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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삶과 문학
박헌오 글
□ 단재 신채호 선생의 탄생과 시대상황.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에 대하여『선각자 단재 신채호』의 저자 임중빈은 서문에서 「영국의 셰익스피어, 인도의 타골과 간디는 물론 동서양의 인걸을 다 준다 하더라도 오직 한국인 단재 한 사람만은 끝까지 내줄 수가 없다」고 썼다.
단재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도리미 마을에서 가난한 농촌 선비 신광식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매년 12월 8일, 대전 중구문화원 주최로 탄신을 축하하는 행사를 개최하는데 필자는 헌시(獻詩)를 써서 낭송한 바 있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예수 그리스도 나셨듯이/ 한민족의 고난시대에/ 첩첩 산 중 어남동 도리미 초막에서/ 민족의 큰 스승 나시었네./ ~중략~ 오로지 조국, 오로지 조선민중, 오로지 혁명투쟁에 앞장서시다/ 여순 감방에서 순절하신 임께서 탄생하신 이곳은/ 민족 독립정신이 탄생한 성지이오니/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무릎을 꿇을지어다./ 임의 뒤를 따를지어다.”
이곳 생가지는 보문산 남쪽 안동 권씨 집성촌이며 바로 곁에는 조선 숙종 때 호조판서를 지낸 명현 유회당 권이진의 묘소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단재의 집안이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된 동기는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공이 안동 권씨와 결혼하면서 부터인데 이곳 외가가 있는 마을로 와 궁핍하게 살았다. 명문가이지만 쑥죽과 콩죽으로 연명하는 어려운 형편이었고 단재가 7세 되던 해에 아버지 신광식 공이 37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신채호 나이 8세(1887년) 때에 신채호의 친가 집안들이 사는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이사해서 조부가 차린 서당에서 한학교육을 본격적으로 받으며 성장하였다. 동생을 극진히 보살피던 장형인 재호 씨마저 단재가 13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단재는 어려서부터 영특한 두뇌를 가져 9세 때에 <통감(統監)>을 해독하고 14세 때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하였으며 뛰어난 시문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국내적으로는 봉건제도의 약화로 유교적 지배사상이 타격을 받고, 신분제도도 타파 분위기였으며 세도정치의 지배층 내부에서 당파싸움이 격화되는 가운데 사회적 혁신이 요구되었다, 열강들은 지구상에서 마지막 남은 미 분할지인 조선으로 눈독을 들이고 몰려와 러시아의 남진, 미국 군함의 침입, 영국과 프랑스 군함의 침입이 대 유행하는 가운데 1875년 일본은 운양호를 끌고 조선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 영종진에서는 치열한 전투 끝에 방어진들이 완전히 궤멸되고, 정산도에 상륙하여서는 비무장 양민들을 학살하고, 집을 모두 불태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민씨 정권은 타협에 나서 결국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 일본의 점령이 시작되었다. 1880년 부산항과 원산항이 개항되고 1881년에 일본은 서울에 일본공사관을 일방적으로 설치하였으며,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구미 제국들과 개항 조약들이 연이어 체결되었다. 1882년 6월 서울은 개항으로 강대국들의 식민지화가 노골화되는 가운데 이에 대하여 뜻있는 국민들이 항거하고, 부패한 봉건 지도층의 반민족행위에 분개함은 물론, 나라재정이 어려워져 군인의 봉급조차 1년 이상 지급하지 않자 대규모 군인폭동이 일어났으니 <임오군란>이었다. 민씨 일파는 청나라 군대 삼천 명을 끌어들여 난을 평정하고 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압송해갔다. 1884년에는 김옥균을 비롯한 개혁파들이 일본군을 앞세우고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호위하던 일본군은 배신하여 도망치고, 청국군에 의해 진압 당하므로 ‘3일천하’로 끝났으며 여기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모두 척살당하고 말았다.
한편 외국에서 들어오는 교리를 믿기보다 조선 사람의 학문과 신앙을 가지고 살자.’는 동학이 1860년 최재우에 의해 창시되었는데 1964년 요사스런 설교라 하여 최재우를 사형시키고, 이어 최시형이 계승하여 1880년대는 지역별 포교가 크게 확산되었다.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란 이념으로 반침략 ․ 반봉건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1894년에는 갑오 농민 전쟁이 일어났다. 파죽지세로 세력을 넓혀가다가 일제의 만행으로 산천을 피로 물들였고 수많은 농민들과 마을들이 불타고 말았지만 한국근대화 운동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1895. 8 을미사변으로 국모 민비가 왜적에 시해되자 유림들은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났고, 이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뺏기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일본 통치가 본격화되었다. 일본의 계략에 말려 강압적으로 일본돈을 채무로 사용토록 하자 지배책략임을 알고 국채 상환운동이 일어났으나 일본은 채무액을 온갖 명목으로 늘리고 국채상환운동을 추진하는 주모자들을 잡아들여 강제로 종료 시켰다.
일본은 제 멋대로 1907년 <한일협약>, 1909년 <기유각서>를 체결하고, 1909. 2월 송병준과 이완용이 일본에 충성경쟁을 벌리며 한일합병을 청하여 결국 1909. 7. 6 일본내각에서 미리 안을 확정 시켜놓고, 1910. 8. 22 <한일합방>〔국권 피탈, 경술국치〕조약을 체결, 8월 29일 발효되자 전국에서 항의 투쟁이 일어났다. 일본군은 증강 배치되어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무참한 살상이 벌어지는 등 혼란한 시국이었다.
□ 단재의 민족사관(民族史觀)
단재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민족사의 바탕위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생각하고 실천한 선각자이다. 백낙준의 글을 통해 단재의 일면을 알 수 있다.「단재는 사가(史家)이다. 그는 사학자로 고증(考證)에 깊어서 세속적 사관을 뒤집어 놓았다. 그의 해박한 지식은 고금을 통하고, 예리한 안광(眼光)은 만사(萬事)를 관통하였다. 단재는 그의 인간적 성격과 그의 학자적 양심에서 귀착(歸着)지은 독특한 역사관을 가지었다. 그는 철두철미한 민족주의 사관(史觀)을 주장하였다.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간의 투쟁으로 보았고, 사서(史書)는 ‘그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상태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그 중심사상을 「한민족의 역사발전에는 화랑도의 독립사상이 내세운 참 <아>와, <비아>인 유가(儒家)의 사대주의의 투쟁이 전개된 기록이라고 하였다.」그리고 단재가 지적하는 역사적 사건을 「12세기 중엽 초에 있었던 묘청란(妙淸亂)의 실패에 따른 화랑도의 몰락과 유가의 사대주의의 범람이라 하였다.」라는 글들은 단재의 면면을 볼 수 있다.
