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나든 나무 이야기-(7)―안산 단원고 잭슨 목련(A)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나는 지금 1960년대의 <6.25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니다. 2014.4.16일 이날의 상황을 시인은 <성 수요일의 참회>라는 노래로 절규했다. “ (전략) 2014.4.16 수요일/ 진도 앞바다가 뒤집혔다 /선장은 애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지시한 뒤 탈출했다/ 선원들도 앞 다퉈 배를 버렸다 ./구명정은 꽁꽁 묶여 있었다. // 아이들은 구명조끼를 입은 체 기다렸다 /476명중 304명이 수장되었다./ (중략) 뭍에서 3km밖에 안 되는 그곳에는 아무도아무도 없었다./헤아릴 수 없는 비극의 밑바닥에 못을 긁어 슬픔을 기록하는 사람도 없었다. 젖은 빵을 씹던 가롯 유다의 흔적조차도 그곳에는 없었다. (후략)” <시집. 달의 뒷면을 보다- 고두현>
그날 그 시간에 나는 아니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지고 있는 운동경기 중계하듯 한 생생한 화면을 가슴조이며 발을 동동거리며 보고만 있었다. 배가 가라앉고 생목숨이 사라진 원인을 책임져야할 사람들은 모두 “알키메데스의 원리”탓만 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유가족과 많은 사람들은 팽나무가 있는 나루터 팽목항(彭木港)에 모여 침묵만 남기고 소멸한 바다 쪽을 향해 손나발로 목이 찢어지랴 그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렸다. 부둣가에는 노란 리본만 “제발 무사히 살아 돌아오라”는 간절한 소원만 지닌 체 맹골수로를 향해 팔랑거리고만 있었다.
사고가 발생하고 여흘이 흘렀다. 온 국민들이 “그래도” “혹시나”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그 경황 속에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1박2일 일정으로 방한하게 된다. “나도 두 딸의 아버지다. 우리 딸도 나이가 희생자들과 비슷하다. 가족들의 심정이야-- ”며 벡악관에서 비행기에 함께 실고 온 목련 묘목 한 그루를 안산 단원고에 전하고. “이 목련 묘목은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분들에게 미국이 느끼는 깊은 연민의 징표이다”라고 하고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 그 신문 기사 나도 읽었다. 이 목련의 이름이 바로 <잭슨 목련Jackson Magnolia>이다.
내 자신이 연전에 생대(生竹) 같은 지식을 가슴에 묻은 선험자로 누구보다 유가족의 심정을 알기에 참아 이 마당에 안산고 그 <잭슨 목련>을 면회 갈 마음은 없었고 아무리 나무에 미친 사람이라도 당장 가서 확인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너무나 이기적인 것 같고 죄스러워서--,그러고 20여 달이 지난 뒤 더는 못 견뎌 지난 1월 말일 오바마 대통령이 가지고 온 그 목련을 만나려 카메라 챙기고 나섰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오이도 행. 안산 고잔역에서 내려 지도에서 확인한 안산 <단원고등학교>를 향해 뺌을 치는 듯 한 매운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단원(檀園)하면, 저 조선 후기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과 더불어 삼원(三園)의 한사람인 김홍도가 아닌가. 그가 ‘젖니 빠질 무렵’ 지금 이 고장 안산 땅에서 처가사리 하던 스승 표암(豹菴) 강세황의 문하에 들어 그림을 배우고, 그 덕에 화원이 되고 스승의 극찬을 받고 정조대왕의 어진까지 그린 덕에 벼슬을 하고 두터운 신임을 얻은 천재요 대가이란 걸 우리는 안다. 그림에 어두운 내 눈에도 그가 그린 수많은 풍속화, 예를 들자면 <대장간>, <길쌈>, <기와 잇기>, <타작>,<우물가>, <자리 짜기>, <서당>, <씨름>등등에 나오는 그 많은 인물들의 표정이 어느 하나 피곤하거나 슬픈 인상 없는 모두 행복한 얼굴을 그렸다. 그래서 안산은 마을이 편안해야하고 더구나 단의의 숨결어린 단원구는 행복한 시민이여야 하고, 단원 같은 걸출한 인물을 기리고 또한 그의 호를 딴 단원고등학교는 단원 같은 훌륭한 인물을 닮고 또 배우자는 뜻으로 학교 이름에도 <단원>자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무슨 아이러니 인가? 그림의 사람들 표정은 웃고 행복한데 세월이 지났지만 오늘의 단원 땅 사람들의 이 상실의 고통은-
드디어 작은 산자락에 기대선 우뚝한 건물 <단원고> 정문에 당도 했다. 이외로 정문 앞에는 어느 국가기관 경비실처럼 경비가 삼엄했다. 수위실 앞에서 내가 방문한 사유를 설명하고 학교 안으로 들어갈려 하니 안 된다 한다. 학부모도 꼭 확인해야 하고 더구나 나 같은 용무로 온 사람은 더 안 된다 한다. 곡절 끝에 경비 한사람 동행으로 저 오바마 대통령이 가지고 온 <잭슨 목련>에 가서 짧은 시간 내에 셔터만 두어 번 누르고 곧장 되돌아온다는 조건으로 나는 가슴 설레며 정문을 들어선다. 동행하던 경비아저씨가 바로 저것이다 고 가리키는 손끝의 나무 한그루, 정문에서 50m 안쪽 약간 경사진 길가에 겨울바람에 떨고 있는 가슴 높이의 나무 한그루가 거기 서 있었다. 아무런 안내판도 명찰도 없이-
나는 두 가지 틀린 상상을 하고 있었다. 첫째는 어린 묘목을 심은 지 2년도 안됐으니 우리주위 공원이나 관공서나 큰 건물 화단이나 뜰에 심은 나무들처럼 겨울 넘기려 잘 추려진 볏짚으로 온몸을 예술적이라 할 만큼 예쁘게 줄기를 애기 포대기 싸듯 잘 싸여 있을 거란 예측, 혹시라도 짚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줄기가지 또 올봄에 필 꽃눈을 보지 못할까 저어했었는데 그게 아니다. 또 한 가지는 서울의 공원 또는 내가 사는 아파트 화단 뜰에 살고 있는 목련들처럼 붓 같은 꽃눈에 솜털 달고 북쪽을 행해 봄을 기다리는 그런 모습의 상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잭슨 목련>은 상록수 이었다. 내 가슴 높이의 이 나무는 찬바람에도 고무나무 잎보다는 조금 좁은 가죽질 녹색 잎을 여러 장 달고 잎 바닥에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경비아저씨 말로는 작년에 하얀 꽃 한 송이가 맨 위 새순에서 피었단다.
