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서가 출발한 이유를 담백하게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하층 관리들의 게으름이 숨겨져 있다. 진시황이 이사를 통해 통일 글꼴을 반포하긴 했지만 그건 개혁의 꿈에 사로잡힌 새로운 기득세력들의 생각일 뿐이다. 물론 그들의 정책은 엄했다. 하지만 엄한 정책일수록 하층민들의 적당한 대책은 더욱 번득이게 마련이다.
예서는 바로 그렇게 탄생했다. 그런데 일이 넘쳐나는 관리들에게는 좀더 재치 있는 처세술이 필요했다. 어떻게 하면 이 많은 죽간들을 조금이라도 빨리 해치울 수 있을까? 답은 간단했다. 빨리 쓰면 될 일이었다. 한자가 만들어지고 나서 단 한번도 시도된 적 없는 생각이었다. 그림을 휘저어 놓다니.
그림의 특성이 흐려지긴 했지만 한나라 때의 한자에는 여전히 상형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필획마다에는 손이 살아 있고, 발이 움직이고 있었다. 물방울은 또박또박해야 했고, 나무는 가지가 반듯해야 했다. 그래야 문자였다. 하지만 말단관리들은 다 귀찮았다. 그저 자신만 알아보면 그만이었다. 해서 필획을 이어버렸다. 매번 칠통에 붓을 꼬박꼬박 담가 찍기도 번거로웠다. 그런데 막상 획을 이어놓고 보니 그럴 듯했다. 알아보는 데도 크게 무리가 없어 보였다. 곁에서 바라보던 동료들이 한 마디씩 격려를 보탰을 것은 뻔한 일이다. 필획의 해체와 재구성, 피카소적인 전환이었다.
정리를 해보면 죽간 위의 흘림체는 관리들의 단순 기록이거나 사안의 대략을 메모해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필획들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예서의 견고함을 무너뜨리게 된 먹 자국이 되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유행이었다. 그리고 그 멋들어진 반항을 초(草)라고 불렀다. ‘초’라는 한자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풀잎의 이미지를 통해 붓의 자유로움을 드러내기에 딱 맞는 표현이었다. 조금의 어수선함이 용납되는 것이 바로 ‘초’의 세계였다. 훗날 나타난 초안(草案)이라는 말은 그래서 실수가 용납되는 공간이다.
[그림 1] 한나라 원제(元帝) 때 당시 유행하는 초서를 예서와 비교해둔 『급취편(急就篇)』『급취편』이란 ‘급하게 가는 글꼴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뜻이다. 왼쪽에 예서, 오른쪽에 초서를 배열해 놓았다.
하지만 ‘초’는 단순한 생략은 아니다. 공간에서의 필획의 흐름이란 깊은 생각으로 밑그림을 그려놓기 전에는 형태적으로 드러날 수 없다. 때문에 ‘초’는 어쩌면 생각에 가깝다. 물론 반복된 진지한 손놀림 역시 ‘초’를 가능케 하는 밑밥이다. 관리들의 속서나 서예가들의 법서 모두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때문에 ‘초’는 황실에까지 보급되어 황제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초’를 통해 흐트러진 한자는, 그러나 그 방종에 가까운 파격에 의해 스스로 고립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초가 널리 보급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훗날 예술로서의 새로운 영역을 열었던 글꼴로는 기억이 되겠지만 문자로서의 원초적 기능인 전달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필획의 난해함 때문에 혹시 전(傳)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달(達)은 거의 불가능해서 배달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현재 당시 초서의 글꼴을 실물로 볼 수 있는 자료는 둔황 등지에서 발견된 한나라 때의 죽간들이다. 이들 흘려진 글꼴들은, 학자들이 분류를 위해 ‘초서’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자세히 보면 볼수록 격식을 갖춘 예술로서의 초서체는 아니다.
죽간들 위의 흘림체는 기록의 편리를 위해 나름대로 틀을 갖춘 예서를 조금은 아무렇게나 움직인 필획의 결과물이다. 흔히 말하는 속서(俗書: 필요에 따른 생활 글씨)로, 필획의 운필 속에서 카타르시스의 감성을 자아내는 법서(法書: 예술적 자각을 근거로 의도된 글씨)와 별나게 달랐다. 죽간에 보이는 속서는 ‘혼’이라 부를 것조차 없어 보인다. 반면에 법서에는 미적 카타르시스를 찾아 나선 고뇌의 그림자가 어린다. 혼으로 썼기에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난삽하게 움직인 듯 보이는 필획들인지라 그놈이 그놈처럼 보이지만 내면에 담긴 세계관이 달랐다.
원래 이런 흘림들은 그저 초(草)라고만 불렀다. 그러나 [그림 2]에 소개한 한나라 죽간에서 보는 초서는 언제나 묘한 느낌을 준다. 얼마나 일이 많았으면 그 좁은 죽간의 공간에서조차 필획을 날리려 했을까? 차라리 경의가 느껴진다. 한자는 또박또박한 해서(楷書)가 있고, 흘려 쓴 행서와 초서로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죽간 위의 초서는 우리들의 상식이 틀렸음을 일러주고 있다.
[그림 2] 한나라 죽간에 보이는 초서체『급취편』이 모두 31장으로 되어 있어 훗날 장초(章草)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또 한나라 때의 장(章) 황제가 이들 글꼴의 기묘함을 칭찬하면서 ‘장초’라는 이름으로 변했다는 전설도 있다.
[그림 3] 비슷한 시기에 쓰인 초서의 달인 장지(張芝)의 초서체순수한 예술적 경지를 추구하며 장초(章草)와의 구별을 시도했기에 금초(今草)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