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이 지나서야 영희가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제야 이해가 갔어. 아침에 올 때는 완전 아픈 사람이야. 나보다 젊은 사람이 금방 힘들어하고, 머리가 아프다고 하고. 산에서 내려온 후에 보면 얼굴이 훨씬 나아져 있었지.”
김영희 씨에게 “당신에게 산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꿈이에요, 꿈. 정말 오르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고산(高山)에 오르면 산의 아름다움이 내게 눈 맞춰 주니 정말 황홀하고 행복하죠.”
유방암 수술 후 항암제에 방사선 치료를 받느라 백혈구 수치가 떨어지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고 구토가 나오던 때, 그는 산을 찾았다.
“그 몸으로 집에 있으려니 답답했어요. ‘내 마지막이 언제일까?’ 하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죠. 막내가 중학생이라 ‘애들이 클 때까지는 곁에 있어 줘야겠는데’ 하는 생각뿐이었죠. 그래서 산으로 갔어요. 일단 공기가 좋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면서 자연 속에 파묻히다 보면 몸과 마음의 시름이 덜어지는 것 같았으니까요. ‘이제 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자연이 어쩌면 그렇게 사무치게 아름답던지요. 봄의 새싹이나 가을의 단풍, 하얗게 눈 덮인 나뭇잎, 계곡의 물소리 …. 산에 다녀오면 몸도 마음도 즐거워 가족들한테 즐거운 이야기를 하게 되더라고요.”
암 환자가 어떻게 보통 사람도 숨이 차서 힘들어하는 등산을 할 수 있었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오르다 집으로 가야지’라는 생각으로 따라 나섰어요. 중간에 쉬는 지점에서 돌아가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다시 따라나서 정상까지 가게 되더라고요.”
암 투병 3년째 암세포가 갈비뼈로 전이됐다.
“‘정말 내 인생 여기서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혈액을 타고 전이된 것이라 딱히 치료방법도 없고, 암세포가 어디에서 또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죠.”
등산학교에서 “오늘 인수봉 갈 준비하세요”라고 하는데,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던 그는 울며불며 암벽등반으로 인수봉을 올랐다. “‘바위야, 나와 싸워 보자’라는 생각으로 집념을 불태웠죠. 내게 왜 이런 시련이 주어지느냐 하고.”
산의 기운이 나를 정화시킨 것 같아요
산에 올랐다 내려올 때는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고 정화된 느낌이 들었다. 새로운 에너지를 얻은 것 같았다. 그 후 그는 더 적극적으로 산에 갔다. ‘이번 산행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심정으로 일본 북알프스, 중국 황산, 백두산, 히말라야 임자체 등정 등 해외원정도 다녀왔다. 종갓집 장손의 아내로, 어머니로 자신보다는 가족들을 위해 살아왔던 그는 “이제부터 내 삶을 찾겠다. 내가 산을 오르든 뭐를 하든 나를 인정하고 도와 달라”고 가족들에게 선언했다.
곁에 있던 황국희 씨가 “임자체 등정 때 얘가 히말라야 4000m 고도에서 배낭을 멘 체 네팔 아이들과 축구를 하며 펄펄 나는 거야. 산에 다녀올 때마다 혈색이 좋아져. 예전에 비하면 얼굴이 확실히 달라졌어”라며 감탄한다. 김영희 씨는 “산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난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산에 오를 때 훅훅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잖아요? 그때 나쁜 기운을 뱉어 내고 맑은 기운을 들이마셔서인가 봐요.”
지난 6월 건강검진을 했더니 거짓말처럼 아무 이상도 없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그는 요즘 암을 이겨낸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김창호 원정대장의 지휘 아래 산악인이 아닌 일반인들이 알프스 설산을 함께 오른 ‘몽벨리스트 원정대’. |
일흔이 넘은 나이에 빙벽을 오르는 ‘빙벽 할머니’로 유명한 황국희 씨. 그는 산에 대해 “내 삶의 전부”라고 말한다. 산을 싫어하던 그가 처음 산에 오른 것은 42세 때 동네 주부들과 함께 집 가까이에 있는 우면산을 오르면서였다. 무슨 일을 하든 끝장을 보고 마는 성격인 그는 매일같이 우면산에 올랐고, 전국의 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들네가 들어와 살고, 그가 손자를 맡아 키우게 되면서 산에 가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53세에 암 판정을 받았다.
“처음에는 ‘난 절대 암일 리가 없어’라는 심정이었죠. 의사한테 얼마나 진행된 암인지 묻지도 않았어요. 수술한 후 방사선 치료를 28회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13회까지 받고 그만뒀어요. 대신 산에 다시 올랐죠. ‘난 결코 지지 않는다. 싸워서 이기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소파에서 주방까지 가는 데도 숨이 차고 힘들었지만, 누구한테 의지하겠어요? 가족에게 응석이나 부리고 있을 건가요? 계속 우울하고 짜증난 모습으로 있으면, 시간이 흐르면 주변 사람들이 다 떠나게 되어 있어요.”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심정이었던 그. 이제 일흔이 훌쩍 넘은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체력을 자랑한다. 62세에 암벽등반, 65세에 빙벽등반에 입문한 후 융프라우, 카나발루, 다테야마, 안나푸르나, 로체를 다녀왔고, 지난해에는 ‘엄마가 간다’ 원정대 대장이 되어 주부들을 이끌고 히말라야 임자체에 올랐다. 그는 산에서 “욕심 내지 않고 삶을 활기차게 사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암이 아니었다면 이만큼 삶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었을까요? 지금 이 시간, 이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두 사람은 이번 원정에서 몽블랑 정상까지 오르지는 못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서로의 몸을 로프로 연결해 한 발 한 발 올랐는데, 건장한 남성들과 보조를 맞추기 어려웠다. 일정은 촉박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도 포기를 결정했다. 정상까지 오른 대원은 7명 중 2명. 그래도 “로프로 연결하지 않은 게 나았을 텐데” “일정이 조금만 넉넉했더라면” 하면서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김창호 대장이 옆에서 “원래 정상까지 오른 산보다 오르지 못한 산이 가슴에 더 오래 남아요. 바둑을 둔 후 복기(復棋)하듯 산행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게 되니까요”라고 다독거린다. 이들에게 산의 정상까지 올랐는지, 오르지 못했는지가 정말 중요할까? 암이라는 복병을 만난 후 오히려 더욱 씩씩하게 인생의 산을 오르며, 그 산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깊이를 맛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