래하던 사람들도 없습니다. 그래도 토박이 양반들은 같은 씨족(氏族)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괄시(恝示), 또는 멸시(蔑示)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난 보따리만 날름 지고 찾아든 가난뱅이지만 도와 주려고 애썼습니다. 모자라는 농사일의 품군으로 불러 일을 시키셨습니다. 그때 장정(壯丁) 하루의 품삯은 쌀 1되 반(약3L)정도로 기억 됩니다.

그런데 꽁똥강아지들은 객지에서 떠돌아 다니다 들어 온 피난민 가난뱅이 아버지를 많이 괴럽혔습니다.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옳은 말만 하시는 나이드신 아버지에게 함부로 대들어 윽박 지르고 못살게 괴롭혔습니다. 특히 그 놈들의 미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공산군들이 하는 사역(使役)에 강제동원(强制動員) 되는 횟수가 점점 늘어 갔습니다.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정당(正當)한 항의(抗議)를 하는 아버지에게 젊은 꽁똥강아지 두 놈들이 대들어 윽박 지르고, 못된 욕을 퍼 붓고, 마지막에는 주먹과 발길질로 폭력을 휘둘러 아버지를 많이 다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놈들이 마지막 손을 털며 하는 말은 "두고 보자."였습니다.

그 시절엔 공산군이나 꽁똥강아지들에게 미움을 사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꽁똥강아지들이 상부(上部)에 보고하고 다음 날이면 공산 병사(兵使) 서너명과 꽁똥강아지들이 나와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앞에 저들의 말로 "공산당의 적화통일(赤化統一)을 반대하는 악질(惡質) 반동분자(反動紛子) "를 꿇어 앉혀 놓아 인민재판(人民裁判)을 합니다. 

저희들 나름대로 마련한 피고(被告)의 죄목(罪目)을 낭독(朗讀)하고, "사형에 처합니다" "반대하는 사람 있으면 손을 들어 보시오."  이의(異議)가 없음으로 사형(死刑)에 처합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자기 목숨을 담보로 "반대합니다"라고 나설 사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죄인의 눈을 수건으로 싸매고, 가까운 큰 나무 등걸에 손을 뒤로 하여 결박(結縛) 시킵니다. 공산군이 따발총을 겨누고 사격을 하고, 죽어 허물어지는 시체를 다시 한번 확인 사살합니다. 시신은 마을 사람들을 시켜 가까운 산에 매장시켜 버립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들어 왔고, 우리가 사는 집 대문과 뒷편 담벼락 밑에는 꽁똥강아지 두 놈이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을 뒷간(변소)에 다녀 오던 나는 분명히 봤습니다. 엄마를 비롯한 우리 식구들은 모두가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내일 인민 공개 재판으로 사형에 처할 때까지 달아나지 못하도록 밤새워 감시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잠을 잣는지 꿈을 꿨는지,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에 눈을 떴습니다.

방문짝이 밖으로 떨어져 나가 있고, 몽둥이를 든 꽁똥강아지 한놈이 군화를 신은 채 씩씩 거리며 방안의 벽장문을 때려 부수어 안을 살펴 보고, 집안팎을 돌아치며 고함을 지르고 살림을 때려 부수고 있었습니다.

밤새 아버지가 뒷담 밑에서 보초를 서던 꽁똥강아지 한놈의 머리를 갈겨  실신 시키고 감쪽같이 달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날은 많은 공산군들이 몰려 나와 온 동네와 뒷산까지 발칵 뒤집어 수색을 했으나 끝내 아버지를 찾아 내는 일에는 실패 했습니다.

그후로 어머니는 공산군들에게 매일 불려가 갖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어머니는 마을의 양반댁 대소사(大小事)에 찾아가 부엌 일을 도와 주고, 그 댓가로 음식을 얻어다 우리를 먹여 길렀읍니다, 

다행히 마을 부잣집에서 밤중에 몰래, 부리는 사람을 시켜 날라다 주는 보리쌀, 감자, 고구마,

채소 등이 가끔은 있어서 죽지 않고 연명(連命)할 수는 있었습니다.