단재의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이란 논문에서 ‘묘청의 난’ 역사적 성격을 규명한 바 있는 데 「불교 이전의 전통적인 사상을 단재는 화랑도를 중심으로 한 낭가(郎家)사상이라고 하고 이것과 불교와 유교의 3대 사상조류가 내려오다가 묘청의 난 때 자주적이고 전통적인 동시에 진취적인 낭가 사상이 패하고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사대적이고 보수적인 유교 사상이 지배하게 되고 그 뒤 사대사상의 정신의 기반을 이룬 것을 설명하였다.」 그 뒤에도 묘청의 난에 대한 연구논물들이 나왔지만 대부분 식민지 사학의 영향을 받은 것들로 개악(改惡)된 것들로 규정하면서 올바른 인식을 촉구하기도 한다. 1908년 단재는 신문지상의 논설을 통해 <대한의 희망>이란 글을 발표하며 역사정신을 통하여 국민정신을 고취시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기를 열망하였다.
신채호는 또 다음과 같은 글로 국민을 자각케 한다.
「희망이란 자는 만유의 주인이라 꽃이 있음에 열매가 있으며,/ 뿌리가 있음에 줄기가 있음같이 희망이 있으면 사실이 반드시 있나니,/ 상제(上帝)의 희망으로 세계가 곧 있으며, 민중의 희망으로 국가가 곧 있으며,/ 부조(父祖)의 희망으로 자손이 곧 있으며,/ 동류(同類)의 희망으로 붕우(朋友)가 곧 있으며/ 야만(野蠻)이 희망하여 문명을 갖추며,/ 완고가 희망하여 혁신이 있으며,/ 미약(微弱)이 희망하여 강력을 가지며,/ 잔열(孱劣)이 희망하여 우세(優勢)를 가지며,/ 유자(柔者)가 강(剛)하려면 강을 희망하며,/ 쇠자(衰者)가 성(盛)하려면 성을 희망하나니 크다 희망이여,/ 아름답다 희망이여! <~중략~> 희망에서 원력(願力)이 나오고,/ 원력에서 열심이 나오고,/ 열심에서 사업이 되고,/ 사업으로 국가가 번영하나니/ 근면할지어다. 우리 한인아!/ 희망할지어다. 우리 한인아!」
- 신채호,「대한의 희망」 부분
이 글을 읽고 국민들의 독립투쟁정신은 쌓여가고, 또 행동으로도 나타났다. 이어서 알랙산더 대왕과 꼭 같은 광개토대왕을 ‘한국의 제일 호걸대왕’으로, 언제나 상무혼(尙武魂)에 불타는 호두장군(虎頭將軍) 최영장군의 전기는『최도통전』으로, 궁예(弓裔)를 조명한 『일목대왕(一目大王)의 철퇴』,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성장과정을 다룬 『갓쉰동전』, 홍경래를 소개한 『일이승(一耳僧)』, 등 수많은 영웅호걸과 역사인물들에 대한 전기를 집필하였다.
단재의 국사 연구서는 『독사신론(讀史新論)』 『조선 상고 문화사』 『조선 상고사』순으로 집필한다.『독사신론(讀史新論)』은 20세기 초 대한제국의 역사를 자강주의(自强主義)적 역사관으로 기술한 것이고, 『조선 상고 문화사』는 단재가 백두산과 만주 일대를 답사하고 나서 단군 이래 한국 상고사를 새롭게 저술한 것으로 중국과의 정치, 문화, 사회적인 면에서 우리 민족사상의 우월성을 강조한 것이며,『조선 상고사』는 이전의 사대주의적 역사서들을 비판하면서 조선 상고사를 대폭적으로 수정하여 저술한 책이다. 고대사 인식을 확고히 정립하는데 뚜렷한 공헌을 한 책으로 소개된다.『조선상고사』에서 단재는 삼한, 삼조선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여 한국 상고사의 골격을 구축하였다. 이에 관하여 「신채호의 전후 삼한 설에 의하면 대단군왕검(大檀君王儉) 중심의 단군조는 삼경의 삼한을 중심으로 자체 분열되었다는 것이다. 삼조선 분립시대의 삼조선 즉, 전 삼한의 유민들이 남하하여 이룩한 것이 진한, 변한, 마한의 후삼 한을 성립시켰다는 것이다. 전 삼한과 관련하여 단재는 우선 전 삼한의 일국인 신조선(신한)이 대단군왕검의 자손 해씨(解氏)에 의해 계승 발전한 것으로 지금의 봉천성의 동북 및 서북지방과 길림성 흑룡강을 거쳐 연해주 남단을 포함한 일대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후일 북부여와 동부여로 분립된다고 하였다. 「단재는 단군이 추장시대에 장백산을 중심으로 조선을 개칭하였으며, 각 부락과 지역을 정복하여 만주와 요동 ․ 한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숙신(肅愼), 조선, 예맥(濊貊), 삼한의 여러 종족을 거느렸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단재의 역사관을 더 깊이 넓게 기술하기는 어려우므로 역사가 종래의 기술보다 더 깊이 올라가고 영토가 광대하였음을 인식하면서 상고사를 약술하는데 그친다.
문화사적으로 단재는 단군을 조선 즉 최초의 공동의 신앙으로서 원시적인 종교 신앙과 관련시켜 민족사의 출발로 부각시키고 있다. 즉 조선의 ‘아리라’를 중심으로 ‘불’을 개척하면서 공동체의 일반신앙이 형성되었는데 그 제사장을 단군으로 본 것이다. 종교적인 대상으로 단군왕검은 이른바 삼신(三神) ․ 오제(五帝)의 설화로써 우주의 조직을 설명하고 인간세상의 제도를 정했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원초적 뿌리를 규명한 중요한 업적이라 할 것이다.
□ 단재의 계몽적 필봉
언론인으로서 단재는 평생 칼보다 날카로운 필봉을 놓지 않고 국민을 향해‘깨어 일어나 투쟁하자’고 외쳤다. 단재의 문필은 해박하고 뜨겁고 올곧으며 오로지 민족의 자강정신을 기반으로 삼아 억울하게 빼앗기고 팔아먹은 이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할 것을 호소하고 계몽하는 논설이 중심이다. 단재의 글은 평생 단 한 번도 굽힘이 없으며, 식음이 없고, 멈춤이 없다. 단재의 명문장은 따를 자가 없었으며, 문장을 행 갈음 하면 많은 부분이 서사시가 된다. 단재의 글로 애국지사들이 용기를 얻고 목숨을 바칠 각오를 다졌으며, 민중들이 각성하고 분연히 일어서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상경하여 장지연과 인연을 맺고 <황성신문>에 주필을 맺기 시작하여 <대한매일본보> <해조신문> <권업신문> <신대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많은 지면이 단재의 논설이 실리는 동안 부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다
일본은 1903년 이하영을 앞세워 전국의 황무지 개간을 추진한다는 조인을 체결하더니 계속 일본 차관을 준답시고 뒤집어씌운다. 그리고 빚을 못 갚으면 나라가 팔려갈 처지가 되자 1903년 2월에 대구에서 광문사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이 앞장서서 남자는 담배를 끊고 여자는 비녀를 빼서 국채상환기금을 모으자는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단재는 그 갸륵한 애국심에 감동하여 담배까지 끊으면서 동참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리나라는 1905년에 나라를 팔아먹고 말았다. 주권국가로서 외교권을 어떻게 일본이 대신 행사하며, 왕과 조정이 있는데 일본의 통감부라는 일본 감시단이 어찌 조정을 맘대로 한다는 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가? 국민 모두가 노예가 되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온 국민이 결사반대하는데 소위 대신들이라는 사람들이 회의를 해서 8명중에 한규설, 민영기, 이재극은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했고 이것이 3천만 국민의 뜻이라고 했는데도, 이완용을 비롯한 5명이 을사늑약에 찬성을 해서 결정한 것이다. 국민들은 대성통곡했다. 민영환·조병세 두 충정공은 자결하고,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날 하얼빈 역에서 이등방문을 처단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황성신문의 장지연이 <오늘 방성대곡한다.>는 글을 쓰자, 황성신문의 단재와 기자들이 다 잡혀가서 구속당하고, 황성신문도 폐쇄 당한다. 단재는 그때 구속에서 풀려나자 영국인 베텔이 발행인으로 있었던 대한매일신보에 들어가 역사적인 <방성대곡>을 다시 쓴다.
