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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릉과 현진건의 『단군성적순례』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12)
기자명 이양재
2022.04.25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제10회 연재에서 다룬
김재원 박사의
『단군신화의 신연구』(1947년, 정음사 발행)에서 다룬
「무씨사 화상석」의 주인공 4인에 대하여 보충 언급하고자 한다.
즉 무량(武梁)과 동생 무개명(武開明) 형제,
그리고 무량의 조카이자
무개명의 아들 무반(武斑)과 무영(武榮) 형제이다.
이들 무씨 일족은 상(商, BC 1600~BC 1046, 殷)나라의
제22대 왕 무정(武丁, 재위 BC 1250~BC 1192)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상나라는 제29대 왕까지 배출하였다.
무씨사의 건축 시기는
후한말(後漢末) 환제(桓帝) 건화(建和) 원년(147)에서
영제(靈帝) 시기 168년쯤 사이로 추정되므로
상나라가 망한 BC 1046년으로부터 대략 1200년 정도 후이다.
13회 연재에서는 상나라와 기자(箕子)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그에 앞서 이번 12회에서는 단군릉에 대하여 다루고자 한다.
(10) 단군릉(檀君陵)과 현진건의 『단군성적순례(檀君聖跡巡禮)』
제9회 연재 “우리 민족의 창세기
『삼국유사』”에서 단군릉을 짧게 언급한 바 있다
. 즉, 북한은 “1993년 10월 ‘단군릉발굴보고’를 통하여
단군이 5,011년 전의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보고에 의하면 이곳에서
"두 사람분의 유골 86개와
금동왕관 앞면의 세움장식, 돌림띠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라고 한다. (중략)
1993년에 5011년 전이면 BC 3018년을 말하는데
단군릉 출토 유골은 황제 헌원(黃帝軒轅, 중국 주장 ; BC 2717~2599) 보다도
400년 정도 이전의 유골이 되는 것이고,
BC 3018년이면 단군 기원에서 685년전이다.”
1996년쯤인가에 필자는 천리안에
“이양재의 미술에세이”를 50여편 연재한 적이 있다.
지금은 원고가 천리안에도 내 컴퓨터에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 연재에서 단군릉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다.
나는 그 글에서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의 『단군성적순례』를 소개하였는데,
그 골자는 지금도 기억한다.
가. 단군릉 발굴과 단군의 재조명
『개건한 단군릉』, [사진제공 - 이양재]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이 단군릉을 발굴한 1993년도 이전에는
단군릉의 실체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단군릉을 발굴하자 한 쌍 남녀의 유골 86개와
약간의 유물이 출토됨으로 해서 단군릉의 실체를 인정하게 되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의하여
단군릉을 대박산 정상으로 이전하여
1994년 10월 11일 자에 대규모로 개건(改建)하였다.
현재 단군릉의 면적은 1.8㎢이고,
피라미드형으로 화강석 1,994개를 다듬어 9층으로 쌓아 올렸다.
높이는 22m, 너비는 50m에 달한다.
단군릉의 개건은 한때 남측의 보수파의 반공 거두였던 안호상 박사가
1995년 4월 11일 정부 승인 없이 북한 방문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개건후 북한은 단군릉을 국보 제174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지금의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정상에 있는 단군릉은
본시는 대박산 기슭에 있던 것을 옮겨
개건(改建)한 고조선 시조 단군의 릉이다.
개건한 규모는
면적이 1.8㎢이고
, 피라미드형으로 화강석 1,994개를 다듬어
높이 22m로 넓이 50m로 쌓아 올렸다.
북한은 1993년 10월에
‘단군릉발굴보고’를 통하여
이 지역에서 두 사람 분의 유골 86개가 발견되었는데
감정 결과 하나는 남자, 다른 하나는 여자의 것으로 확인되었고,
남자의 뼈를 ‘전자상자성공명법(電子常磁性共鳴法)’을 적용해
2개의 전문연구기관에서
현대적 측정기구로 각각 24회, 30회씩 측정한 결과
그 연대가 5,011년전의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단군릉 발굴 유골』, [사진제공 - 이양재]
유골을 검사한 북측 과학자들은
단군의 출생 연대가 5011±267년(1993년 기준)이라고 발표했다.
