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사월
야들야들한 연록의 물결이 굼실굼실 굼틀대는 찬연한 사월의 중순이다. 약동과 소생으로 싱그러움이 넘쳐남에도 어느 시인의 말처럼 ‘잔인한 사월’이라는 표현이 합당한 걸까. 삼동설한 내내 잔뜩 웅크렸다가 새봄을 맞으며 꿈과 희망이 피어오르려는 지금 이 순간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맹랑한 분위기와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불안에서 탈출하고 싶다.
12층의 창가로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뜰에 지천으로 피어난 영산홍을 비롯해 수많은 수목에 돋아난 잎새와 우듬지 새순의 신비로운 색채는 조석으로 다른 자태로 둔갑한다. 게다가 거의 매일 오르내리는 등산로에 펼쳐진 연록의 향연은 시시각각 완연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해 오가는 이들의 얼이 빠질 정도로 장관인 작금이다. 그런가 하면 벌써 한낮의 등산은 햇살이 부담스러워 이른 아침에 등산에 나서도록 부추기고 있다. 그야말로 봄이 무르익으며 절정에 이른 양춘가절(陽春佳節)인데 가슴속엔 언제나 따스한 바람이 불어올까.
전생에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아마도 씻을 수 없는 원죄를 많이 저질렀던가보다. 그런 업보 때문에 현생에서 벌을 받는 걸까. 돌이켜 보니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커다란 죄를 짓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었던 적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나를 비롯해서 가족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변고가 자주 발생한다. 이는 분명 ‘전생에 지었던 악업에 대한 응보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오락가락 비틀거리다가 대처하지만 그럴 때마다 저기압을 피할 길이 없다.
나는 강골이 아니다. 그렇다고 편편약골도 아니다. 아내는 나보다 더 허약한지 병원을 자주 드나드는 편이다. 몇 해 전 쓸개(膽囊 : gallbladder) 절제 수술을 받으며 그게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주고받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게 아니었다. 지난 3월이었다. 한 해 걸러 의례적으로 받는 건강검진 결과 이상이 발견되어 며칠 전(4월 6일) 벼락 치듯이 유방상피내암(乳房上皮內癌 : carcinoma in situ(CIS) of breast : 제자리암) 수술을 받고 퇴원하여 집에서 가료중이다.
고희(古稀)의 중반을 넘어선 여인네가 부끄럽게 가슴 수술이라니 조금은 민망하고 생뚱맞지 싶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비록 가슴에 칼을 댔을지라도 영기암(零期癌)이란다. 그래서 후속적인 치료와 투약 처방이 따를지라도 부작용이 심한 항암치료는 비껴갈 수 있다는 주치의 설명에 뛸 듯이 기쁘고 위안이 되었다. 절절하게 빌고 또 빈다. 제발 다시는 아내가 다른 병으로 병원을 찾는 불상사가 없기를.
아내만 구차하게 병원에 줄을 대고 있는 게 아니다.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한 손주는 치아 부정교합(不正咬合 : malocclusion) 교정 시술 때문에 28개월간 교정 장치를 하고 있다가 어제(4월 15일) 떼어 냈다. 하지만 앞으로 몇 차례 더 병원을 찾아가 후속 치료와 조치가 필요하다. 한편 나는 뇌졸중(腦卒中 : stroke)에 관련된 약을 8년째 복용하는데다가 지난해 10월부터 시작된 치아 8개의 임플란트 시술이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는 고약한 상황에 처해있다. 이래저래 아름다운 봄날임에도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있는 듯한 현실이 답답하고 우중충하며 께름칙하다.
예로부터 비가 내린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했다. 부부의 연을 맺은 이후에 아내가 일생에 한 번 겪기도 끔찍한 이런저런 변고와 와병으로 모진 고초와 위기를 여러 차례 맞았지만 슬기롭게 잘 버티며 이겨냈다. 이들 역경과 시련을 딛고 일어서며 다져진 각고의 경험이 묘약이 되어 다시는 또 다른 위험이나 병고에서 자유롭기를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빈다. 그래서 앞으로의 삶이 건강하고 무탈하다면 여태까지의 변고나 신양(身恙)은 노년을 담보하기 위해 백신을 접종했던 것쯤으로 가볍게 여기고 지나갈 터인데.
칠흑 같은 어둠이 지나면 여명의 새벽이 밝아오는 것은 진리이다. 견디며 버티기 어려운 시련 또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지나갈 것이다. 이제 오만정이 떨어진 사월도 중반을 넘어섰다. 진득하게 며칠 지내면 신록의 계절인 싱그러운 5월의 문이 활짝 열리리라. 계절의 여왕 5월엔 잔뜩 짓눌렀던 어둠의 그림자를 훌훌 털고 일어서 가족 나들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심한 충격이 불가피했을 아내가 정상으로 돌아왔으면 더 바랄 게 없으련만 소원대로 빨리 이뤄질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럴지라도 그리 되도록 간원하면서 차분하게 내일을 기대하련다. 자고로 선인들이 이르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참뜻을 곱씹으면서 말이다.
한국수필, 2023년 7월호. 통권 341호, 2023년 7월 1일
(2023년 4월 16일 일요일)
첫댓글 사월에는 가족 모두가
병원을 오갔군요.
치아 치료는 관리 잘 받으면 건강한 치아로 탈바꿈 하지만 사모님 건강에 관심을 기울려야 겠네요. 허나 이도 의학기술이 발달한 만큼 쾌유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교수님 가족 모두 건강하셔 흰 구름
넘실대는 사월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