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이 인간의 마지막 사슬인 죽음을 뚫고 나오셨기에 저희가 이토록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주님으로 모시고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게 하소서. 더 이상 저희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당신의 영광만을 위해 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기도지향
실직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님,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그들이 실망하지 않고 빠른 시일내에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를 찾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오늘의 말씀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루카 17,11-19 또는 마태 25,31-40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끝기도를 바칠 때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나?’ 하고 되돌아봅니다. 어떤 일은 ‘참 잘했구나.’ 하고 미소를 짓고, 어떤 일은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늘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생각보다는 제 생각이 더 커질 때가 많습니다. 필요할 때만 하느님을 찾는 것은 아닌지 반성합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천사의 안내로 하늘 창고를 구경했습니다. 그러고는 한 창고를 보게 되었는데, 안이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왜 창고가 비어 있는 거죠?” 천사가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곳은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줄 보화가 가득했던 창고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느라 보화가 가득한 창고가 텅 비워지게 된 것입니다.” 천사와 그 사람은 또 다른 하늘 창고를 구경했습니다. 그 창고는 아까 본 창고와는 반대로 안에 보화가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이곳은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줄 보화가 있는 창고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너무 적어 아직도 이렇게 보화가 쌓여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루를 살아가면서 감사할 일이 많음에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돌아온 이는 오직 한 사람,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왜 이방인 한 사람만 찾아왔을까요? 축복의 선물을 받았으면 마땅히 감사드리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요? 그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버릴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빛을 잃어갑니다.
우리 삶, 그리고 우리 삶의 자리, 오늘 하루, 온통 감사할 것투성이입니다.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얼마나 감사드리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감사는 고사하고 내 뜻,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느님께 불평·불만만 늘어놓은 것은 아닌지요. 제1독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들어라. 그리고 깨달아라.”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 두 손 모아 감사기도를 해보십시오.
김수만 신부(광주대교구 비아동천주교회)
죽음을 대면하는 것
스즈키히데코
현대는 죽음을 대면하지 않고도 지낼 수 있는 시대입니다. 본인이 바라지 않는다면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죽음을 보지 않고도 지낼 수 있습니다. 위중한 병에 걸린 사람은 병원에 입원하고, 죽음의 막바지에 이른 사람은 호스피스 시설에 들어갑니다. 병든 사람이 그런 곳에 들어가 있으면 가까운 친척이라도 그들과 격리되어 있으므로 죽음에 대한 번민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죽음을 직접 바라보는 기회가 없다면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도 살 수 있습니다. 마치 죽음은 자기와는 관계가 없는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죽음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데도 일부러 죽음을 무시하려 한다면, 결과적으로 마음의 깊은 곳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 크게 됩니다.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 그렇게 ‘멀리 있는 것’으로 만들어 두고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기만 한다면 죽음은 오직 두려울 뿐입니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