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의 존엄성 유지하며 성사 생활 어려움 겪는 신자 도와
김효석 신부(서울대교구 교구장 사법대리)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교회 최상의 법정신을 강조면서, 고통받는 신자들을 위해 여러 제도적 개선책을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교회가 보다 더 깊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고, 신자들이 겪는 마음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의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혼 후 재혼 신자들 위한 배려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 중 많은 이들이 안타깝게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부부 당사자들 사이에 벌어진 불화와 갈등으로 인해 혼인이 파경을 맞게 되어 국가법적 이혼 절차를 밟고 있다. 더욱이 이혼 후 재혼하려는 가톨릭 신자들은 전 혼인 유대의 무효성을 증명하기 위해 교회법에 따른 혼인 무효 소송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
가톨릭 교회의 혼인 무효 소송은 국가법적 이혼 소송이나 혼인 취소 소송과는 달리 혼인이 맺어질 당시 두 당사자의 혼인 합의가 유효하고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를 다루게 된다. 교회는 이 소송 절차를 진행하면서 무효한 혼인을 맺은 당사자들을 혼인의 유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면서도 동시에 혼인의 존엄성과 성사성을 지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소송 절차가 복잡해서 확정판결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성사 생활과 새로운 혼인을 맺는 데에 여러 불편함을 초래했다.
이러한 어려움에 직면한 신자들에게 보다 신속한 판결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교황은 지난 1년간 교회법 전문가들을 소집해 특별위원회를 구성, 혼인 무효 소송 간소화 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마침내 2015년 9월 8일 교황은 보편 교회를 위한 입법권자로서 교회의 혼인 무효 소송과 관련된 보편 교회법을 개정하는 두 개의 자의 교서(Motu proprio)를 발표했다.
교황님은 이 교서 내용이 혼인의 무효화를 조장하거나 혼인의 존엄성을 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다만 혼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자들을 위해 혼인 무효 소송을 신속하게 진행하는 방안을 찾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가톨릭 교회의 혼인관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아니며, 혼인 유대의 견고함이 약화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개정된 법이 담고 있는 핵심적 사항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이번 개정이 있기 전에는 혼인 무효 소송을 제기했던 각 교구의 1심 법원에서 무효 판결을 받은 경우에는 반드시 2심 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1심 법원의 재판관이 혼인 무효성에 대한 윤리적 확실성을 가질 만큼 명백한 경우에는 재심을 받아야 하는 절차를 생략할 수 있게 되었다.
혼인 소송 비용도 과도하지 않게
하지만 이 경우에도 1심 판결에 대해 불복하는 당사자는 2심 법원에 상소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으며, 무효 사실이 명백하지 않은 경우나 양편 당사자가 혼인의 무효성에 대해 상이한 견해를 갖고 있다면 보다 긴 심리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한국 교회에서 2심 절차가 생략될 수 있는 경우라면 기존의 판결 기간이 약 1~2개월 단축될 것으로 예상한다.
두 번째로 개별 교회의 사법권자인 교구장 주교는 혼인 무효에 대한 근거가 명백히 드러났다고 판단하면, 이 소송 사건을 재판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보다 간소한 절차로 직접 판결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혼인 무효 소송 절차를 생략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증거의 수집이나 증언을 듣는데 걸리는 시간을 절약해 빠른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세 번째는 혼인 소송 비용에 관한 것이다. 교황은 교회의 성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상의 선물이며, 혼인 무효 소송도 혼인 성사와 관련된 것이기에 대가를 받아선 안 된다고 강조하며, 소송 비용의 과도함을 없애도록 입법했다. 한국 교회의 경우 소송 절차 대부분은 성직자들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비용을 지불하도록 안내하고 있으며, 이마저 낼 수 없는 이들을 위해서는 전혀 비용을 받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주교회의와 실무를 맡은 사제들의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한다.
보편 교회 안에서 개정된 법률의 효력은 자비의 해가 시작되는 2015년 12월 8일부터 발생하지만, 한국 교회에서 이 법률이 적용되는 시점은 주교회의와 실무자들이 실질적 준비를 마친 다음에 가능할 것으로 전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