「우리민족 2천만이 남의 노예가 되었으니/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 4천년의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졸연히 멸망하였다니/ 이대로 끊기고 말 것이냐?/ 통재라 동포여!// 울음을 멈추고 나의 한마디 말을 들으시오./ 대체로 오늘 날 나라의 형편이 이와 같이 되었으니,/ 대한의 백성들은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좋은 가문이 많은 것도/ 노예가 되기는 마찬가지요/ 일품에 해당하는 대신의 훌륭한 자격도/ 붙들려 가기를 당하는 것도 한가지요/ 드높은 담장의 훌륭한 집도 남의 사는 집이 될 것이요/ 기름진 평야의 논과 밭도 다른 사람의소유가 될 것이요/ 상권도 남의 상권이요, 공업도 남의 공업이요, 화물 운송권도 다른 사람의 것이니,/ 대한의 백성들은 어떠한 자산 활동을 할 것인가? (---)/ 천지간에 나라 없는 백성은 어디에 살른지/ 노예는 고사하고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오. (생략)」 - 신채호, 「방성대곡」부분
이 소식에 민영환 ․ 조병세 두 충정공이 순국하여 많은 국민이 통곡하였고 전국 또한 각지에서 분을 못 삭이고 따라 순국하였으니 민충정공 순국에 혈죽이 솟았기에 이를 기려 단재는 논설문 중에 다음 시를 쓴다.
「혈죽 혈죽이어 가닥마다 피로구나/ 삼각산 바위에 밤낮으로 갈고 갈아/ 한강의 물로 밤낮으로 흐르게 하고/ 티끌과 흙으로 날마다 메우게 하고/ 비바람으로 날마다 이를 씻게 하여/ 아침저녁 이 흔적을 없애려고 해도/ 오직 이 한 줄기의 피는/ 만고에 빛 더욱 새로워지리로다.(생략)」 - 신채호, 「혈죽의 노래(血竹歌)」부분
단재는 국민들에게‘민족자강의식’과 국민들이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날마다 호소하는 글을 쓰기도 한다. 함흥사람이 전하는 말에 보창 학생 50인이 모여서 애국가 한 소리에 애통하더니 그중 열일곱 사람이 하늘을 가리키며 맹서하되 ‘우리가 우리 한국을 반드시 회복하리라, 우리가 우리 한국 동포를 반드시 건지리라. 우리라 우리 삼천리강산을 반드시 보전하리라. 우리가 우리 사천년 역사를 반드시 빛내리라 하고 각각 칼을 빼어 손가락 한 개씩을 베어 흐르는 피로 동맹하는 글을 썼다.」 소식을 듣고 단재는 “이는 자유의 선봉이며, 문명의 스승이며, 학계의 꽃이라”는 논설을 1908년 5월 16일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한다.
「장하다 저 열일곱 학생의 손가락 피여/ 맹렬하다 저 열일곱 학생의 손가락 피여// 나는 그 피를 위하여 노래하며/ 그 피를 위하여 춤을 추노니/ 무릇 한국에 인정이 있는 남녀들이여/ 모두 이 피를 위하여 노래하고 춤을 출지어다.// 나는 저 피에 대하여 탄식하며 우노니/ 무릇 한국에 눈물이 있는 남녀들이여/ 이 피에 대하여 탄식하며 울지어다. (생략)」 - 신채호, 「학계의 꽃」부분
당시 시대상(時代相)을 잘 나타낸 대표적인 사설이었는데 후반부는 일제가 검열에서 삭제하고 황성신문(1907.7. 31) 논설 한 구절이다
을사늑약으로 주권을 빼앗기고 나서 완전히 일본에 흡수된 것은 ‘한일합방’이라는 ‘경술국치’이다. 1909년에 송병준과 이완용은 서로 경쟁적으로 한국을 일본에 합병시키는 공을 먼저 세우려고 쫒아 다녔고 결국 일본 계획대로 강압적 어전회의에서 한일합방을 결정하고 이완용이 도장 찍어서 나라가 없어졌다.
단재는 만주 벌판에 닿았을 때 역사적인 고구려 영토, 우리의 한나라 땅을 맞이하였고, 호두장군 최영이 못 이룬 요동정벌을 다시 이루는 심경으로 그 땅을 밟았다. 단재는 1916년 북경에서 동아일보에 연재한 글에서 자주적 독립정신을 역설했다.
「중국의 석가가 인도와 다르며,/ 일본의 공자가 중국과 다르며/ 마르크스도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와 레닌의 마르크스와 중국이나 일본의 마르크스가 다 다름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생략)」 - 신채호, 낭객의 신년만필」부분
◇ 3. 1 독립만세 횃불과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단재의 견해
1919년 3. 1 독립만세운동이 터질 때 단재는 중국에 있었다.
중국에서 그동안 단재가 나섰던 민족 계몽운동의 결실이 맺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서도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작성된 「3.1 독립 선언서」를 접하고는『에잉! 이것도 독립선언이라고-----』 가슴을 쳤다.
죽자 살자 해도 안 될 처지에 비폭력 자장가 같은 선언문이라고 보았다. 뒷날 33인중에 보나마나 겁쟁이 중에 변절하고 말 위인들이 있을 것을 예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단재는 1919년 1월 만주 길림에서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가 주동이 되어 선언한 대한독립선언서 <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9명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고, 이어 3월에는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다. 상해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고 7월 회의에서 전원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임시정부는 한성임시정부, 노령 국민회의, 상해 임시정부로 나타났다.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 방향에 대하여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 방략에 의한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외교론’과,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민족 개조론을 앞세워 충분한 준비를 선행하여야 한다는 ‘준비론’이 있었지만 단재는 ‘아직도 그 어리석은 꿈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날로 독립은 어려워질 테이니 직접 민중 혁명적 수단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단재가 생각하는 것은 목숨을 내건 투쟁이고, 우리 민족이 강한 정신력과 실천력을 가지는 것을 앞장세웠을 것이다. 바로 단재선생이 쓴 「조선혁명선언서」에 단재의 투쟁정신을 집약적으로 나타냈다.