꽁똥강아지 몇놈만 빼 놓고 마을의 대부분 사람들은 참다 보면 국방군이 머지않아 올라 올것이라는 것을 믿는 눈치들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사는 알길이 없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우리들의 우방(友邦)국,  U.N군이 한국 전쟁에 참가 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추석 무렵 부터 마을 분위기가 어수선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밤낮으로 비행기가 꼬리로 긴 연기를 뿜어내고, 굉음(宏音)을 지르며 지나 갔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 가지 않아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上陸)했다는 소식도 들려 왔습니다. 공산군과 꽁똥강아지들이 마을에 나타나는 횟수가 줄어 들더니 마침내 발길을 끊었습니다, 공산군은 패잔병(敗殘兵)이 되어 깊은 산속을 통해 북으로 퇴각(退閣)했습니다. 그처럼 공산군의 앞잡이가 되어 잔악(殘惡)한 짓을 하던 꽁똥강아지들은 자기들의 한 짓이 있어 대한 민국에서는 살아남기 힘들 것을 알아 차리고 공산군 패잔병과 함께 도망쳤습니다.

 

그러고 며칠 후, 아직도 마을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형편이라 야음(夜陰)을 틈탄 밤중에 아버지께서 집을 찾아 드셨습니다. 어머니와의 도란거리는 이야기 소리에 잠을 깬 나는 호롱불 밑에서 어머니와 마주 앉아 계시는 웬 낯선 사람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머리는 그림에서나 본 숫사자의 갈개 머리 처럼 풍성(豊盛)하게 늘어져 있고, 온 얼굴은 눈만 빠꼼하고 수염 투성이었습니다. 긴 수염은 가슴까지 내려와 있었습니다. 낯선 사람의 출현(出現)에 놀라 눈이 휘둥그러진 나를 보고 거친 손을 내미시며 "아빠다. 그새 많이 큰것 같구나."하고 당겨 안으셨습니다. 내 등을 토닥거려 주시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흐느껴 울기만 했습니다.

이렇게 돌아 오신 아버지는 마을에서 영웅(英雄)아닌 영웅(英雄)이 되셨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아지의 얼굴도 보고, 그 동안 어디서, 어떻게 보낸는지가 궁금해서, 마을 사람들이 좁은 마당에 장사진(長蛇陳)을 쳤습니다. 부잣집에서는 푸짐한 음식을 장만해 놓고, 사람을 보내 아버지를 모셔다가 살아 돌아 온 생환(生還)의 축연(祝宴)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떡, 닭, 토끼, 생선,곡식 같은 먹을 거리를 집으로 보내 주시는 고마운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공산군들에게 소위(所謂) 인민공개재판(人民公開裁判)으로 처형(處刑) 당하기 전날 밤 뒷편 담장 밑에서 졸고 있는 꽁똥강아지를 몽둥이로 뒷머리를, 죽지 않을 만큼 때려 실신(失神) 시킨뒤 달아 나셨습니다. 캄캄한 밤에 마을 뒷산 능선(陵線)을 따라 걸으시며 많은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찾아 가서는 안 됩니다. 그때는 마을에 낯선 사람이 들어 오면 공산군들이 다른 지방에서 죄를 짓고 도망 온 사람으로 인정해서 잡아다가 가둬 놓고, 갖은 고문으로 살던 곳의 주소지를 추적합니다. 아버지의 주소와, 마을에서의 행적이 탄로(綻露) 나면 그 마을의 인민 재판으로 처형될 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하늘로 솟을 수도 땅 밑으로 꺼질 수도 없읍니다. 사람들의 눈에 뜨일까봐 밤에는 능선을 따라 걷고, 낮에는 으슥하고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7-8부 능선 으슥한 곳을 찾아 잠을 잤습니다. 먹을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룻밤낮을 굶었던니 배가 고프고 기력(氣力)이 탈진(脫盡)돼서 더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생각이 낸 것이 초식동물(草食動物)의 생활이었습니다.

마침 늦은 봄철이라 산에는 연한 풀과 꽃, 그리고 산열매 들이 많았습니다. 코로 냄새를 맡고, 혀끝을 대 봐서 독성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마냥 먹었습니다. 운이 좋을 땐 산밭에서 사람들이 심어 놓은 고구마나 감자를 만났습니다. 풀섶에 문질러 대강의 흙과 겉껍질을 벗겨 내고 먹었습니다. 산 옥수수 밭을 만나면 포식(飽食)을 했습니다. 날 것으로도 먹을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좀 힘들었지만 차츰 그런 생활에도 익숙해 갔습니다.