연대 측정의 정밀을 기하기 위해 두 연구기관이
‘전자상자성공명 연대측정방법’을 사용하여
6개월에 걸쳐 각각 54회의 측정을 했다.
이 경우의 측정 연대는 무덤에 묻힌 사람의 출생 연대이다.
또한 단군의 키를 다리뼈로 추정하면 171.3cm,
팔뼈로 추정하면 173.2cm로
최소한 키가 170cm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키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체구였으며,
사망할 때의 나이는 70세 가량이었다고 했다.
또 단군은 허리가 곧바른 체형의 소유자였으며
같이 묻힌 부인은 젊은 여성이라고 했다.
이북에서 단군릉이 발굴되고
이남에 보도되자
남측 학계에서는 단군릉은 날조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우세하였다.
그러한 시점에 필자가
천리안에 미술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단군릉의 실재에 접근한 것이다.
단군릉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세종실록』 154권, 「지리지(地理志)」
평안도 평양부 강동현 (平安道 平壤府 江東縣) 조의 끝부분에
“大塚在縣北二十里都麿山, 周回四百十尺⃚。(諺傳皇帝墓)”라고 하였는데.
즉 “대총(大塚)이 현(縣) 북쪽 20리의 도마산(都麿山)에 있는데,
둘레가 4백 10척이다.”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총(大塚)이 곧 단군릉이다.
또한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1786년) 8월 9일 기유 첫 번째 기사에 의하면
승지 서형수(徐瀅修)가 정조에게 아뢰어
단군의 묘소를 수리하고 무덤을 수호할 호(戶)구를 두게 하였다.
이 시기에 단군묘에 비가 세워진 것 같다.
조선시대에 단군은 산신(山神)이 되었다고 신앙되고 있었다.
따라서 『순종실록』 3권,
순종 2년(1909년) 1월 31일 양력 4번째 기사에
“聞衣履之藏, 在江東地, 至今指點謂檀君陵, 而無沒不治,
殊欠崇奉之禮。其自今封植守護之節, 磨鍊擧行.”라고 하였으니,
즉 “듣건대 의복과 신발은 강동(江東)에 보관하고 있으며
지금 그것을 가리켜 단군릉(檀君陵)이라고 하는데,
잡초가 우거진 채로 거두지 않고 있다고 하니 높이 받드는 예차가 전혀 없다.
이제부터 관리하고 수호하는 절차를 마련하여 거행하도록 하라.”라고 한 것이다.
이를 보면
단군은 산신(山神), 또는 신선(神仙)이 되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단군릉을
의복과 신발을 보관하던 대총이었던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단군묘가 단군릉으로 명칭 승격이 된 시기는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1900년) 1월 29일
양력 5번째 기사에 나와 있다.
의관(議官) 백호섭(白虎燮)이
단군묘를 단군릉으로 승봉(承奉)하도록 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고종에 의하여 받아들여진다.
이후 실록에는 단군릉이라고 표기한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단군릉의 보존과 보호를 위한 자성(自省) 운동이 일어난다.
나. 소설가 빙허 현진건의 『단군성적순례(檀君聖跡巡禮)』
『단군성적순례(檀君聖跡巡禮)』 제4회 연재분, 1932년 8월 1일자 「동아일보」 1면.
Ⓒ필자. [사진제공 - 이양재]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현진건은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단군의 성적을 찾아 순례하였고,
그 여정을 『단군성적순례』라는 제목하에 1932년 7월 29일부터
11월 9일까지 51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다
. 『단군성적순례』는 해방후인 1948년에
예문각(藝文閣)에서 단행본으로 초판본을 발행하였고,
이후 이 책은 단군 유적 연구의 기본서가 된다.
필자는 당시 동아일보 1932년 8월분과 예문각 발행본을 소장하고 있다.
통일뉴스 연재를 위하여
이 원고를 쓰는 중에 며칠을 틈틈이 뒤져도
단행본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 찾아내기가 어려워
단행본의 사진 소개는 후일로 미룬다.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 빙허 현진건은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에서 태어났는데,
그 인근에 그의 기념관을 대구광역시가 나서서 설립해 주기를 희망한다.