◇ 조선혁명 선언서
1922년 단재는 민중 직접혁명의 성전으로 여기는「조선혁명선언서 <일명 의열단 선언>」을 완성하였다. 의열단은 1919. 11월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재기, 김상옥, 신철휴 등 13명이 조직하였는데, 단재에게 조선혁명선언문을 기초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산고 끝에 6400여자에 달하는 <조선혁명선언문>이 탄생되어 1923. 1월 만천하에 공포되었다. 일본군은 크게 긴장하였다.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 ․ 경찰정치를 여행(勵行)하여 / 우리 민족이 촌보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 ․ 출판 ․ 결사 ․ 집회의 일체 자유가 없어,/ 고통과 분한(憤恨)이 있으면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 뜬 소경이 되고,/ 자녀가 나면 ‘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하는/ 노예양성소 ----학교로 보내고,//~ 중략~ 이제 파괴와 건설이 하나이요 둘이 아닌 즐 알진대/ 민중적 파괴 앞에는 반드시 민중적 건설이 있는 줄 알진대/ 현재 조선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 조선 건설의 장애인 강도 일본세력을 파괴할 것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민중이 한편이 되고/ 일본 강도가 한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아니하면 내가 망하게 된/ 외나무다리 위에 선 줄을 알진대/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로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 지어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 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속에 가서 민중과 휴수(携手)하야/ 불절(不絶)하는 폭력 –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야/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신채호,「조선 혁명 선언서」부분
「우리 동방 각 식민지 무산 민중의 혈․ 피․ 육․ 골을 빨고, 짜고, 씹고, 물고, 깨물어 먹어온 자본주의 강도 제국 야수꾼들은 지금에 그 창자가 꿰어지려 한다. 배가 터지려 한다. (~중략~) 우리 민중은 사멸(死滅)보다도 더 음참한 불 생존(不生存)의 생존을 가지고 있다. 소수가 다수에게 지는 것이 원칙이라 하면, 왜 최대 다수인 민중이 최소수인 야수적 강도들에게 피를 빨리고 고기를 찢기 우느냐? ~중략~
야수세계, 강도 사회에 <정의>니 <진리>니가 무순 방귀며, <문명>이니, <문화>니가 무슨 똥물인가? / 우리 민중은 알았다. 깨달았다./ 저들 야수들이 아무리 악을 쓴들, 아무리 요망(妖妄)을 피운들/ 이미 모든 것을 부인한,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대계(大界)를 울리는/ 혁명의 북소리가 어찌 거연(遽然)히 까닭 없이 멎을쏘냐. ~중략~ 옳다. 되었다. 우리의 대다수 민중들이 저들 소수의 야수들과 선전(宣戰)하면 선전하는 날이 무산 민중의 생존! 이것을 어데가 찾으랴.(생략)」 - 신채호,「무정부주의 발기인대회 선언문」부분
단재는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정부라는 것이 권력투쟁이나 하고 있으니 차라리 무정부주의가 독립운동 역량을 집중시키는 데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1927년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는 조선, 일본, 지나(支那), 대만, 월남, 인도 등 6개국 대표 120명으로 조직되고 상해에 본부를 두었다. 자금마련을 위해서 단재는 외국 위패권을 제조하고자 활동하다가 결국 1928년 5월 8일 대만 기륭항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단재는 재판 과정에서 당당하게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도둑질을 할지라도 부끄럼이나 거리낌이 없소’ 하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단재는 대련 재판정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 여순 감옥에서의 순국
단재는 차가운 여순 감옥에서 온갖 학대와 고된 노역에 시달리고, 추위와 굶주림에 몸이 다 삭아 내리는 가운데서도 틈틈이 조선 역사서를 집필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원고가 상당수 없어졌고, 계속 쓰려던 소중한 계획들도 모두 허사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눈물겨운 일이다. 단재는 죽음을 앞두고도 “만일 내가 10년의 고역을 무사히 마치고 나가게 된다면 다시 정정하여 발표하고자 합니다.” 하고 일렀는데 끝내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단재는 “망령 된 생각이나 『조선 사색 당쟁사』와 『6가야사』만은 조선에서 내가 아니면 능히 정곡한 저작을 못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건강하게 세상에 다시 나가게 된다면, 이것만은 자신 있게 발표할 수 있다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하고 조선일보 신영우 기자에게 말했으나 이것도 역시 허사가 되고 말았다.
단재는 일본 전권대사 암살모의사건으로 옆 감방에서 복역 중이던 손기업이란 청년에게 “내 조선의 역사책을 완성하지 못함이 무엇보다 한스럽소”,“나는 이제 살아나기는 어려울 것 같소. 손 동지는 아직 나이가 젊으니 밝은 세상에 나가면 부디 큰일을 계속하시오.”,“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띄워주오.” 하고 누누이 말해두었다고 한다.
단재가 병세가 심해서 병보석을 일본 놈들이 권하기도 했다. 마지막 사경을 헤매는 병고에 보석을 권유받고도 친일괴뢰의 보증으로 보석을 받지 않겠다고 사양하시고 죽음을 택하셨다. 결국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 20분 만 56년 2개월 14일을 사시고 왜적의 옥중에서 비분의 순국을 맞으셨다. 한 송이 무궁화 꽃이 되어 물 한 모금 청하시다 물 한 방울도 못 적신 채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툭 떨어져 가시었다.
□ 단재 신채호의 시
우리 시조 단군께서/ 나라 집을 창립하여 / 태백산에 강림하사 / 우리 자손 주시였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대황조(大皇祖)의 높은 성덕.//이 성덕을 어떻게 받들 것인가.//누(樓)에 오른 나그네 / 갈 길을 잊고서 / 낙목(落木)이 가로 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스물일곱 남아가 / 이룬 일 무엇인고? / 감개만 일어나노라. - 신채호, 「단군가」 전문
나는 네사랑/ 너는 내 사랑 / 두 사랑사이/ 칼로 써 베면/ 고우나 고운/ 핏덩어리가 / 줄줄줄 흘러 / 내려오리니 / 한주먹 덥석 / 그 피를 쥐어 / 한나라 땅에 / 고루 뿌리리./ 떨어지는 곳마다 / 꽃이 피어서 / 봄맞이 하리.
- 신채호, 「한나라 생각」전문
너의 눈은 해가 되어/ 여기저기 비치우고지고/ 님의 나라 밝아지게//
너의 피는 꽃이 되어/ 여기저기 피고지고/ 님나라 고와지게//
너의 숨은 바람 되어/ 여기저기 불고지고/ 님나라 깨끗하게 //
너의 말은 불이 되어 / 여기저기 타고지고/ 님나라 더워지게//
살이 썩어 흙이 되고/ 뼈는 굳어 돌 되어라/ 님 나라에 보태지게.
