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학원 교실. 최근 몇 년 새 학생 수는 줄고 강사 수는 늘었다고 한다. photo 안준용 조선일보 기자 |
원장 이씨는 학원 회계장부를 펴서 보여줬다. “작년까지 대출금이 7000만원이었는데 올해 1000만원이 늘어났어요. 강사들 월급을 줘야 하는데 학생이 줄었으니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강사 김씨는 “월급이 겨우 200만원 넘는다”고 말했다. 이 원장의 학원은 중계동 학원가 한복판에 있다. 학생 수는 30~40명이지만 꾸준히 등록하는 ‘오래된 학생’들이다. 이씨는 “우리 학원 학생들이 다 친구 사이고 학부모들도 같은 그룹이라 흩어지지 않고 다니는 거지, 다른 학원 얘기를 들어보면 학생 유치 자체가 어려운 학원이 많다”고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원강사’라는 직업은 “사회적으로 좋은 평가는 못 받지만 돈은 많이 번다”고 얘기됐다. 고시나 유학 준비를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려 잠시 아르바이트 삼아 학원에 들르는 고학력 대졸자도 많았다. 그러나 “더 이상 만만하게 덤벼들 수 없는 시장이 학원강사 시장”이라는 것이 4년차 학원강사 정수민(32)씨의 이야기다. 정씨는 서울 서초구 반포동 한 수학학원에서 2년 넘게 강의를 하다 최근 고향인 부산으로 학원을 옮겼다. “지방에서는 돈 백만원이라도 더 벌 수 있고, 서울 명문대학을 나왔다는 게 조금이라도 더 돋보일 수 있으니까요.” 반포동 학원에 있을 때는 한 달에 250만원 남짓 벌었다. “낮 12시에 출근해 밤 10시까지 주 6일제로 꼬박 일하고, 시험 기간이면 잔업에, 평소에도 학생 관리 등 신경 쓰는 것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월급이죠.”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논술학원을 운영하는 원장 김모씨는 “강사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하지 마요, 학원강사’라고 조언한다”라고 말했다. “내가 학원 문을 열면서는 서울대 국문과, 서울대 법대 졸업한 사람들 찾아다니며 학원강사가 ‘사’자 직업보다 인정은 덜 받아도 돈은 많이 벌지 않느냐, 몇 년 일 열심히 해서 돈 벌어 유학가자, 이런 사탕발림 소리 많이 했어요. 요즘은 아니에요. 그나마 우리 학원 선생님들은 대치동에 있으니 입시철 돈을 왕창 벌 수 있죠. ‘평범한’ 동네에 있는 학원강사들은 일반 회사원보다 돈을 적게 벌 걸요?”
학원강사의 주가가 떨어진 원인은 학원강사 공급이 꾸준히 늘었기 때문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의 평생교육통계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전국 사설학원강사 수는 2만96명이었다. 수강생은 73만6877명이었으니 학생 36.7명당 강사 1명꼴이었다. 그러던 것이 2012년에는 강사 2만6045명, 수강생 47만7415명으로 학생 18.3명당 강사 1명이 됐다. 학생 수는 반토막으로 줄었는데 강사는 늘어났다. 이런 경향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고 청년 취업난이 가중되면서 더해졌다. 2009년까지 집계된 한국교육개발원의 4년제 대졸자 진출 분야 현황 통계를 보면, 인문계열 졸업자가 가장 많이 진출한 분야가 문리 및 어학 강사(11.8%)였다. 교육계열(17.4%)은 물론이고 자연계열에서도 가장 많은 졸업자(6.1%)가 문리 및 어학 강사, 즉 사교육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지난 2월까지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서 영어학원 강사로 일했던 김연화(30)씨는 이른바 ‘고스펙 대졸자’다.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베트남에서 살다가 귀국해 서울 명문 사립대를 졸업했다. 졸업 전 미국 뉴욕으로 1년간 어학연수를 다녀왔고 외국계 기업에서 인턴 활동을 하기도 했다. 토익 점수는 950점이 넘고 종종 아르바이트로 번역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씨는 취업 시장에서 “아주 평범한 구직자일 뿐”이었다고 한다. “이것저것 다 해봐도 도무지 취업이 안 되니 학원강사나 해보자고 생각했죠.” 문제는 김씨처럼 ‘해보자’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는 사실이다.
김씨의 첫 직장은 서울 송파구에 있는 보습학원이었다. “강사 구직 사이트가 있어요. 거기에 올라온 공고를 보고 지원했는데 면접 한 번 덜렁 보고 취직이 됐죠.” 처음에는 쉽게 취직됐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곧 문제가 생겼다. “알고 보니 그 학원은 3개월 단위로 공고가 올라오는 곳이더군요. 사람이 하도 많이 그만둬서요. 월급을 계속 미루면서 안 주고, 하루 8시간만 일해도 된다더니 12시간 넘게 잔업을 시키더라고요.”