나는 속으로 인사하고 멀리서, 가까이서, 위에서, 돌면서, 급히 삿터를 연속으로 누르고 타임아웃 ……,되돌아오면서 안내판 하나 없느냐 했더니 그냥 웃고 말더라. 경계가 심한 것은 돌아오지 않은 수학여행단의 그 많은 빈 교실을 유가족은 기억의 교실>로 그냥 비워두자 하고 학교와 재학생 부모들은 당장 새 학기 신입생을 맞아야 하는 데 교실은 부족하고 등등 의견 상충으로 충돌이 있을까하여 외부인들을 통제한단다. 그리고 경비아저씨가 덧붙이는 말씀 “미국 사람 무섭더라. “왜?” 그 나무 심어 논 후 몇 차례 생육상태를 점검 확인 하려 그 먼데서 온다는 것이다.
나는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나의 상식적인 목련의 예상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냥 그 나무 만나봤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왜 그 목련 이름이 오바마 대통령이 가져 온 것이니 <오바마 목련>이라 하지 않고 <잭슨 목련>이람?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1767-1845), 미국 독립전쟁 때 13세로 민병대에 입대한 아일랜드 이민자의 아들로, 출생 3개월 전 아버지가 사고사한 유복자로, 사실 전쟁 통에 그 어머니가 쫓겨 다니느라 출생지가 어딘지 정확하지 않다. 큰형을 전쟁에서 잃고 둘째형도 영국군 포로가 되어 잃었고 어머니도 코레라도 잃은 고아였다. 14살에 말안장 만드는 공장에 취직하여 틈틈이 공부했지만 정상적인 공부는 하지 못했다. 그는 거의 독학으로 법률공부를 해서 변호사가 됐고 서부 개척지로 옮겨가지만 인디언들의 습격으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다. 드디어 테네시 주 의원이 되어 승승장구 하지만 그의 일생은 파란만장의 연속 이였다.
1822년 대통령 후보로 4명의 출마자 중 최다득표를 얻었지만 과반수를 못 넘어 2차 투표에서 실패한다. 반대파들은 그를 jackass 즉‘ 수당나귀 또는 멍청이’라 놀렸지만 이 때 이 말이 지금 미국 정치의 양당구조 상징인 민주당 당나귀로 시작된다.
잭슨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로맨스도 그러하다. 21살 때 동갑네기인 대령의 딸, 레이첼과 뜨거운 사랑을 하고 3 년 만에 결혼한다. 그 후가 더 복잡하다. 레이체은 성격 고약한 전남편과 이혼한 경력이 있었던 데 그 때까지 서류정리가 안된 상태. 그래서 반대정파에서는 잭슨을 남의 부인을 빼앗은 파렴치한으로 몰았고 심지의 잭슨 어머니를 창녀출신이라고 비하했다. 그러나 레이첼과 살림을 차린 지 2년 뒤에서야 서류정리가 말끔히 정리 될 수 있었다. 정적들, 아내와 집안을 비난하는 자들과 무려13번의 결투를 했고 목숨을 잃을 뻔 한 위기도 있었다.
1828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 더 큰 인신공격을 받았으나 당선. 그러나 부인 레이첼은 안타깝게도 당선 3일 후, 취임 두 달 전, 선거전의 여러 가지 충격으로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그해 크리스마스 전날 장례를 치르게 된다. 부인 없이 잭슨은 백악관에 들어가 그야말로 이때까지 듣지 못했던 혁신정책을 편다. 비주류의 서부지역 서민출신으로 <통나무집에서 백악관에 주인>이 된 신화를 남기기도 하고 미국 건국초기의 제퍼슨 같은 대통령이 국가의 하드웨어를 구축했다면 잭슨은 소프트웨어의 기틀을 만든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지금의 미국 민주주의의 기틀이 되는 소위 <잭슨 민주주의> 초석을 놓은 사람. 대중 유세를 벌려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 저돌적 국정운영으로 독재자란 비난도 있었지만 미국역사에서 16대 링컨 대통령과 대등한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 된다. 그는 재선에서 승리 했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열 명의 자녀들과 살았다. 자녀들의 반은 처가 쪽의 불우한 어린이. 반은 고아들을 입양해서 키웠다. 백악관에서 아내가 그리울 때면 처음 백악관에 들어올 때 옛날 살던 집 뜰에서 아내와 같이 심고 같이 꽃을 즐기던 목련 한 그루를 백악관 서남쪽에 심어놓고 먼저 간 아내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