- 신채호, 「너의 것」 전문
단군개국 사천이백사십오년 팔월 이십구일/ 이날은 어떠한 날이오/
사천년 역사가 끊어진 날이오/ 삼천리강토가 없어진 날이오/
이천만 동포가 노예 된 날이오/ 오백년 종사가 멸망한 날이오/
세계 만국에 절교된 날이오/ 천지 일월이 무광한 날이오/
산천초목이 슬퍼한 날이오/ 금수어별(禽獸魚鼈)이 눈물 흘린 날이오 /
애국지사가 통곡한 날이오/ 우리 신성한 민족이 망한 날이오/
우리의 생명이 끊어진 날이오/ 우리의 재산을 잃은 날이오/
우리의 자유를 빼앗긴 날이오/ 우리의 신체가 죽은 날이오/
우리의 명예가 없는 날이오/ 우리의 입이 있어도 말 못할 날이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할 날이오/ 손이 있어도 쓰지 못할 날이오/
우리 조상은 땅속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날이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도 희망 없는 날이오/ 우리는 살고자 하여도 살 곳이 없는 날이오/
우리가 죽고자 한들 묻을 땅이 없는 날이오//
우리는 입이 있어도 말 못할 날이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할 날이오/
손이 있어도 쓰지 못할 날이오/ 밤리 있어도 가지 못할 날이오/
우리의 조상은 땅속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날이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도 희망 없는 날이오/ 우리가 살고자 하여도 살 곳이 없는 날이오/ 우리가 죽고자 한들 묻을 땅이 없는 날이오(생략) - 신채호, 「이 날」부분
단재의 시(詩)에 대한 관념은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시란 자는 국민언어의 정화(精華)라. 고로 강무(强武)한 국민은 그 시로 강무하며, 문약한 국민은 그 시로부터 문약하나니, 일국의 성쇠치란(盛衰治亂)은 대저 그 국시(國詩)에서 가함(可驗)할지요 또 조국의 문약을 회(回)하여 강무에 입(入)코자 할진대 불가불 그 문학한 국시부터 개량할지니라.」 즉, 시는 국가 존망여부와 관계되는 중요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시인의 위치에 대하여 「대 시인이 즉 대영웅이며, 대시인이 즉 대 위인이며, 대시인이 즉 역사상의 일거물(一巨物)이라.」 즉, 시인은 나라의 큰 영향력을 가진 존재로 본 것이다.
『단재 신채호 시 전집』에 100편의 단재 시를 모아 출간하였는데 참으로 방대한 시를 찾아내어 정리하였다. 여기에 박정규는 소설에 삽입된 시, 신문의 논설에 삽입된 시까지 발굴하여 100편의 시를 묶어 전집을 꾸민 것이다. 시 전집에 실린 시가들의 유형은 ①논설 자체가 전체 시가로 채워진 것. ②논설에 시가가 삽입된 것. ③논설 밖의 지면에 게재된 시가. ④황실 경축 시가. 등의 유형으로 되어 있다.
□ 단재 신채호의 시조
단재의 시조는 『단재 시 전집』에 6편이 들어있다. 몇 편 안되는 시조이지만 그가 순국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의 용광로가 되어 스스로의 일생을 끓여대고, 가난과 병마와 외로움과 옥고를 다 이기고 꼿꼿한 민족정신을 지키고 살면서 쓰신 수많은 글 가운데 간간이 쓰신 시조이기에 감상을 청한다.
먼저 「61일 계단(戒壇)의 회고」를 본다. 박정규 편역 『단재 신채호 시전집』163~164, 주석에 ▽출처 『룡과 룡의 대격전』(평양, 1966)으로 되어있다. 이 소설은 『꿈 하늘』과 함께 단재의 대표적 창작소설 2종 가운데 하나인데 무정부주의 사상에 의한 소설이므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사상과 관계되어 일찍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61일 계단(戒壇)의 회고
1
한 뼘쯤 되는 자리에 비비고 드러누우니
공기야 좋은 말든 이나 아니 물었으면
아무리 이가 물지라도 긁을 수나 있었으면
2
서너 겹 옷을 입고 대웅전에 올라서니
옷 속의 뭇이(群虱)들은 조찬회를 하는고나
여래(如來)가 어질다더니 악형을 하십니다
3
상오 두 시에 눈 비비고 일어나서
하오 열 시 까지 절하기로 판을 짠다
인제야 뻣뻣한 허리 버릇을 떼는고나
4.
삼월 십일에 이 문에 들어올 때
매화 한 송이도 필 염두를 안 냈더니
절하고 나오는 동안에(61일 만에 배례가 시필)
온 나무가 텅 비었고나
5
여래(如來)의 사십구 년 손끝 혀끝 다 놀리어
얻은 바 무엇이냐? 걸식단장(乞食團長) 실직(實職)이다
걸식에 배가 부르매 설법(說法)을 하였고나
6
허리를 안 굽히고 팽택령(彭澤令)을 내어 놓며
표주박 손에 들고 빌어먹던 도연명(陶淵明)아
네 참말 고사(高士)이다
참 절 한 번 받아라
단재는 머리를 숙이지 않고 꼿꼿이 서서 세수를 하여 옷이 다 젖기로 유명하다. “일본 놈들이 나라를 빼앗은 천지에서 고개를 굽히지 않겠다.”고 고개를 반듯이 세우고 세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절밥을 얻어먹고 살면서 참배를 하자니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 아닌가? 1920년을 전후하여 단재는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때 북경의 보타암에서 끼니를 해결하면서 『조선사』를 집필하고, 북경의 관음사에서 61일간 고행(苦行) 함이 이 시조의 제목 61일을 뜻함이다. 관음사에서 지내면서 단재는 조선역사 연구에 전력을 다하여 『조선 상고사』『조선 상고 문화사』 『조선사 연구초』등을 저술하게 되었다. 그 저서들은 1925년 동아일보에 소개되었다. 가난하였지만 정신적으로는 크게 비약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단재는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사대적이고 보수적인 역사관을 비판하고 독창적인 조선사를 저술하는 일을 자신의 숙명으로 여겼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므로 <아(我>가 이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역사관을 주창하였고, 조선의 광활한 ‘영토주의’를 입증하기에 신명을 다하였다. 중국에서 오로지 독립운동에 전념했던 단재는 스스로 걸식단장(乞食團長)이 되었을망정 떳떳했을 것이다. 걸식자가 되었을망정 단재의 용맹은 하늘을 찌를 듯했음을 1923년 그가 작성하였던 「조선 혁명 선언」을 보면 절감할 수 있다. 일명 「의열단 선언문」이라고 하는 이 선언문은 의열단은 물론 여러 독립군과 애국지사들의 필독 경전이 되었다.
단재의 가난은 선생이 삶의 고난을 읊은 다음 시에서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3장까지는 시조의 형식으로 쓰고 6구에서 2구를 더한 시이다.
뜬 세상 40년에 한 일이 무엇인고
잠시도 병과 가난 떠난 적이 없었고나
돌아서 한하노라 산도 물도 다한 곳에
곡(哭)하고 노래하기 그도 마저 어려워라
외솔회에서 펴낸 『단재 신채호』에 제목 없이 실려 있는 이 글의 전후에 다음과 같은 소개 글이 있다. “1924년 최남선이 경영하는 <시대일보(時代日報>가 선생의 환국을 요청하였다. 당시의 독립운동은 점차 앞길이 막연하여 해외에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적의 양해를 받아 환국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선생은 무슨 고난에도 물구하고 초지(初志)를 지켜나갔다. 선생의 고통 중에는 가난보다도 건강이 더욱 문제였다.”
