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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왕경 꼬리를 붙잡고 사는 이유
원각성 이정숙(시인)님 글 옮김
1983년 가을, 용기를 내서 용화사 참선방에 방부를 드렸다. 시간 닿는 대로 1주일에 3일 만이라도 꾸준하리라는 다짐과 달리 몇 번 못가고 말았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거리도 문제였지만 남편의 사업을 돕는 입장에서 시간 지키며 참선하러 간다는 일이 여의치 않아서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남편은 온 가족이 집에서 참선을 해보자했다. 남편의 제안과 아이들의 동참이 고마워서 철저한 준비를 했다. 참선 방석을 준비하고, 참선 장소를 만들어서 아침 일찍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일 어렵긴 해도 가족 사랑이 농익는 멋진 수행이었다.
나는 이런 참선의 수행을 길지 않고 하루에 단 10분씩이라도 권하고 싶다. 해보면 안다. 가족간에 담을 쌓지 않고 ,마음을 열고 사는 방법으로는 그 이상 없다. 그리 오래 계속 되진 않았지만 불자가족임을 매일 다짐하면서 가족모두가 나란히 앉아서 참선하는 멋스러운 시간을 가져본 이 경험을 나는 보석처럼 생각하며 아끼고 산다.
사업이라는 것이 예나 제나 시간에 쫓기고, 의대생 아들이 병원에서 숙식하게 되고, 딸아이가 고3이 되면서 일주일에 두세 번으로 뜸해지다가, 일요일 아침으로 계속되다가, 끝내는 남편만 한 몇 년 계속했다. 그것마저도 남편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큰아들이 지금도 가끔씩 복잡한 걱정거리나 스트레스를 강하게 느낄 때 좌선을 하면 좀 개운해진다 할 때는 가슴깊이 참선의 싹이 크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다. 미래에 반드시 아들도 아빠처럼 좌선시간을 생활화 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스님 도저히 참선을 할 수가 없는데 어쩌지요? 남편과 아이들 사이에서 너무 힘들어요.“
언제나 송담스님은 인자하시다. 어린아이처럼 힘들어하는 내가 안되 보이시었던지 녹음테이프 하나를 주셨다.
“그럼 이걸 따라서 독송해 봐요. 고왕경이라는 건데, 보살님에겐 이것이 도움이 될 거요. 이 경을 독송하고 소원을 이룬 것은 물론 죽음에서 살아날 만큼 영험이 있다고 전해오는 경이랍니다. 근기에 따라야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테이프를 들으며 나는 행복했다. 스님의 맑은 저음으로 고왕경이 반복 녹음된 것인데, 특히 끝부분의 “고왕 관세음경...”하며 끝남을 알리는 시조가락의 음성은 그동안의 힘들었던 시간들을 스르르 녹아내리게 했다.
나는 고왕경에 동화되어 열심히 염하며 살았다. 자동차 속이 내 법당이었다. 고왕경의 영험이 체험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업상의 크고 작은 것의 성취는 물론 예지능력까지 따라 붙어서 어떤 결정의 가부간에 확신이 생겼다.
고왕경 말미에 ‘이 경을 수지 독송하면 고액에서 구제되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벗어날 수 있고, 쉬지 않고 천편을 외우면 뜨거운 불길에도 상하지 않고 전쟁에서 칼날도 비켜가며 애로도 기쁨으로 변하며 죽을 사람도 살아나니 거짓으로 여기지 말라, 부처님은 거짓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끝을 맺는다. 위의 해설이 정확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한문 실력으로 그렇게 풀이해 가며 꾸준히 독송했다.
그 무렵 나는 비로소 수지 독송이라는 의미를 알게 됐다. 그냥 지니고 읽으라는 소리가 아니다. 온몸이 경이 되고, 목소리도 경자체가 되고, 경속에 내가 녹아들어서 각 세포마다 경이 나오는 것을 느낄 만큼 독송하라는 뜻이다.
