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해 8월 15일 +++
권 오 신
‘짝짝짝……!’
“네, 김유정* 씨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참여하신 세 분 중 권△△ 씨가 만드신 노래 ‘여름밤’을 마지막으로 들어봤습니다.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황 선생님**?”
“네, ‘여름밤’이라는 제목이 지금 계절과 아주 잘 어울리는 노래군요. 시골의 여름밤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6/8박자, 세도막형식의 어렵지 않은 가락으로 누구든지 쉽게 익힐 수 있는 좋은 노래입니다.”
“네, 그렇군요. 저***도 금방 따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선생님****, 노랫말도 아주 친근한 것 같죠?”
“네, 그렇습니다. 황 선생님 말씀대로 지금 시골의 여름밤 풍경화를 보고 있는 것 같군요. 정말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가락도 노랫말에 잘 어울리게 부드러우면서 노랫말의 운을 잘 살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곡자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만든 것 같군요. 잘 들었습니다.”
“네, 동감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상상이 됩니다. 그런데 김유정 씨, 노래를 부를 때 느낌은 어떠셨나요?”
“네, 아주 친숙한 동요를 부르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황 선생님 말씀대로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 프로그램의 취지대로 이런 노래들이 많이 나오고 또 널리 불리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보았습니다.”
“두 분 선생님과 김유정 씨, 감사합니다. 끝으로 노래를 만드신 분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권△△ 씨는 노래를 만들어본 경험이 많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떠세요?”
“네, 뭐 많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계기가 되면 가끔 만들기는 했습니다. 저는 시골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데 다른 과목 보다 음악을 좋아합니다. 그래선지 반 아이들도 그 시간을 기다리지요. 어느 날, 학교 숙직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통해 이 프로그램 ‘우리들의 새노래’를 보게 되었고 출연하는 분들의 면면과 선곡된 노래들을 들으면서 나도 한 번 출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 보다 이 프로그램의 기획 취지에 맘이 끌렸습니다. 시골에서 자라고 직장도 시골이니 노래의 소재도 저절로 거기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라도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좋게 만들어 본다고는 했습니다만 모두들 너무나 좋게 말씀해주시니 기쁘면서도 일면 부끄럽습니다.”
이상은 KBStv 프로그램 ‘우리들의 새노래’ 녹화 장면 중 일부를 간추려 적은 것이다. 그런데 위의 내용으로만 보면 방송국에서 이루어지는 아주 평범한 장면으로 생각되지만 이날 서울의 사정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따라서 녹화 과정도 사실 순탄치 않았다. 잠시 긴박했던 그때로 돌아가 본다.
* 김유정 : 대중가요 가수, '사랑의 문(김남훈 곡)' 외
** 황문평 : 작곡가 겸 음악평론가, ‘빨간 마후라(블루벨즈 노래)’ 외
*** 김상희 : 대중가요 가수,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김강섭 곡)’ 외
**** 이희목 : 작사 작곡가 겸 음악평론가, 개여울(정미조 노래) 외
더위가 한창인 그날 아침 일찍, 당시로서는 가장 빠르다는 새마을호 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였다. 수년 전부터 KBS에서 방송하는 프로그램 ‘우리들의 새노래’에 출연하기 위해서다.
나는 그 무렵 경북 안동의 한 시골 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매주 목요일 저녁 식사 후면 어김없이 학교 숙직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보러 갔는데 그 시간대에 방송되던 것이 바로 ‘우리들의 새노래’였다. 전국의 아마추어 작곡자들이 응모한 새노래를 심사하여 매주 3, 4명을 선발하고 직접 출연토록 하였다. 선발된 곡들은 전문가에게 편곡을 의뢰하고 곡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가수들이 부르도록 하였다. 사회자를 비롯하여 두 명의 심사위원, 노래를 부르는 가수, 작곡자가 각자의 감상평과 느낌 등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전부터 보아 오던 그 프로그램에 차츰 마음이 끌려 ‘나도 도전해보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때마침 여름이 시작되고 있던 터라 혹시라도 선발될 경우 방송되는 시기도 고려하여 곡 하나를 만들었다. ‘여름밤’이었다.
소정의 서류를 방송국에 제출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회신이 오기를 기다렸다. 달포가 넘게 지났는데도 무소식, 거의 포기하고 있던 차에 출연 일 주일 전 쯤, ‘8월 15일 10시 전으로 도착’하라는 KBS 발신 전보를 받았다.
서울 지리에 어두웠던 나는 역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KBS로 향하였고 정문을 지나 안내소에 도착하였다. 9시 반이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전보를 제시하고 안내된 곳은 크지 않은 녹화 부스였다. 이미 녹화 준비는 다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시간 여유가 있어 여기저기를 구경하고는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였다. 혹시라도 이곳으로 다시 찾아오기 어려울까 해서였다.
10시가 조금 지났다.
밝은 조명이 비치는 크지 않은 스튜디오에는 사회자를 비롯한 출연자들(심사위원 2명, 작곡자 3명과 노래 부를 가수 3명)이 각자의 위치에서 대기 중이었고 그 둘레에는 각각 다른 방향으로 향한 카메라 3대가 담당자의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청하는 사람들의 자리는 없었다.