독립운동가이기도 한 소설가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은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다.
그의 집안은 한말에 득세한 개화파 집안으로서
, 대구 우체국장이었던 현경운(玄炅運)의 4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이순득(李順得)과 혼인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세이조중학(成城中學) 4학년을 다니다가 중퇴하고
1918년 상해에 있는 형 현정건(玄鼎健)을 찾아가
호강대학(滬江大學)에서 수학하였다.
홍사용(洪思容)·이상화(李相和)·나도향(羅稻香)·박종화(朴鍾和) 등과 함께
≪백조(白潮≫ 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였다.
1922년에는 동명사(東明社)에 입사,
1925년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동아일보사로 옮겼다.
현진건은
동아일보사가 단군입론(檀君立論)에 앞장서는 한편
단군릉수축운동에 참여하면서 기획한
단군성적순례(檀君聖跡巡禮)를 사회부장으로 취재에 나섰다.
제1차 취재는
1932년 7월 8일부터 22일까지
묘향산·평양·강동·강서·구월산 등지에 걸쳐 이루어졌고,
제2차 취재는
1932년 10월 23일 강화도일대에 걸쳐 이루어졌다
. 그 결과 『단군성적순례』는 1932년 7월 29일부터
11월 9일까지 51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순례길에 오른 빙허 현진건은
우선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에서
수(隨)나라의 백만 대군을 무찌른 612년의 살수대첩 감회에 젖은 것도 잠시,
세 토막 난 채 흩어져 있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석상을 보고는
너무나도 무참한 현실에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이어 묘향산에 있는 단군굴(檀君窟)을 찾은 빙허는
단군의 위패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들에게 남겨주신 위대하고 찬란한 문화적 유업이 잘 보존되기는커녕
조락한 채 버려져 있는 사실에 대해 몸 둘 바를 모른다
. 빙허는
“무슨 낯으로 무슨 염의로 무슨 주제로 여기 왔는고”라며 자책한다.
빙허는 행보를
대박산(大朴山)에 있는 단군릉(檀君陵),
구월산(九月山)에 있는 단군대(檀君臺),
마니산(摩尼山)에 있는 제천단(祭天壇)으로 이어질 때마다
송구스럽고 한탄스러움은 그 도를 더해 간다.
빙허는
평소 민족의 현실에 눈을 돌린 민족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많이 발표해왔다.
취재 당시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1932년 6월 10일 출옥한
형 현정건(玄鼎健)을 병석에 눕혀놓고 순례길에 올랐기 때문인지
단군을 흠모하고 국토를 아끼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빙허는 1936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 당시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인하여 구속되었다.
1937년에는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으며,
빈궁 속에서도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다가
1943년 4월 25일 4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는 장편과 단편 20여 편과 7편의 번역소설,
그리고 여러 편의 수필과 비평문 등을 남겼다.
1932년 7월 29일부터
11월 9일까지 51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빙허 현진건의 『단군성적순례』는
해방후인 1948년에 예문각(藝文閣)에서 단행본으로 초판본을 발행하였고,
단군 유적 연구의 기본서가 되었다.
다. 춘원 이광수의 「단군릉」 기행문
『단군상(반신상)』, 조선화(북). [사진제공 - 이양재]
필자는 이 초상을 북의 조선화가 ‘엄도명’이 그린 것으로 알고 있다
. 단군릉에는 전신상(全身像)이 모셔져 있다.
파인 김동환(金東煥, 1901~?)이 발행한 잡지
『삼천리』 제8권 제4호(1936년 4월 1일 발행)에
춘원 이광수(李光洙, 1892~1950)가
동아일보사 사장 인촌 김성수(金性洙, 1891~1955)와
「단군릉」을 찾은 기행문이 게재되었다.
그 기행문을 소개한다.
“벌서 여러해 전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나는 김성수(金性業) 군(君)과 단 둘이
강동(江東)의 단군릉(檀君陵)을 봉심(奉審)하랴고
자동차로 평양(平壤)을 떠났습니다. ‥‥‥ (중략) ‥‥‥
차가 강동(江東) 앞에 다달앗을 때에
강동(江東)인사 수십인이 나와 맞아 주섯습니다.