처음엔 경을 외는 것조차 힘들지만 계속하다 보면 염주알 꿰듯 좌르륵 좌르륵 염송된다. 마치 천수경이나 반야심경을 처음 만나서 쩔쩔매고 읽어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암송되던 때의 환희심의 연속이라 할까. 숨을 쉬고 있는지 경을 외고 있는지 어떤지를 모를 만큼 될 때, 비로소 수지 독송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몇 만 독을 했다는 숫자 놀음보다는 얼마나 지성을 했느냐가 공덕이다.
흰밥을 오래 먹으면 잡곡밥이 먹고 싶다고, 아주 작은일 하나가 고왕경 독송을 게을리 하게 만들었다.
88’올림픽이 끝나던 그 해에 제주도 천왕사에 시숙님과 바로 손위 동서와 기도를 하게 됐다. 절이라면 무조건 철야 기도를 낙으로 삼던 때라, 습관처럼 밤새워 고왕경을 고성으로 독송하느라고 새벽예불 시간도 잊었다. 목탁소리에 놀라서 음성을 줄였다. 아침 예불을 마치고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는데 기도스님이 오셔서 내게 말을 걸었다.
“보살님, 밤새워 고왕경 기도를 하시던데. 무슨 급한 일이 있으신지요?”
“아뇨, 큰스님께서 그냥 열심히 하라고 하셨어요. 7년째인가 봐요.”
“어느 절에 다니는데요?”
“인천에 있는 용화산데요.”
“그럼 송담 큰스님 계신데 아닙니까?“
“네, 맞아요.”
반가웠다. 제주도에서, 그것도 철야를 끝낸 기분 좋은 새벽에 용화사라는 말만 듣고도 큰스님을 아는 스님의 목소리는 마치 큰스님을 친견한 듯 반가웠다.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보살, 그러는 거 아닙니다. 어디서 송담 큰스님 소문을 들은 모양인데... 나도 용화사에서 몇 철났지만.. 큰스님께서 보살들에게 참선을 시킨다는 말은 들었어도, 고왕경을 시킨다는 말은 들어 본적이 없어요. 그렇게 큰스님을 팔고 다니면 부처님께 벌 받아요.”
“미쳤어요, 제가 왜 큰스님을 팔고 다녀요?”
스님에게 따지듯 반문했지만 스님은 아주 한심하고 기가 막힌 보살도 있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게다가 동행했던 동서조차도 곁에서 함께 새운 철야 기도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하는 것이다.
조금만 지혜로웠더라면 오히려 내 사정을 모르는 그 스님을 이해하고 고왕경 독송이 큰스님을 빌미삼는 비웃음거리 밖에 안되는 기도라는 생각은 안했을 것이다.
히지만 그날 이후 나는 고왕경 독송에 갈등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참선한다고 가부좌하는 날이 잦아졌다. 그러나 입에 붙은 고왕경은 참선 자세로 앉았어도 헛소리처럼 중얼 거려 졌다.
고왕경과 참선사이를 오락가락 하면서도 기도에 재미를 잃어갈 즈음, 어느 보살의 소개로 풍수를 잘 보시는 수월 큰스님을 친견하게 됐다. 스님은 말씀을 하시다가 문득 내게 물으셨다.
“보살은 어떤 기도를 주로 하는가?”
“고왕경을 몇 년째 계속하고 있는데요.”
아마 내가 송담 큰스님께서 숙제로 주셔서 고왕경을 한다고 했더라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지 모른다. 천왕사에서 야단맞은 후라서 그냥 생각없는 대답을 했지 싶다.
“그런 경을 그렇게 하면 모든 일이 그렇게 급박하게 돌아가지요. 그러지 말고 대다라니로 바꿔보세요. 큰 것을 얻으려면 큰 경을 해야지요.”
나는 그날로 고왕경을 내치고 말았다. 큰 것을 얻는다는 말에 욕심이 발동을 건 것이다.
우리 애들은 엄마는 귀가 얇아서 남의 말을 잘 듣는다고 흉을 본다. 누가 기도처가 영험하다면 달려 나가고, 건강식품이 좋다면 큰아들이 의사고 딸이 한의사인데, 말려도 듣지 않고, 사들이거나 만들어서 강제로 먹인다며 기가 막혀 한다. 내가 생각해도 그 부분은 한심하지만 양보가 안 된다. 송담스님이 근기에 맞도록 주신 고왕경에서, 큰 것을 얻으려면 신묘장구 대다라니로 바꾸라는 한마디에 여러 해 동안 수지 독송하던 경을 가차없이 밀어낸 것도 그런 내 성격의 장난이었다.