위당 정인보는 “단재는 항상 얼굴에 난핍(亂乏)한 빛이 있어 누르스름하고 부은 듯하며 초췌하였다. 또 걸어다닐 때는 늘 복부(腹部)를 구부리고 다녀서 멀리서도 단재가 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늘 회색 두루마기가 발등을 덮은 중국옷을 입고 조선 역사를 연구함에는 부지런하였다.”고 적고 있다.
또 백암(白岩) 박은식(朴殷植) 선생의 아들 박시창(朴始昌)씨는 “모두가 다 실망 속에 빠졌어도 그는 홀로 광명 속에 걸어갔었다.”고 적고 있다.
단재의 영토주의는 중국 옛 고구려 땅을 밟으며 절감하였다. 다음 고려영(高麗營)은 중국 북경의 안정문(安定門) 서쪽 50리 지점에 있는 고구려 연개소문의 옛 진터, 심양의 개소둔(蓋蘇屯)과 중국의 각처에 산재한 고려영을 밟으며 쓴 것이 아니랴.
고려영(高麗營)
고려영 지나가니/ 눈물이 가리워라
나는 서생이라/ 개소문을 그리랴만
가을 풀 우거진 곳에/ 옛 자취를 설워하노라
나라 땅이 한 평도 남아있지 않은 강점기에 백두산에 올라 고조선, 고구려, 부여, 발해시대에 내달리던 평원을 바라보면서 단재는‘꿈 하늘’을 생각했다. 그리고 ‘위화도 회군’이 없었다면 최영장군이 다시 고구려 옛 땅을 찾았을 것인데 그러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단재의 『조선 상고사』는 그가 남긴 저서 중에서 가장 특별하고 뛰어난 역사서이다. 단재가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조선사 연구초」「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등은 중국 땅을 방랑하면서 자료들도 마음대로 볼 수 없었을 터인데 민족사를 똑바로 쓰겠다는 일념으로 확립한 방대한 연구였다. 단재의 대 단군왕검 시대는 단군 ․ 기자 ․ 위씨 삼조선과 다르며 삼국지 위지 동이전등에 보이는 반도 안에 형성된 마한 ․ 진한 ․ 변한의 삼한과도 다르다. 단재는 독사신론(讀史新論)으로 단군이 추장시대 장백산을 중심으로 조선을 열었고, 만주와 요동, 한반도까지 정말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단군사(檀君史)를 구체적으로 연구하여 최초의 귀중한 민족사를 확립한 업적으로 빛난다. 그의 기개가 여기에서 나오고 한민족의 기개를 여기에서 부터 일으키고자 했다.
빼앗긴 나라의 금수강산이 얼마나 미웠을까를 「금강산」이란 시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의 땅이 되어서도 요망스럽게 추색을 자랑하는 금강산을 곱게 볼 수가 없으니 차라리 일제의 바람이 불지 않는 몽고 대 사막으로 나아가 평원의 옛 바람을 반기고자 한 심경을 엿볼 수 있다. 단재가 맞이하는 대풍(大風)은 한민족의 역사정신이요 호쾌한 민족혼을 일컬음이다. 1923년 <독립신문>에 실려 있는 시조이다.
금강산
금강산 좋다 마라/ 단풍만 피었더라
단풍의 잎새잎새/ 추색(秋色)만 자랑터라.
차라리 몽고 대사막에/ 대풍(大風)을 반기리라
1923년 아마도 국내에는 홍수가 일었던 모양이다. 절간에 있으면서 온몸에 이가 득실거리던 것처럼 조선 땅에 침략자들과 매국노와 넋 빠진 친일의 무리들이 득실거리는 때에 차라리 대 홍수라도 하늘에서 내려주어 깨끗하게 쓸어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홍수가 난 후에 깨끗한 나라가 아니라 홍수로 더러운 잔해가 다시 온 땅을 뒤덮으니 한스러움이 오죽했으랴.
국내 수재의 소식
상제(上帝)가 비를 주어/ 비가 쇠어 홍수가 되어
삼천리 강산을/ 말가케 가시도다
그러나 성진(腥塵)은 의구히/ 전국(全國)에 덥히단 말가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고 망명지 중국 땅에서 맞이하는 봄, 단재는 그의 소설 『꿈 하늘』에서 몽환적인 새 세상을 만나고 『용과 용의 대 격전』에서 민중의 승리를 쟁취하면서 국적(國敵)을 두는 일곱 지옥 <1호 겹겹지옥에 국망(國亡)을 초래한 이완용 민영휘 부류, 2호 줄줄 지옥에 백성의 흡혈귀들, 3호 강아지 지옥에 적국의 정책 선전에 앞장선 연사, 문인, 기자, 4호 돼지 지옥에 정탐들, 5호 야릇 지옥에 가짜 지사, 6호 나나리 지옥에 적국 흉내 내는 노예 무리, 7호 반신 지옥에 적국과 시집장가든 무리들>에 시원하게 처단하고, 망국노를 두는 열두 지옥 < 1호 똥물 지옥에 예수 ․ 공자를 파는 몰역사적 종교인, 2호 맷돌 지옥에 분파주의자, 3호 엉금 지옥에 사대 모방자, 4호 댕댕이 지옥에 외교론자, 5호 어둠 지옥에 준비론자, 6호 단지 지옥에 배금․ 호색의 향락파, 7호 지짐 지옥에 헛된 이름만 드날리려는 허명파(虛名派), 8호 잔나비 지옥에 몰 주체(沒主體) 망국 사업가, 9호 가마지옥에 기회주의자, 10호 쇠솥 지옥에 체념 형 놀부, 11호 아귀 지옥에 무도덕한, 12호 종아리 지옥에 외국인을 받드는 열병 환자 따위들>에 투옥을 끝낸 다음 봄을 맞이하고 싶은 소망이 피어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망명지 중국 땅에서 기다리던 동쪽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미치지 못하니 빈 꿈에 부칠 따름이었다.
나비를 보고
춘산(春山)에 노는 나비/ 그 등에 올라앉아
훨 훨 훨 날아가면/ 어디를 못 가랴만
동풍이 너무 약하니/ 빈 꿈에 부치리라
이 외에 「현량사 불상을 보고」라는 시조가 있는데 그 작품에 대한 배경과 해석이 여의치 않아 소개를 생략한다. 대신 시조의 형식을 갖추지는 않았으나 단재의 대표적 시 가운데 두 편을 소개한다. 단재의 시는 대부분 그 가락이 자연스러워 시조 풍을 느낄 수 있으며, 단재의 수많은 명문들은 대부분 줄바꾸기만 하면 서사시와 같아서 단테의 신곡을 연상케 한다. 『선각자 단재 신채호』를 쓴 임중빈은 “영국의 셰익스피어, 인도의 타골과 간디는 물론 동서양의 인걸을 다 준다 하더라도 오직 한국인 단재 한 사람만을 끝까지 내놓을 수가 없다”고 대꾸하리라 하였다. 다음 시에서 단재 신채호의 애국정신을 가늠해 볼 것이다.