그는 단군릉(檀君陵)을 찾아온다는 나를 반갑게 여긴 것인 듯 합니다.
지금 세상에 일부러 단군릉(檀君陵)을 찾아 다니는 조선(朝鮮)인은
아마 극히 드물 것 입니다
. 옛날은 옛날대로 숭명(崇明)의 악질(惡疾)이 박힌 선인들은
인민(人民)으로 하여곰 단군(檀君)의 이름 좇아 못 듣고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제 조상으로 알게한 까닭에
단군릉변(檀君陵邊)이 적적(寂寂) 하엿고 오늘은 오늘대로 그러합니다.
강동(江東)인사들은
단군릉(檀君陵)을 잘 수호(守護)하지 못한 책임을 누누히 변명하면서
우리를 단군릉(檀君陵)으로 인도 하엿습니다
. 함박, 쪽박이라는 강동태백(江東太白), 소백(小白)이
나는 우리에게 문화를 처음으로 주시고
국가생활을 처음으로 주신 조상이신 단군릉(檀君陵) 앞에 부복(俯伏)하엿슴니다.
나를 맞아 주선 이 지방 여러분도 같이 부복(俯伏) 하엿슴니다.
영광스러운 조상 앞에 엎더린 불초한 후손들!
진실로 불초한 후손들이 아닙니까.
바로 릉(陵)곁에 집을 짓고 사는 촌민(村民)까지
이 높으신 조상의 릉(陵)을
고맙게 생각 할 줄을 몰라서 계견(鷄犬)으로 하여곰
밟게 하는 것을 생각하면 지극히 송송(悚悚)한 일 입니다.
단군릉(檀君陵)이냐, 아니냐하는 문제가 없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이조(李朝)에서도
해마다 강동현령(江東縣令)으로 하여금 치제(致祭)를 하여왓고
민간에서도 입에서 입으로
이 무덤이 단군릉(檀君陵)인 것을 전하여 왓으니 단군릉(檀君陵)이 아니십니까.
유식한 체하는 무리들로 하여곰
제 멋대로 단군(檀君)의 존재를 의심케하고
단군릉(檀君陵)의 존재를 의심케 하라 하시오.
그러하더라도 우리에게 국가생활을 처음으로 주시고
360사(事)의 문화생활를 처음으로 가라치신 단군(檀君)은
엄연한 실재(實在)시오
또 단군(檀君)이 실재(實在)시면 다른데
그 어른의 릉(陵)이 발견되지 아니하는 동안
강동(江東)의 단군릉(檀君陵) 밖에
우리가 단군릉(檀君陵)으로 생각할 곧이 없지 아니합니까.
그러므로 강동(江東)의 단군릉(檀君陵)은
우리 시조(始祖) 단군(檀君)의 릉침(陵寢)으로
존숭(尊崇)하고 수호(守護)할 것이 아닙니까.
조선(朝鮮)인은 조선(祖先)을 숭배(崇拜)한다고 합니다.
간 곧마다 조상의 분묘 앞에는 많은 재물울 들어서
석물(石物)을 하여 놓고 제각(祭閣)을 지어 놓고
산직(山直)이를 두어 수호를 하고 춘추로 성묘를 합니다.
그러하신 바는
조상(祖上)의 조상(祖上)이신 단군릉(檀君陵)은
쑥밭이 되게 내버려두고
민족의 은인(恩人)인 모든 위인(偉人)의 분묘는
잇는 곧 좇아 알지 못하게 되엇습니다.
먹고 마시다가 죽은 무명한 조상들을 위햐야
족보를 꾸미기에는 힘을 쓰면서도
족보의 족보인 조선(朝鮮)인
전체의 역사와 위인의 전기를 발행하기 위하야
분전(分錢)을 내이랴는 사람이 없습니다.
잘못된 조선숭배(祖先崇拜)는
마츰내 조선(朝鮮)을 못살게 하고 말앗습니다.