지금도 송담스님께 죄송하고 가족들에게도 미안하다. 그냥 계속했어야했다. 스님은 우리가족의 미래를 예견하시고 시킨 것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고왕경을 계속하는 동안은 남편의 사업이 힘들기는 했어도 별 탈 없이 잘 꾸려갔다. 그런데 서서히 사업이 힘들어지기 시작할 때도 나는 그것을 몰랐다. 부도가 난 다음 한참 지나서야 내가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다.
1992년 12월 22일. 대학입시 100일 기도가 끝나던 날 남편의 사업은 절대로 부도날 만큼의 상황은 아닌데 부도를 만났다.
그 해 정월부터 나는 기고만장이었다. 막내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서다. 어느 불자가 안 그럴까마는 나도 세 아이 모두 대학입시 전후 1년은 온몸과 마음을 다하여 기도를 한다. 5대 보궁은 물론 사리암, 4대 관음성지순례 방생에 이르기까지 할 수 있는 기도는 다했다.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염불을 하거나 경전을 보면서 거의 함께 했다. 아이들은 원하는 학교에 진학을 했다. 강남에 사무실이 있었으므로 출근길에 봉은사 판전에서 108배와 신묘장구 대다라니 독송 기도를 생활화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입시 100일 기도 입재 날이라고 프랑카드가 드리워 진 것을 보고, “그래, 나는 부처님의 가피로 세 아이 다 좋은 대학에 넣었으니 다른 집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자.”라는 마음이 일어났다.
평생 처음으로 불특정 다수를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스스로 부처님 앞에서 대견해 했다. 꼬박 하루도 빠지지 않고 100일을 채웠는데, 그것도 남을 위한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하필이면 100일기도 회향하는 그날 부도가 난 것이다.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주제넘게 남을 위해 기도한다며 부처님 앞에서 잘난 척 해서 벌 받은 것 같았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얄팍한지, 그날 이후 부처님은 커녕 봉은사로路라고 쓴 도로 표지판조차 외면하고 다녔다.
얼마 후 정신을 가다듬고야 고왕경을 놓아버린 잘못이 가슴을 후볐다. 내 근기를 챙겨주신 스님의 뜻을 알아차렸다. 1000배, 3000배 참회의 수행을 시작했지만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어 다시 고왕경을 잡았다. 아니 매달렸다. 큰 스님은 이런 고통이 있을 것임을 예견하시고 내게 주신 것도 모르고, 큰스님을 뵙고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로 갈등을 겪는 순간을 점검 받고 마음을 다잡았으면, 아마 그런 큰 파도는 넘어갔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쪽에서는 지금도 신묘장구 대다라니의 신통한 영험의 끔찍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100일 기도 끝의 발원은 항상 ‘이 도량에서 기도하는 엄마들의 모든 자녀들을 모두 원하는 대학에 합격 시켜 주시고, 아울러 저의 업장을 소멸시켜 주십시오.’ 였다.
부도가 업장의 소멸이었음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기도의 성취였음을 왜 몰랐을까. 나의 미련함은 항상 지나서야 알아차린다. 그래서 부끄럽고 괴롭다.
그러나 큰스님께서는 가끔씩 친견하게 되면 늘 그러신다. ‘부처님을 의심치 않고 다시 제자리에 와서 열심히 믿는 보살이 대견하다’라고, 그 한 말씀이 내가 가는 길에 지표가 되고 신심이 다짐되고 있음을 큰 스님은 아실지 모르실지 모르지만, 나는 이승에서 송담 큰스님을 친견할 수 있는 복이 있음을 부처님께 감사드리며 고왕경 꼬리를 놓지 않고 산다.
출처: 금강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 네이버카페 윤거사님글 다시 옮김
작성자 : 상방대광명
고왕경(高王經) 10회 송담스님
주소 : https://youtu.be/0Dz5TLVLj1I?si=_9oFUofs4O1U-j6P
첫댓글 고왕경(高王經) 10회 송담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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