한나라 생각
나는 네사랑 / 너는 내 사랑/
두 사랑 사이 / 칼로서 베면 /
고우나 고운 / 핏덩어리가 /
줄 줄 줄 흘러 / 내려 오리니 /
한주먹 덤썩 / 그 피를 쥐어 /
한나라 땅에 / 고루 뿌리자 /
떨어지는 곳마다 / 꽃이 피어서 /
봄맞이 하리.
이 시는 단재의 대표작으로 볼 수 있는데 3장 시조에 1장을 더하였다.
단재 신채호의 영육(靈肉)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오로지 조국의 것임을 스스로 선언하고 지키며 일생을 다했다. 바라는 것은 강도 일본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하는 것뿐이었다. 외세에 의존해서 독립을 추진하다 또 다른 세력에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 완전한 독립을 성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서서히 준비하고 전열을 정비해서 독립하겠다는 가당치 않은 환상을 가지고 머뭇거리다가 모두 죽임당하기 전에 살인마와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 우리국민은 물론 일본이 강점하고 있는 동방 모든 민족이 가야할 유일한 선택임을 부르짖었다.
□ 단재의 소설
단재의 소설은 크게 전기소설과 몽환소설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소설은 대표적으로 『을지문덕』,『이순신전』,『최도통전』,『광개토대왕』등 우리나라의 위인전과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비롯한 외국작품의 번역물들이 상당수 있다. 몽환 소설은 미완성인 채로 주목을 끄는『꿈하늘』(1916년),『용과 용의 대격전』(1924년?)이란 단편소설이 있다.
단재의 소설관은 국민계도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처절한 현실을 두고 어떻게든 국민을 계도하여 민족을 구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따라서 전기소설들도 용맹을 떨치고 국운을 개척한 영웅전을 실감 있게 저술하고자 하였다. 몽환소설은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매국노들을 처단하는 힘과 용기와 의협심을 가진 독립투사들의 승리를 시원하고 재미있게 꾸민 작품이다.
단재가 처음 완성한『을지문덕』은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영웅적이고 용맹스런 전기를 서사적으로 박진감 있게 기술한 전기문학작품의 본보기이다. 원 제목은 『대동(大東) 사천재(四千載) 제일위인(第一偉人) 을지문덕(乙支文德)』이다. 역사를 비추어 보건대 동양에서 제일 위대한 영웅의 표본을 을지문덕으로 볼 수 있으므로 ‘을지문덕주의(乙支文德主義)를 생활화 해서 불퇴전(不退戰)의 용맹으로 왜적을 물리쳐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담아낸 것이다.
『이순신전』은 임진왜란 때 온갖 어려움과 불리함 가운데도 끝까지 나라를 위해 왜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하면서 장렬하게 순국한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전기소설이다. 『수군(水軍) 제일위인(第一偉人) 이순신전(李舜臣傳)』은 대한매일신보에 1908년 5월 2일부터 8월 18일까지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단재는 ‘이순신정신(李舜臣精神)’을 일으켜 왜적을 꺾는 충성심과 영웅적 무사정신을 발휘하여 나라를 구하자는 뜻으로 이 전기소설을 힘주어 쓴 것이다.
최도통전(崔都統傳)은 고려말의 대 영웅 최영장군 전기이다. 이 작품도 「대한매일신보」에 1909년 12월 5일부터 1910년 5월 27일까지 「위인유적(偉人遺蹟) 동국거걸(東國巨傑)」이라 관명(冠名)하였다. 최영장군이 고려 말 공민왕의 개혁정책을 비롯한 반원적(反元的) 요동정벌과 왜구의 침임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운을 타개하기 위해 앞장선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잃어버린 옛 땅을 찾고자 한 요동정벌의 성업(聖業)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실패하고 말았지만 북벌의 당위성과 민족 웅성의 가능성을 실현시키지 못한 여한이 남는 대목이다.
『꿈 하늘』은 ‘한놈’이란 주인공〔단재 자신〕을 환상적인 꿈의 세계에 등장시켜 한국사(韓國史)의 무대에서 구국의 웅지를 달성해가는 장렬한 과정을 6장으로 구성한 단편소설인데 이 작품도 결국은 미완성으로 막을 내렸다. 이 작품은 을지문덕, 강감찬 등 역사인물들을 등장시켜 외세와의 투쟁에서 실패할 때 자국민의 국가에 대한 죄악을 엄격하게 다스렸다. 지옥순옥사자로 등장한 강감찬 장군이 「매국 역적 탐관오리, 사이비 언론인, 일제의 주구 및 추종자등과 같은 국적(國賊)은 겹겹지옥, 줄줄 지옥, 강아지 지옥, 돼지 지옥, 야릇지옥, 나나리 지옥, 반신 지옥 등에 가두어야 하며, 도피주의자, 당파와 분열을 일삼는 자, 외래 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자, 외교론자, 준비론자, 사대주의자, 물욕에 빠진자, 사기 협잡꾼 등과 같은 망국노(亡國奴)들은 똥물지옥, 맷돌지옥, 엉금지옥, 댕댕이지옥, 어둠지옥, 단지지옥, 지짐지옥, 잔나비지옥, 가마지옥, 쇠솥지옥, 아귀지옥, 종아리지옥에 가두어야 한다.」 이 작품에서‘님나라’는 바로 단재가 그리는 나라이다. 이상적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이며 민족주의를 성취시키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운문(韻文)으로 표현한 내용들이 재치 있게 등장한다.
『용과 용의 대격전(大激戰)』은 무정부주의가 실현되는 과정을 엮은 혁명적 사상소설이다. 이상적인 민중 중심의 미래세계를 그린 소설로 단편적인 10개의 소재를 등장시켜 신화처럼 엮어 놓았다. 민중의 피와 뼈를 깨물어먹는 상제(上帝)와 그 심복 부하인 미리(龍)와 민중 편에 선 드래곤(용)이 서로 대립하여 격렬히 싸우는 용과 용의 대 격전에서 결국 민중의 혁명을 이끌어가는 해방자 드래곤이 승리를 거둔다는 뚜렷한 의의가 있으면서도 우화(寓話)적으로 엮은 소설이다. 이 소설의 두 용은 드래곤〔我 ․ 지상의 용․ 민중적 자아〕와 미르〔非我 ․ 천국 상제 ․ 흡혈적 지배자〕의 대결에서 드래곤은 장쾌하게 승리하고 상제(上帝)는 쥐구멍을 찾아가는 쥐새끼가 되었다는 통쾌한 줄거리로 엮어졌다. 작중 드래곤의 정체는 ‘0’으로 표현되는데 여기서 ‘0’은 숫자상의 0이 아니요 모든 숫자가 될 수 있는 무한대의 0이어서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기호이다. 드래곤의 상대가 되는‘0’은 다르다. 적인 0은 완전히 소멸된다. 제국도 천국도 자본가도 지배세력도 모두 소멸되어 없어지고‘0’이 되는 것이다. 그 불의가 모두 사라진 ‘0’의 세상에 드래곤은 모든 실상의 정의로운 승리자인 ‘0’으로 현신하는 것이다. 민중이 진정으로 원하는 민중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동방의 모든 민중이 함께 투쟁해 나가는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이데올로기를 위해 쓴 계몽적 작품이다.