지금이라도
어느 재산 잇는 조선(朝鮮)인 이돈 10,000원이나 내어서
단군릉(檀君陵)을 수축수호(修築守護)케하고
조선사(朝鮮史)를 편찬발행(編纂發行)케 하고
조선(朝鮮)어의 사전과 문전(文典)을 발행케 하고
단군(檀君)에게는 좋은 자손이오
우리에게는 높은 혈조(兄祖)인 모든 민족적 위인들의 유적을 찾아 기념하고
전기를 펀수(編修)하야 발행케 할 특지가(特志家)는 없는가.
얼마 안되는 돈. 100,000원이면 족(足)할 일.
이만한 일을 할 자손은 없는가.
이만 일을 할 자손은 없는가.
강동(江東)인사들은
단군릉(檀君陵)의 수축존호(修築存護)를 위하야서
의연금(義捐金)을 모집하엿으나
모사정(某事情)으로 중지(中止)가 되고 잇습니다.
한 사람이 나서시오, 한 사람이!
나는 이 날에 외람되게 이 지방인사들의 정중(鄭重)한 대접을 받고
함박 쪽박과 아달메의 하로를 우럴어 보고
한(限)없는 감개(感慨) 속에 하로를 보내고
성천(成川)의 동명관(東明舘)과 3등(登)의 32구천(舊天)을 거치어
수로(水路)로 비를 맞으면서
단군(檀君)의 옛 서울 평양(平壤)으로 나려왓습니다.
조선(朝鮮)문화의 발상지인 평양(平壤)
, 조선(朝鮮)민족의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진 평양(平壤)
풍경(風景)만으로도 조선(朝鮮)인에게 무한한 애착심을 주는 평양.
그러나 그 평양(平壤)은
1200여년 전(前) 라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손에 쑥밭이 되어 버렷습니다.
고구려의 정수분자(精膸分子) 380,000인(人)은
포로가 되어 당(唐)으로 잡혀갓습니다.
한족(漢族)은 대대로 큰 원수(怨讎)인 고구려로 하여곰
재기(再起)의 력(力)이 없도록 근절(根絶)을 시킬 결심이엿습니다.
그런데 그 앞잡이를 신라인이 하엿습니다.
신라인은 삼국(三國) 중(中)에 가장 노예적 근성을 많이 가진 무리.
옥(玉)으로 부서진 고구려의 문화와 혈통(血統)이 끊어지고
구차한 안전을 도모하는 신라의 혈통과 정신만이 남은 것이
지나간 1,000년의 불행이엇습니다.”
『형사판결원본 제18책』에 들어가 있는 「수양동우회 사건 판결문」,
1940년 8월 21일 자, 필자 소장본, Ⓒ2022 필자. [사진제공 - 이양재]
『형사판결원본 제18책』에 들어가 있는 「수양동우회 사건 판결문」,
1940년 8월 21일 자, 필자 소장본, Ⓒ2022 필자. [사진제공 - 이양재]
이광수의 창씨개명(創氏改名)한 이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적고 있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는
동아일보사 사장 인촌 김성수(金性洙, 1891~1955)와 함께
「단군릉」을 찾은 기행문을 써서
파인 김동환(金東煥, 1901~?)이 발행한 잡지
『삼천리(三千里)』 제8권 제4호(1936년 4월 1일 발행)에 기고한 바 있다.
그 글에서 춘원은
“지금 세상에
일부러 단군릉(檀君陵)을 찾아다니는 조선인은 아마 극히 드물 것 입니다.
옛날은 옛날대로 숭명(崇明)의 악질(惡疾)이 박힌 선인들은
인민으로 하여곰 단군의 이름 좇아 못 듣고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제 조상으로 알게한 까닭에
단군릉변(檀君陵邊)이 적적하엿고
오늘은 오늘대로 그러합니다.”라고 개탄한 바 있다.
그러나 그 글을 쓴 이광수는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6개월 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며
, 1938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豫審)을 받던 중
안타깝게도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한다
. 위의 판결문에 의거하면
이후 이광수는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변절의 대가로 이듬해인 1941년 11월
경성고등법원 상고심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글을 쓴 이광수는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6개월 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며
, 1938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豫審)을 받던 중
안타깝게도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라. 단군릉의 실재
『단군릉(檀君陵)』, 1900년에 ‘단군묘(檀君墓)’에서 ‘단군릉’으로 승봉(承奉)한다.
