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트루먼 최초 최후의 만남! 이현표 1954년 8월5일 오전 9시56분, 李承晩 대통령 일행은 미 공군기편으로 미주리 주 캔자스 시티에 도착했다. 트루먼 전 대통령을 만나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공항에는 미국 측 인사들 이외에 캔자스 리븐워스 소재 육군참모대학에 다니는 우리나라 장교단도 마중을 나왔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 1954년 8월, 당시 은퇴 후 고향인 미주리州 인디펜던스의 자택에서 살고 있던 트루먼 전 대통령을 방문하여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다. 李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트루먼 부인 베스 트루먼의 모습도 보인다. 대통령 일행은 미국 국무부가 제공해 준 5대의 차량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인디펜던스 시로 출발했다. 트루먼은 고향인 그곳에서 요양 중이었다. 트루먼 내외가 흰색 저택의 현관 앞으로 나와 일행을 맞아 줬다. 저택 앞 길거리에서 약 500명의 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李 대통령이 트루먼에게 말했다. “참으로 반갑습니다. 나는 귀하가 미군을 파병해 우리가 생존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위대한 결정을 해준 귀하에게 나와 한국 국민의 변치 않는 감사를 표합니다. 귀하의 결정은 우리 국민의 사기를 북돋아 줬고,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을 싸워 물리칠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한국인 모두가 이를 고마워하고 있으며, 귀하를 비롯한 미국 국민이 이러한 감사의 뜻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트루먼의 저택 안에서 간단히 환담한 후, 밖으로 나온 李 대통령은 집 앞에 모인 군중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 세계를 자기네 통치하에 놓기 위해 밤낮없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을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가정에서 그들과 투쟁해야 합니다.” 이어서 李承晩 대통령은 옆에 있는 트루먼에게 뼈있는 작별인사를 건넸다. “나는 1950년 비오는 날 깜깜한 새벽에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를 침략한 것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그때 나는 기도했고,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싸우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注-6.25 남침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한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이것이 최초요 최후였다. 트루먼은 한국에 온 적이 없다.
1957년 여름 미국 캔사스 대학교 대학원에 유학중이던 韓鍾愚씨(뒤에 동양통신 전무, 코리아 헤랄드 사장, 국민대학교 이사장 역임, 전 省谷언론재단 이사장, 작고)는 3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켄사스 시티에 있는 연방은행 건물 내 트루먼 前 대통령 사무실을 찾아갔다. 트루먼의 고향은 근처인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였다. 아직 기념 도서관이 서기 전이라 캔사스 시티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학생들은, 백악관 시절부터 비서로 일했던 할머니가 안내하여 트루먼 집무실로 들어갔다. 학생들이 도열하여 인사를 하니 트루먼 대통령은 일어나서 학생들을 쭉 훑어보다가 한종우 씨 앞에 섰다.
'어디서 왔어요?' 韓 씨는 트루먼이 자신을 일본 학생으로 생각하는 듯하였다.
"각하,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트루먼 전 대통령은 자신의 파병 결단으로 살아난 나라에서 온 젊은이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듯, 반갑게 손을 잡고 앞으로 끌었다. 책상 위에 놓인, 자개로 만든 담배 상자를 가리키면서 자랑하듯이 말했다. "이건 貴國의 李承晩 대통령이 나에게 준 겁니다."
그리곤 기념 사진을 찍었다.
자개 담배 상자는 아마도 1954년 8월5일 李承晩 대통령이 트루먼의 자택을 방문하였을 때 선물한 것으로 추정된다(아래 기사 참조).
' 이승만과 트루먼: 최초 최후의 만남(이현표)
1954년 8월5일 오전 9시56분, 李承晩 대통령 일행은 미 공군기편으로 미주리 주 캔자스 시티에 도착했다. 트루먼 전 대통령을 만나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공항에는 미국 측 인사들 이외에 캔자스 리븐워스 소재 육군참모대학에 다니는 우리나라 장교단도 마중을 나왔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 1954년 8월, 당시 은퇴 후 고향인 미주리州 인디펜던스의 자택에서 살고 있던 트루먼 전 대통령을 방문하여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다. 李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트루먼 부인 베스 트루먼의 모습도 보인다.
