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시집>(1946)
이 작품은 배경의 웅대함으로 처음부터 독자를 압도한다. 광막한 공간과 아득한 시간을 배경으로 강인한 지사적 의지를 노래한 작품으로, 웅장한 상상력과 남성적 어조 그리고 의연한 기품이 잘 나타나 있다. 제1연에서 3연까지의 내용은 광야의 원시적 순수성에서부터 무수한 세월이 흘러 강물이 길을 열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제3연까지가 이 시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자기 존재의 역사적, 사회적 규정성을 인식함으로써, 스스로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나아가 실천적 행위로써 연속될 윤리적 결단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제4연에서는 현재적 상황이 그려지고 있다. 아무도 없는 광야, 더욱이 눈 덮인 겨울의 광야에 서서 무한한 과거의 시간과 먼 미래의 시간을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은 고독한 것이면서 강인한 의지를 더욱 곧게 세우도록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고독감과 긴장된 의지의 경지가 매화향기라는 사물을 통해 암시된다. 여기에는 매화를 추위 속에 피어나는 매서운 기개의 상징으로 여긴 전통적 연상이 관계되어 있다. 그러면서 '노래의 씨'를 뿌린다. 일체의 생명이 용납되지 않는 냉혹한 시련의 상황에서 생명의 씨앗을 뿌린다는 다소 무모하기 짝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확고한 신념이 바탕이 되어 있다고 보이며 비장감이 느껴지게 한다.
이렇게 뿌린 노래의 씨를 거둘 사람이 바로 5연에 나오는 '초인'이 아니겠는가? 초인은 단순히 '조국광복'의 의미로 해석되기보다는 조국의 밝고 무한한 미래를 짊어지고 갈 투사들, 지사들의 모습이 아닐까?
이육사는 일제 강점기의 현실을 극복하려 했던 대표적인 저항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항 시로서 그의 시는 무엇보다도 투철한 현실 인식과 강한 신념에서 비롯된다. 즉, 시간적으로는 아득한 천고와 미래의 사이, 공간적으로는 만물이 눈에 덮인 광야에 홀로 서 있는 극한 상황에서, 그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장엄한 미래에 대한 기대뿐이다. 이러한 극명한 현실 인식과 조국 역사의 미래에 대한 신념이 있었기에 자기희생이 가능하였고, 저항적·지사적 결의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광야'에 드러난 강렬하고도 남성적인 시어들은 바로 이러한 주제 의식을 형상화하기 위한 시인의 의도를 담고 있다.
육사 시가 갖는 우리 문학사, 특히 시사적 의미는 다음 몇 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첫째, 1930년대 전반을 풍미하던 모더니즘의 비인간화 경향에 대한 비판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둘째, 고전적인 선비의식과 한시의 영향으로 전통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셋째, 한국시에 남성적이고 대륙적인 입김을 불어넣었다. 넷째, 죽음을 초월한 저항 정신과 시를 통한 진정한 현실 참여를 보여 주었다. 특히 넷째 측면은 윤동주의 시작과 함께 일제 말 우리 민족 문학의 공백기를 메워주는 중요한 성과라고 할 것이다.
이육사(본명 이원록)는 1904년 음력 4월 4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퇴계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이 시절 선비의 자녀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육사도 다섯 살 때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우는 등 어린 시절에는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맡고 있던 보문의숙(寶文義塾)에 다니기 시작한 열두 살 이후(1905) 백학서원을 거쳐(19세) 일본에 건너가 일 년 남짓 머물렀던 스무 살(1923) 무렵까지는 한학과 함께 주로 새로운 학문을 익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25년 그는 항일투쟁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한다. 6.10만세사건이 일어난 1926년 북경에 갔다가 다음해 귀국한 그는 장진홍 의사가 일으킨 대구은행 폭파사건의 피의자로 붙들려 형님 및 동생과 함께 옥에 갇혔다가 장진홍 의사가 잡힘으로 석방되었지만 같은 해 10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또 예비 검속되기도 한다. 1931년 북경으로 다시 건너간 육사는 이듬해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에 들어가서 두 해 뒤에 조선군관학교 제 1기생으로 졸업한다.
그는 이 시절에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언제 대학을 졸업했는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1943년 일본 형사대에 붙잡혀 해방을 일 년 남짓 앞둔 1944년 1월 북경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무려 열일곱 번이나 옥살이를 했다. 육사(陸史)라는 그의 호는 그가 스물네 살 되던 해인 1927년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그이 죄수번호가 264번이어서 그것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육사는 투쟁론의 입장에 선 독립운동가이며 또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저항시인이다. 1933년 {신조선}에 [황혼]을 발표하며 등단하였으나 작품 수가 많지 않고 문단활동도 별로 하지 않았다. 시대의 질곡(일본의 식민통치)에 대결하는 강인한 정신을 정제된 시형식으로 표현한 점이 그의 시가 지닌 특징이다. 유고시집으로 그의 동생 이원조가 출간한 {육사시집}(1946)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