[사진제공 - 이양재]
‘단군묘(檀君墓)’는 강동(江東)에 있고,
단군의 사당인 ‘단군묘(檀君廟)’는 평양 시내에 있다.
일부에서는 이 두 곳의 장소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 『세종실록(世宗實錄)』 154권, 「지리지(地理志)」, 평안도 평양부 강동현
(平安道 平壤府 江東縣) 조의 끝부분에
“大塚在縣北二十里都麿山, 周回四百十尺⃚。(諺傳皇帝墓)”라고 하였다.
즉 “대총(大塚)이 현(縣) 북쪽 20리의 도마산(都麿山)에 있는데
, 둘레가 4백 10척이다.”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총(大塚)이 곧 단군릉이다.
단군릉은 실재하고 있었음은 조선 초기의 기록으로 이미 입증된다.
춘원 이광수의 말 대로
“단군릉(檀君陵)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없지 아니”하지만
단군릉에 대한 기록과 구전은 근래에 만든 것이 아니라 오래전의 것이다.
대종교인이자 제1세대 민족사학자인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1859~1925)도
현진건이나 이광수가 글을 쓰기 이전에
『서우』 제1호(1906년 12월 1일 발행) 33쪽에서
단군릉의 실제에 대해서 다음와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즉 “권근시(權近詩)에
왈 전세(曰傳世) 부지기(不知幾)로되 역년(歷年)은 증과천(曾過千)이라
송양서(松壤西)에 (금 강동(今江東)) 단군묘(檀君墓)가 유(有)고
태백 아사달(太白阿斯達)에 구유사(俱有祠)고
당장경(唐藏京)은 일운 장장평(一云藏藏坪)이라.
문화군 구월산하(文化郡九月山下)에 재(在)니라.”
또한 『개벽』 제51호(1924년 9월 1일자로 발행)
「평양부(平壤府)의 번병(藩屛)인 대동군(大同郡)」이란 기사에서
“명승고적(名勝古蹟) / 본군(本郡)에는
명승고적(名勝古蹟)으로 헤일것이 자못 만흐니
이제 그 대개(大槪)를 기(記)하면
一 단군묘(檀君墓) ;
강동면(江東面) 칠포리(漆浦里) 아달산(阿達山) 대박산(大朴山) 밋해 잇스니
묘주사백십척(墓周四百十尺)으로서 이조(李朝) 정종(正宗) 병오(丙午)로부터
춘추이회(春秋二回)로 현감(縣監)을 보내여 봉심(奉審)케 하엿스나
기후(其後) 해이(解弛)하야 다시 이 묘(墓)를 수성(修省)하는 자(者) 업스매
그 겻헤 집이 늘고 그 밋헤 밧이 생기여
거의 석시(昔時)의 면영(面影)을 인(認)치 못하게 되엿든 바
시(時) 군수(郡守) 김영필씨(金永弼氏)의 알선(斡旋)으로
본군(本郡) 명륜당(明倫堂)에서
새로히 담을 싸코 문(門)을 세워
전(前)과 가티 춘추봉사(春秋奉祀)를 하게 되얏다.
물론(勿論) 단군묘(檀君墓)가 강동(江東)에 잇다는 데에 대(對)하야는
여러 가지로 이상(異常)한 감념(感念)이 업지 못하나
이곳의 민중(民衆)은 언제부터 그 무덤을 단군묘(檀君墓)로 불너왓고,
다른 곳에는 단군묘(檀君墓)가 잇다는 말을 듯지 못하는 오늘인즉
우리는 특별(特別)한 반증(反證)이 업는 한(限)에 이를 인(認)할 수 밧게 업스며
얼마 전(前)에 엇던 군수(郡守)가 이 무덤을 파본 일이 잇섯는데
광내(壙內)에는 기묘(奇妙)한 옥함(玉函)이 발견(發見)됨으로
그것을 집어 낼 것지 업다하야 도로 봉(封)하고 마럿다 한다.”라고
소개한 바 있다.”라는 것이다.