대통령 일행은 미국 국무부가 제공해 준 5대의 차량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인디펜던스 시로 출발했다. 트루먼은 고향인 그곳에서 요양 중이었다. 트루먼 내외가 흰색 저택의 현관 앞으로 나와 일행을 맞아 줬다. 저택 앞 길거리에서 약 500명의 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李 대통령이 트루먼에게 말했다. “참으로 반갑습니다. 나는 귀하가 미군을 파병해 우리가 생존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위대한 결정을 해준 귀하에게 나와 한국 국민의 변치 않는 감사를 표합니다. 귀하의 결정은 우리 국민의 사기를 북돋아 줬고,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을 싸워 물리칠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한국인 모두가 이를 고마워하고 있으며, 귀하를 비롯한 미국 국민이 이러한 감사의 뜻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트루먼의 저택 안에서 간단히 환담한 후, 밖으로 나온 李 대통령은 집 앞에 모인 군중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 세계를 자기네 통치하에 놓기 위해 밤낮없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을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가정에서 그들과 투쟁해야 합니다.” 이어서 李承晩 대통령은 옆에 있는 트루먼에게 뼈있는 작별인사를 건넸다. “나는 1950년 비오는 날 깜깜한 새벽에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를 침략한 것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그때 나는 기도했고,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싸우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注-6.25 남침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한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이것이 최초요 최후였다. 트루먼은 한국에 온 적이 없다. ,,,,,,,,,,,,,,,,,,,,,,,,,,,,,,,,,,,,,,,,,,,,,,,,,,,,,,,,,,,,,,,,,,,,,,,,,,,,,, 트루먼이 김종필에게: '국민은 호랑이, 정치인은 사육사.'
트루먼 대통령은 참전 결정으로 한국을 구했지만 擴戰을 거부하고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통일을 막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요사이 학자들의 거의 일치된 견해는 트루먼의 擴戰 거부가 정당했다는 것이다. 맥아더는 ‘전쟁에선 승리를 대체할 것이 없다“고 했지만 트루먼은 ”전쟁에서 승리의 대체물이 있다. 그것은 평화이다“고 말했다. 1953년의 휴전은 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작품이었다. 이렇게 얻은 평화의 시기에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위대한 지도자, 韓美동맹, 그리고 우수한 민족적 자질을 살려 북한정권을 압도하는 경제적, 정치적 성장을 이룩하였다. 한국은 의지만 있으면 자유통일을 할 수 있는 高地에 올라섰다. 트루먼의 참전 결단, 그리고 한국포기 거부 결단 덕분에 가능했던 번영이다. 6.25 전쟁에서 미국과 한국이 손잡고 국제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함으로써 자유세계는 많은 것을 얻었다. 일본과 독일의 부흥과 재무장, 대만의 보호, 미국의 본격적인 군비증강 등등. 冷戰이 자유세계의 승리로 끝난 뒤 학자들은 6.25 전쟁의 의미와 트루먼의 역할을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트루먼이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반열에 오르는 가장 큰 이유도 한국전쟁에 대한 지휘를 올바르게 했다는 점 덕분이다.
1953년 1월15일 트루먼은 퇴임 직전의 작별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나의 재임기간에 대해서 冷戰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 그림자를 드리운 시기라고 기억할 것입니다. 하루도 이런 전면적 투쟁으로 영향을 받지 않고 지낸 날이 없었습니다. 그 배후엔 항상 원자폭탄이란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나의 재임기간을 냉전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이 8년간 그 冷戰을 이길 수 있는 進路가 설정되었다는 점을 인정할 것입니다.> 트루먼은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정확하게 규정한 셈이다. 레이건에 의해서 冷戰이 자유세계의 승리로 끝나자 역사가들은 냉전 승리의 전략은 트루먼이 만든 것이란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마셜 플랜에 의한 유럽 부흥,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의한 집단안보, 트루먼 닥트린에 의한 反共정책, 그리고 한국참전 결정은 냉전승리의 씨앗이었다. 레이건이 성공적인 秋收를 함으로써 트루먼의 위상이 높아진 셈이다.
고졸 학력밖에 없는 트루먼은 ‘위대한 성격’으로써 미국 역사상 최고의 국무장관(딘 애치슨)과 국방장관(조지 마셜)을 부렸다. 애치슨은 트루먼을 ‘보스’ ‘강력한 심장을 가진 대장’이라고 불렀다. 마셜은 ‘트루먼의 용기 있는 결단보다도 그의 인간됨이 더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평했다. 트루먼은 퇴임 후 고향인 미조리주 인디펜던스에 돌아가 도서관을 짓고 회고록을 쓰면서 바쁜 여생을 보냈다. 현실 정치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여가수 마리아 칼라스의 독창회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그가 나를 알아보더군”이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트루먼은 88세이던 1972년 12월 26일에 죽었고, 이틀 뒤 고향의 도서관 마당에 묻혔다. 그의 부인은 10년을 더 살았다. 트루먼은 한국인을 만나면 유달리 따뜻하게 대했다. 유학중인 장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위로해주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공화당 의장을 그만둔 金鍾泌씨가 ‘他意半自意半’의 외유를 하던중 트루먼의 집을 찾아갔던 적이 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金씨에게 “내가 한국을 통일시켜드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트루먼은 영국을 원망했다고 한다. 트루먼은 金씨에게 “국민은 호랑이이고 정치인은 사육사이다”고 말했다. “사육사가 호랑이에게 밥을 잘 주고 하니 호랑이도 감사할 줄 알고 안심하고 있다간 잡혀 먹히는 수가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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