담당자가 사회자와 출연자들에게 녹화 진행 과정을 간단히 설명하고 자기 차례가 되어 말을 할 때의 주의할 몇 가지도 당부하였다. 노래는 미리 악단의 연주로 녹음된 반주에 맞추어 충분히 연습한 다음 스튜디오에서 다시 부르는 형식이었다.
그렇게 조금을 더 기다려 담당자의 수신호에 따라 녹화는 시작되었다.
먼저 사회자가 프로그램 소개를 겸한 조금은 긴 멘트를 한 다음 좌중을 둘러보면서 첫 번째 출연자를 소개하였다. 출연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한 다음 자기 소개에 이어 곡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는 도중 담당자가 ‘컷’ 사인을 하였다. 방금 황급하게 달려온 사람이 ‘중지하세요!’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귓속말로 전갈을 들은 담당자는 몹시 당황한 어조로 ‘지금 밖에서 비상 상황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녹화는 여기서 일단 중지하겠습니다. 상황이 바뀌면 다시 계속할 수도 있으니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시기 바랍니다.’라 말하고는 급히 자리를 떴다.
출연자들은 어리둥절,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궁금하고 지루한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시내 국립중앙극장에서 진행 중이던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갑작스런 저격 사건이 일어났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육영수 여사가 매우 위중한 것 같다’는 갑작스런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안절부절, 현장을 떠나지 못한 출연자들은 담당자의 전갈이 오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념식은 일시 중단되었으나 얼마 후 예정대로 끝까지 진행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렇게 한 시간도 넘게 지난 뒤에야 담당자가 왔다.
“여러분, 지금 당장은 녹화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각자 점심 식사 를 하시고 오후 1시까지 이 자리에 다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녹화 계속 여부는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며칠 전부터 아내는 둘째 아이 출산을 앞두고 친정에 머무르던 중이었다. 진통이 있는 것 같아 전날 산부인과에 입원하였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서울에서 비상 상황이 발생했던 그 시각, 아내는 간헐적으로 진통을 겪고 있었다고 하였다. 사실 그날 아침 새벽같이 출발하느라 아내에게는 들르지도 못하였다. 전화라도 넣었으면 좋았으련만 집집마다 전화기가 있는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출연자들은 스튜디오를 나와 각자 점심을 해결하고 약속한 시간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조금 뒤에는 담당자도 돌아와 곧 녹화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촬영 기사들도 속속 자리를 잡았다. 흐트러진 자리를 다시 바르게 정돈하고 각종 기기 점검을 거쳐 1시 30분이 넘어서 재개된 녹화 작업은 몇 번의 수정을 거쳐 세 시간 가까이 걸려 끝났다. 막상 시작은 했지만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담당자도 출연자들도 실수가 많았던 탓이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오후 5시가 넘어서 서울을 출발하여 안동에는 늦은 밤에야 도착했다. 진통을 거듭하던 아내는 밤이 늦은 시각에 순산했고 이튿날 아침 일찍 나는 병원을 찾아 아내를 위로했다. 마침 방학 중이어서 다행이었다.
이날이 바로 1974년 8월 15일, 29주년 광복절이자 고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국립중앙극장(현재의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기념식 현장에서 괴한의 총탄에 쓰러져 끝내 서거한 사건이 있었던 날이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 어둠 속으로 들어간 1974년 8월 15일, ‘740815-2’ 내 둘째는 세상의 빛을 보았다.
슬픔과 기쁨이 교차했던 49년 전 그날을 돌아보는 오늘이 새삼스럽다 .
나의 첫 번쩨 새노래 ‘여름밤’은 그렇게 우여곡절을 거치고 나서야 전파를 타고 TV 화면에 비치게 되었다. 방영되던 날 저녁 시간, 학교 숙직실은 인근에서 소문을 듣고 온 부형들과 아이들로 만원이었다.
당시에는 쉽게 녹화를 할 사정이 아니어서 화면을 남겨두지 못하여 아쉬웠지만 하는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그때가 생각나 인터넷으로 KBS 자료실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언젠가 꼭 찾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여담)
# 이날 이루어진 녹화는 원래 8월 14일로 계획하였으나 방송국 사정으로 이튿날로 미루어진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 그해 11월 10일, 같은 프로그램에 ‘추억’으로 다시 출연하였다. 평소 내가 좋아하던 학사 가수 최희준[2018년 작고]이 불러주면 좋겠다는 가당찮은 생각으로 만들었는데 뜻밖에도 내 바람대로 되었다. 노래를 들은 뒤 황문평 심사위원이 ‘그(최희준)의 스타일과 보이스에 딱 맞는 곡이다. 작곡자가 이 점을 염두에 둔 것 같다’고 하여 놀랐다.
# 두 번의 방송 출연이 작곡에 관한 공부를 조금 더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둘째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무렵 세 번째 출연을 염두에 두고 ‘자장가’를 지었으나 맘에 썩 들지 않아 더 다듬으리라 생각하다가 끝내 응모를 포기하고 말았다.
# 이런 일도 있었다. 1979년에는 전국동요작곡대회(초등부)에 참가하기 위해 특활(작곡)부 학생들과 함께 상경하였다. 그날이 10월 26일, 바로 10.26 사태가 일어난 날이었다. 행사는 무기 연기되었고 끝내 취소되었다.
참 이상했다. 5년 전 상경했을 때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더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