개벽의 기사 끝에서
“얼마 전(前)에 엇던 군수(郡守)가 이 무덤을 파본 일이 잇섯는데
광내(壙內)에는 기묘(奇妙)한 옥함(玉函)이 발견(發見)됨으로
그것을 집어 낼 것지 업다하야 도로 봉(封)하고 마럿다”라고 한 것은
일제 강점기의 강동군수가 도굴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군릉이 도굴은 됐을지언정
유골만은 일제의 마수(魔手)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신경준의 북청도호부사 교지』, 1771년 2월 17일(음력),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을
북청도호부사로 임명한 교지(敎旨)이다. Ⓒ2022 필자.
[사진제공 - 이양재]
여암 신경준은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역사지리학자로서
영조의 명으로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감수하였고,
1770년에는 문학지사(文學之士) 8인과 함께 『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여지고(輿地考)』를 담당하였으며,
이어서 그 해 6월 6일부터 8월 14일까지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의 감수를 맡았다.
그의 『강계지(疆界誌)』의 「전조선(前朝鮮)」조에,
“檀君王儉, ‥‥‥(중략)‥‥‥,
江東縣之鎭山曰大朴山, 下有一大塚, 世傳檀君墓, 大朴卽朴達也, 而有檀君墓而名之也」.
즉 여암 신경준 역시 대박산 대총이 단군묘임을 언급하고 있다.
한편 일제 감점기에 활동한 대학자 이능화(李能和, 1869~1943)는
『동광(同光)』 제12호(1927년 4월 1일 발행)에
논설(論說) 「고조선 단군(古朝鮮壇君)」을 기고하며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지리학자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강계지(疆界誌)』의
「전조선(前朝鮮)」조를 인용하고 있다.
“李朝 正宗時人 申旅菴 景濬 撰 疆界誌의 前朝鮮 條에, 檀君王儉, ‥‥‥(중략)‥‥‥,
江東縣之鎭山曰大朴山, 下有一大塚, 世傳檀君墓, 大朴卽朴達也, 而有檀君墓而名之也」.
즉 여암 신경준 역시 대박산 대총이 단군묘임을 말한 바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단군전 봉심기(檀君陵奉審記)』 /
(本社特派員 李殷相謹記)., 동아일보 1934년 1월 13일자 제2면. [사진제공 - 이양재]
문학가이자 역사학자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1903~1982) 역시 한때는 독립운동가이다
. 일부에서 이은상의 친일 의혹을 들고 나오지만,
그는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홍원 경찰서와 함흥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고,
1945년에는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 경찰서에 유치 중에 광복과 함께 풀려났다.
사망후인 1990년에 노산 이은상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필자가 알기에는 이은상이란 동명이인이 일제때 몇 명 있었다.
따라서 이은상의 친일 의혹은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한다고 본다.
어떻든 노산 이은상이 남긴 민족 문학사의 족적은 기릴 만하다.
위에서 전재한 현진건과
이광수 이외에 문학가이자 역사가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1903~1982)도
동아일보의 특파원으로 단군릉을 순례한후 1934년 1월 13일자
동아일보 지면 제2면에 「단군전 봉심기(檀君陵奉審記)」를 기고한다.
당시는 동아일보사가 ‘단군릉수축운동’을 벌이던 기간이었다.
그런데 이유립(李裕岦, 1907~1986)의 『환단고기』 「단군세기」에서는
"(BC 2092년) 7월 구을단군(丘乙檀君)이 남쪽으로 순수하여
풍류강을 건너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곧 붕어하시니
대박산에 묻히셨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단군릉의 실재를 알고 있던 이유립의 이 주장은
북이 측정한 단군 유골의 실측 연도 BC 3018년에서 900년 정도 후의 연도로서,
다른 어느 기록으로도 입증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립만의 주장이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지난 수백년간 단군릉을 규명하고
보존하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올라타고 짓밟는 행위이자,
다된 민족사관의 밥상위에 숟가락 하나만 올리며 덤벼드는
섣부른 식객(食客)의 행위로 필자의 눈에는 비쳐진다.
마. 단군릉과 단군 유골을 인정하여야 하는가?
북에서 단군릉을 발굴하고 유골을 발견하여 새로이 단군릉을 개건하였다
. 1993년 10월 12일과 13일 북에서는
인민대회당에서
단군릉에 대하여 15편에 달하는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 논문을 이형구 박사는 입수하여
1994년에 『단군을 찾아서』라는 단군릉 발굴 학술 보고집을
도서출판 살림터를 통하여 내어 놓는다.