□ 단재 신채호의 삶과 활동에 관한 주요 연보
1880. 12. 8 대전 중구 어남동 도리미에서 신광식과 밀양박씨의 둘째로 태어남..
- 7세 때 부친을 여의고 8세(1897년)에 고령신씨 집성촌인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하여 조부와 신승구(한학자)로부터 한학을 공부하다.
- 1898년 성균관에 입교하였으며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하다 한 때 투옥되다.
-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나라가 위급함에 향리에 산동학당을 개설하고 황성신문 장지연(張志淵)을 만나 논설위원으로 들어가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맹렬히 규탄하다 정간 당하자 이어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맡아 구국운동의 선봉에 서다.
- 1907년 역술서(譯述書)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이듬해 『을지문덕』 을 발표하고,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 결성 취지문 기초, 국채보상운동 홍보, 일본의 3대 충노> 규탄 문 연재, 독사신론(讀史新論) <대한의 희망> <대아와 소아> 발표, 수군 제1 위인 이순신전 연재 등 언론인으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다.
- 1910년 국치를 막을 수 없음을 판단하고 안창호, 이갑, 이종호 등과 <동사강목(東史綱目)>만을 들고 중국으로 망명, 청도로 가서 동지들과 <청도회의>를 개최하고 장차 독립운동방략을 논의하고, 노령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으로 가서 윤세복, 이동희, 이갑 등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 비밀결사활동을 벌리다.
1913년 병을 얻어 시달리다 상해로 가서 <박달학원>을 세워 청년교육에 힘쓰다.
- 1914년 백두산에 올라 경계를 확인하고, 남북 만주 일대의 고구려 고토를 떠돌며 광개토대왕 능과 발해의 옛 땅을 답사하다.
-북경으로 돌아와 1915년 『조선상고사』 집필을 착수하고, 만주 동포들의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재『조선사』를 발간하였으며 중편소설 『꿈하늘』을 집필하다.
- 1919. 2. 8 동경유학생들이 민족대회를 열고, 이어 3. 1일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나서, 4월 상해 임시정부수립에 단재도 참여하여 평정관,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었으며, 경성 국민대회에서도 평정관으로 선임되고 7월에 임시정부 제5회 의정원 회의에서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으로 피임되다.
- 3.1운동 이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단장으로 추대되고, 신문 <신대한> 주필이 되어 준열한 독립운동론을 폈으며,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비판, 대통령 선임 반대, 임시정부의 대의에 어긋난 점을 지적하다 신대한사건(新大韓事件)이 촉발되다.
-이회영 부인의 소개로 연경대학 의예과 유학중이던 박자혜 여사를 만나 재혼하다.
1921. 4월 19일 김창숙, 김원봉, 남공선, 이극로, 박건병, 서왈보, 배달무, 장건상, 등 54명의 연서로 이승만 등의 위임통치 청원이 민족의 자주성과 독립운동을 부인하는 반민족적 행위임을 규탄하는 성토문을 발표하다.
1922 『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조선사 연구 초』 집필하다.
1922년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참모 유자명의 간청을 받아들여 상해로 가서 6천4백여자에 달하는 명문 <조선혁명선언>을 완성하다.
1924년 생활고로 북경의 고찰 관음사에 입산 61일간 승려생활 하다.
1925년 동아일보에 <낭객의 신년 만필>을 비롯한 사론(史論)을 발표하다.
1927년 9월 국권회복을 위한 적극적인 항쟁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동방 무정부주의 연맹’에 가입하고, 1928년 4월 북경과 천진에서 개최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대회의 <선언문>을 기초 ․ 발표하고, 직접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1929년 49세로 대만 기륭항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대련 법정에서 10년 실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으로 이감, 죄수번호 411번 중죄의 사상범으로 독방에 수감되다.
-1931년 민세 안재홍과 경부 신백우의 주선으로 조선일보에 <조선사>와 <조선 상고문화사>를 연재하던 중 “일제의 연호를 쓰는 국내신문지상에 원고를 싣지 마라”고 당부하여 애국 인사들의 심금을 울리다.
- 1935년 건강악화로 형무소 당국은 보증인을 세우고 병보석으로 가출옥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친일파의 보증으로 석방을 원하지 않는다고 거절하고, 1936년 2월 18일 감옥에서 서울 가족 앞으로 「신채호 뇌일혈 생명 위독 의식 불명」이란 전보가 와서 주위 도움으로 부인과 두 아들 여순감옥으로 가서 2. 21일 면회를 갔으나 말 한 마디 못하고 오후 4시 감방에서 쫓겨나온 뒤 오후 4시 20분 단재는 홀로 비통하게 옥중에서 57세를 일기로 순국하다.
□ 맺음 말
단재는 다르다. 다른 것을 가르쳐 주고 깨우쳐주는 위대한 지도자이다. 그의 글이 살아있고 역사가 단절되지 않는 한 단재의 정신은 불멸의 존재이다. 단재가 다른 것은 매국노들과 다르며, 매국 역사관과 다르며, 일생동안 단 한 번도 휘거나 변하지 않은 것이 다르며, 이기심과 탐욕으로 대의를 저버리는 사람들과 다르며, 가난이나 병마나 어려움이 있어도 구차하게 구걸하거나 변명하거나 피신하는 사람들과 다르며, 용이 지렁이가 되는 비겁한 사람들과 다르며, 내로남불하는 사람들과 다르며, 사대주의나 편의주의를 취하는 사람들과 다르며, 정의와 애국으로 죽기를 피하는 사람들과 다르다. 단재는 정신적으로 떳떳하게 살아있다. 우리는 단재를 억울하게 만들고 있지만 그분은 스스로 억울해 하거나 사정하지 않는다. 단재가 탄생한 어남동 도리미 마을에서 탄생의 의미를 다시 발굴하고 국민정신으로 이어받기 위한 성역화 작업이 필요하다. 단재의 탄생지를 성역화 하는 것은 미완(未完)의 민족 주체성을 완성해 나가는 오늘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진심으로 단재가 숭앙(崇仰)하는 우리 민족의 모든 위인과 영웅과 민중이 함께 그곳으로 오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지면이 한정되어 바다에서 고래가 자맥질하듯이 단재의 정신사적 기록들을 극히 일부만 소개하면서 진지하게 탐구하시기를 권하고 글을 맺는다.
⹐ 참고문헌
신채호, 박기봉 역,『조선 상고사』, 비봉출판사. 2008.
신채호, 박정규 역,『단재 신채호 시 전집』, 기별미디어, 2013.
임중빈,『선각자 단재 신채호』, 형설출판사, 1986.
이덕남,『마지막 고구려인 단재 신채호』,동현출판사, 1996.
단재신채호 전집 간행위원회,『단재 신채호 전집』상․하권, 형설출판사, 1975.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조선 근대사』, 논장, 1988.
대전광역시문화예술과,『신채호의 사상과 문학』, 협성문화사. 1992.
외솔회,『단재 신채호』, 정읍문화사,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