 며칠을 헤매며 깎아 지른 듯한 절벽 밑을 지나다가 한 길쯤 높이에 있는 석굴(石堀) 하나를 발견(發見) 했습니다. 짐승이 살지 않은가 해서 돌을 몇번 던져 보고 소리를 질러 봤지만 기척이 없었습니다. 들어가 보니 내부가 꽤 넓은 동굴이었습니다. 한켠에는 윗벽에서 물이 떨어져 아래로 고여 있었습니다. 양손을 모아 움켜 마시니 맛이 깔끔하고 속이 시원했습니다. 몸도 씻을 수도 있습니다,

'됐다. 지금 부터는 고생하며 떠돌아 다니지 않아도 된다. 비행기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저렇게 하늘을 누비며 폭격을 해대니, 머지 않아 빨갱이 놈들은 물러 갈 거다.' 심심산곡(深深山谷)이라 편하게 숨어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다만 굴안이라 냉기(冷氣)가 심(深)했습니다. 아래로 내려가 마른 낙엽과 풀을 거두어 굴에 쌓았습니다. 아주 많이, 많이-----. 그리고 그 속에 묻혀 잤더니  참으로 오래간만에 단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산짐승이 되어 산 생활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 지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사람 사는 마을의 동정(動靜)이 궁금해졌습니다. 하루는 능선을 따라 내려가 봤더니 반나절 정도만 가면 꽤 큰 마을이 있었습니다. 시계는 없었지만 어림 짐작으로 3-4시간은 걸리는 것 같았습니다. 빨갱이 놈들이 물러 가면 마을에 '어떤 변화든지 있을거다,'하고 생각한 아버지는 사흘에 한번씩 내려가 키 큰 풀숲에 숨어 앉아 살펴 봤습니다. 달력도 없어 날짜 가는 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말씀이 그 날은 어쩐지 아침 부터 기분이 좋으셨답니다.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능선을 따라 내려가 그 마을에 거의 가까워졌을 무렵, 신나는 농악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금 까지는 항상 조용하고 사람의 왕래도 적은 활기 없는 마을이었습니다.

과연 마을의 남녀노소가 모두 쏟아져 나왔는지 좁지 않은 마당 터가 사람으로 가득 했습니다.

색색의 옷을 입고 나와 원을 그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사람 서너 길은 되는 높은 깃발도 따라 뛰었습니다. 그런데 깃발에는 무슨 글씨가 씌어 있습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가 보고는 싶었지만 의복(衣服)이 너무 남루(襤褸)하고 머리와 수염이 길어서 공산괴뢰(共産傀儡)의 패잔병(敗殘兵)이나 수상한 사람으로 의심 받을까봐 겁이 났습니다.

 머리를 말아 위로 치켜 올리어, 밭에 있는 허수아비의 매꼬모자를 빌려 쓰고 가까이 가 봤습니다.

과연(果然) 마을 마당은 남녀노소(男女老少)가 함께 어울려, 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 지르고

날뛰는 광란(狂亂)의 축제(祝祭)!  그 향연(饗宴)의 자리였습니다.           

'아-----.' 올것이 기어코 왔구나!' 아버지의 눈에서는 두 줄기 굵은 눈물이 흘러 내렸습다. 

그 큰 깃발에는 아주 큰 글씨로,

"대한민국 만세.!"

"미군 만세.!"

"U.N군 만세.!"

"북한 공산 괴뢰군을 쳐부수자.!"

"이제는 북진(北進)이다.!'

아버지는 이 날이 오면 새 기운이 솟아나 몸이 펄펄 뛸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힘이 쪽 빠지며 맥 없이 허물어졌습니다. 샘 솟듯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한참 만에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 섰습니다.

능선(陵線)으로 올라 고향 마을을 향해 걸었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걷는 것이 아니라, 걸어지는 것이라고 생각 되었습니다. 아니 몸과 마음이 새털 처럼 가벼워져, 하늘의 구름 속을 유영(流泳)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착각(錯覺)이 들었습니다.

그간  몸과 마음에 깊숙히 박혔던 통한(痛恨)의 가시들을 다 털어 날려 버렸습니다.

'나 없이 고생 했을 가엾은 안해!'

'내가 사랑하는 불쌍한 아들과 딸!' 

'이제 만나면 다시는---,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아버지는 속 울음을 삼키시며, 밤낮을 계속 걸어 고향 마을로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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