이후 이형구 박사는
남북학자들의 발표 논문을 모은
『단군과 고조선』을 1999년 3월 5일자로
또 다시 도서출판 살림터를 통하여 내어 놓는다.
현재 남측의 학계에서 단군릉 시비는 차츰 잦아든다.
그런데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끝 부분에
“후환은어아사달위산신(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이라고 하였다.
즉 (단군이)
“후에 아사달(阿斯達)에 돌아와 숨어 산신이 되었으니”라고 하였으며,
『제왕운기』에도 “입아사달산위신(入阿斯達山爲神)”이라고 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아사달”을 “구월산”으로 보아왔는데
, 이것은 하나의 의문을 제기하여 준다.
즉 「고조선」조의 앞 부분에는
단군이 “입도아사달 개국호조선(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이라 한 것을 보면,
“아사달”은 단군의 도읍지인데,
단군이 은신(隱身)하여 산신(山神)이 된 “아사달(阿斯達)”
또는 “아사달산(阿斯達山)”과 지명이 동일하다.
아사달은 단군을 따라 다니는 지역의 명칭인 것이다.
만약 아사달산이 강동의 대박산의 이칭(異稱)이라면,
대박산 단군릉은 고려 때도 단군묘로 알려져 왔음을 말하여 준다.
이 관점은 역사학계에서 향후 더 고찰하여야 할 부분이다.
민족사관이나 민족주의자의 관점에서는
단군릉과 단군 유골을 당연하게 인정하여야 한다.
단군이 실체로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니 어찌 의심하겠는가!
단군 유골이 알려주는 측정 연도 5011년 전을 근거 삼아 BC 3000년경에
고조선이 창건되었다는 주장이 북측 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중국의 황제 헌원(黃帝軒轅, 중국 주장 ; BC 2717~2599) ) 보다도
단군이 400년 정도 앞선 시대의 인물이라는 주장이다.
보학(譜學)에서 400년 정도라면
최소 15대(代)에서 최대 20대의 계대(系代)가 내려오는 기나긴 세월이다.
그리고 중국 황제(黃帝)의 주 무대는 중국 남방이고,
우리 단군과 고조선의 주 무대는
한반도와 지금 중국의 북방이고 동북(東北)이다.
이는 고고학 유물로서 입증되어 우리에게 시사하여 주는 점이 크다.
북에서는 단군릉을 개건한 이후 국보 제174호로 지정하였다.
바. 추기 1 : 에필로그(Epilogue)
1994년 8월 9일,
일본 동경 심바시에서 지인 홍영우 화백과 함께 만난 당시
재일본역사고고학협회의 고(故) 신현동(申鉉東, 1996년 7월 작고) 회장은
이형구 박사가 엮은 『단군을 찾아서』 재판본을 필자에게 주었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나서 이형구 박사에게서
『단군과 고조선』 서명본을 직접 받았다.
최근 분주한 가운데서도 이 글을 쓰고, 또한 서재를 정리하다가
그 두 책을 뒤늦게 찾아내어 지금 뒤적이고 있다.
필자가 통일뉴스에 원고를 넘겨 이미 연재한 글 몇 편을 쓸 때는
그 두 책을 참고하지 못하여 부족한 점이 있다.
앞으로 필자의 원고를 수정하여 책을 내게 된다면,
이형구 박사가 엮은 책에 나와 있는 논문들을 참조하여
일부분을 바로 잡고 증보하여야겠다.
독자분들은
단군 사실에 대한, 특히 단군론에 대한 남북학계의 정설과 접근점은
이형구 박사의 두 권의 편저 『단군을 찾아서』와
『단군과 고조선』을 필독하시길 권고한다.
다시금 독자분들에게 말씀 드린다.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애서운동가이다.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때
지난 47년간 머릿속에서 정리한 모든 것을 털어 놓아야,
다음 사람들이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에 서둘러 글을 쓰느라 미숙한 점, 글이 매끄럽지 못한 점,
그리고 오타가 많은 점들은 양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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