시민단체 청년유니온이 지난해 12월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 시내 학원강사의 86%는 4대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고, 78.8%는 학원 측과 근로계약서를 아예 작성하지 않았다. 학원 측으로부터 임금을 받지 못한 적이 있다는 강사도 31.9%나 됐다. 지난해 10월과 12월에는 학원으로부터 퇴직금을 받지 못한 강사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하라는 법원의 판결이 나온 적도 있다. 서울고법 민사2부(부장판사 조해현)는 서울 대치동 한 논술학원에서 1~6년간 일한 강사 18명에게 퇴직금 총 1억20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에서는 ‘잘나가는’ 것으로 여겨지는 대치동 강사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이 가감 없이 공개되기도 했다. 강사 중 초등부나 중등부 강의를 맡은 강사에게는 월급이 늦게 지급되기도 했다. 주6일 근무에, 휴가는 1년에 3~4일에 불과했다. 연봉은 고정돼 있지 않아 학생 수에 따라 인센티브 형식으로 받았다.
이렇다 보니 요즘 들어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쉽사리 학원강사로 진입하지 않는 상황이다. 경기도 고양시를 중심으로 수학과목 개인과외 교습을 하는 박성훈(가명·35)씨는 사법고시 실패 이후 곧바로 개인과외 강사 시장에 뛰어들었다. “선배가 대치동 학원에서 오래 강의를 해서 일자리를 대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러면서도 ‘웬만하면 학원강사는 하지 마라’ ‘요즘 학원강사는 돈 못 번다’고 하더군요. 차라리 수강생 모집 압박 적고, 학원 망할 걱정 없는 개인과외 강사가 돼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씨처럼 개인과외 교습자로 등록한 사람은 점점 늘고 있어 서울시만 해도 2012년 기준으로 개인과외 교습자 신고를 한 사람은 1만5434명, 2009년보다 2500명 정도 늘어났다.
학원 시장도 예전 같지 않다. 지난 1월 신용보증기금에 따르면 학원의 부실률은 2010년 이후 지속적으로 높아지는 추세다. 경기지역만 두고 봤을 때 신용보증기금을 낀 대출금 잔액은 지난해 기준 157개 학원 103억원인데 이 중 62개 학원, 11억원이 부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17.6%의 학원이 부실하다는 얘기인데, 2011년 7.1%의 부실률에 비하면 2배 이상 상승했다. 박경실 한국학원총연합회 회장은 이에 대해 “학원 수가 늘어난 탓도 있지만 학생 수가 줄어든 것이 큰 원인”이라고 말했다. 실제 전국 중·고등학교 학생 수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중학생 수는 2009년 200만6972명에서, 2011년 191만572명, 2013년 180만4189명이 됐다. 초등학생 감소율은 더욱 가팔라 2009년에는 347만4395명이었는데 2011년 313만2477명, 2013년 278만4000명으로 20% 가까이 줄어들었다.
결국 학원강사 시장은 ‘레드오션’이라는 것이 업계 사람들의 말이다. 중계동의 학원 원장 이재현씨는 “학원도 평범한 자영업이 됐다”고 말했다. 자신도 학원 간에 건네지는 ‘학생 전화번호부’로 수강 권유 전화를 걸어본 적 있다고 한다. “학원도 빈익빈부익부가 심해지고 있어요. 강사가 마구잡이로 늘어나다 보니 개중에는 실력이 별로인 강사도 있잖아요. 그런 데 데인 학부모들이 대형 학원에만 아이들을 보내요. 대형 학원, 유명 강사는 점점 더 커지고 소규모 학원, 인기 없는 강사는 작은 파이를 두고 피 터지게 싸우죠.”
대치동 T수학 전문학원은 인근 학부모들에게 평가가 좋은 곳이다. 그런데 이 학원에서도 강사 A씨와 B(38)씨의 수입은 완전히 다르다. 대학입시를 전담하는 강사 A씨는 한 유명 온라인 학원 사이트에서 강의를 제안받을 정도로 유명하다. B씨에 따르면 A씨의 수입은 월 1000만원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B씨는 월 300만원을 채 벌지 못하고 있다. “강의 경력에서 차이가 난다고 자위하고는 있지만, 몇 년이 지나도 이대로일 것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학원강사로 성공할 기회가 있었는데, 요즘은 반짝스타마저도 없어지는 상황이에요.”
B씨의 조카 김민호씨는 지난 겨울방학 때 ‘수습’으로 강사 수업을 받았다가 곧 포기했다. “주6일, 11시간씩 일하는 6개월 수습 기간에는 75만원만 준대요. 수습이 끝나도 곧바로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막 학생을 모집하는 반을 맡게 되는데 학생이 2~3명일 수도 있대요. 그러면 100만원도 못 버는 거죠. 실력을 쌓고 기다리면 된다고 하던데, 어느 날 문득 길거리에 나섰다가 빼곡한 학원 간판을 보고 ‘질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많은 학원에 저 같은 사람이 더 많을 텐데’라는 생각과 함께 사표를 던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