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비행·운전·컴퓨터 작업, 임신부·경구피임약 복용땐 특히 혈액 응고 촉진돼
'양반과 상놈'의 계층 차이를 전제로 한 이른바 '반상의 구별'은 현대사회에서 없어진지 오래된 악습. 그렇지만 여전히 사회에서는 조금 품위있고 귀티나는 사람을 양반이라고 부르는 등 '양반 문화'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허리를 쭉 펴고 발을 포개서 앉는 '양반다리'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전문의들은 이런 자세에 대해 단호하게 손사래를 친다. 양반다리를 오래 하다 보면 다리 쪽의 피가 심장으로 올라 가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로 인해 하지 심부정맥혈전증이 생겨 폐동맥 색전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퉁퉁 부은 다리는 건강에 적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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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강덕철 기자 |
'색전'은 혈관 내에 생긴 핏덩이(혈전)가 혈관을 따라 흘러가다가 말초 혈관을 막는 현상을 일컫는다. 인체 내의 혈액은 동맥에서 정맥으로 흐르는데, 정맥혈은 폐동맥으로 들어가 산소를 얻은 뒤 다시 심장을 통해 전신의 동맥으로 옮겨간다. 이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혈전이 폐동맥으로 들어가 혈관을 막아 버리면 피가 심장에서 폐로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 자연히 심장의 압력이 상승해 폐동맥 고혈압이 발생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저산소증이 유발되면서 호흡 곤란이 온다. 이를 폐동맥 색전증이라고 한다.
이 질환의 가장 큰 요인은 하지 심부정맥혈전증이다. 하지 정맥은 크게 피부 밑의 표재성정맥과 다리 근육 밑에 깊게 자리하고 있는 심부정맥으로 나뉜다. 이들은 피를 다리에서부터 심장까지 옮기는 역할을 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두 개의 정맥에 혈전이 생겨 피가 잘 흐르지 않으면 다리가 붓고 통증이 생긴다. 이 중 표재성정맥이 막히면 다리 혈관이 튀어나오거나 푸르게 비치며, 심할 경우 정맥이 손으로 만져지기도 한다. 반면 생명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이에 비해 심부정맥이 막히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갑자기 다리가 심하게 붓고 걷기가 불편한 것은 그만 두고라도 무작정 방치하게 되면 폐동맥 색전증을 가져와 목숨마저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질환의 주요 증상은 심한 통증과 피부 변색, 정맥 돌출, 피부 열감 등이다.
하지 심부정맥혈전증이 발생하는 이유는 인체의 구조와도 관련이 있다. 동맥에는 심장의 활발한 운동으로 인해 튀어나온 혈액이 흐르고 있어 압력이 강하고 속도도 빠르다. 반대로 하지와 복부 쪽에 있는 정맥은 동맥에 비해 압력이 약한 데다 사람 몸 안에서 순회를 한 뒤 심장으로 다시 돌아갈 때는 밑에서 위로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흐름도 느리다. 또 자칫하면 혈액이 역류할 수도 있다. 이를 막기 위해 정맥에는 판막이 있지만 다리 쪽의 압력이 부족해 피가 거꾸로 흐르면 판막의 기능에도 한계가 있다.
■심부정맥혈전증은 현대병
이 질환의 원인은 다양하다. 우선 운동부족으로 다리 근육의 사용이 크게 줄어들면 발병의 위험성이 높아진다. 다리를 꼰채 오랫동안 앉아 있거나 서 있어도 원할한 피의 흐름을 막아 혈전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육체노동이 주를 이루던 과거에는 폐동맥 색전증이 거의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장딴지나 허벅지 근육이 활발하게 수축작용을 해 다리의 피를 힘차게 올려 준다면 정맥혈전증은 염려할 것이 없다. 전문의들이 장딴지나 허벅지 근육을 '제2의 심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됐다.
고기나 기름기 많은 음식을 섭취하는 현대의 식생활습관 역시 발병과 관계가 있다. 이런 음식은 피를 탁하게 하고 쉽게 응고를 시켜 원활한 흐름을 막는다. 임산부도 하지 심부정맥혈전증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임신으로 인해 복부의 압력이 증가하면 다리 쪽에서 올라오는 피가 폐 또는 심장으로 가는 것이 어렵게 된다. 큰 수술 후 별다른 몸 움직임없이 장기간 누워있어도 이 질환이 올 수 있다. 스테로이드 호르몬 제제, 항암제, 경구피임약들도 정맥 혈관 내에서 혈전을 만드는 혈액 응고를 촉진하는 수가 있어 주의를 해야 한다.
이밖에 심부정맥혈전증을 불러오는 위험요소로는 장시간 비행기 여행이나 운전, 지나친 인터넷 게임 몰두 등이 거론된다. 의료계에서는 며칠간 PC방에서 쉬지 않고 게임을 하다 돌연사하는 청소년들의 경우, 사인의 상당수가 이 질환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 심부정맥혈전증 치료는 1주일이 고비다. 이 기간 내 헤파린을 사용해 혈전을 녹이면 효과가 좋다. 거의 후유증도 남지 않는다. 만약 이 기간이 지나면 풍선 혈전 제거술, 약물 치료 등을 동원하지만 큰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만성질환으로 진행되는 수가 많다. 이렇게 되면 혈전이 판막과 혈관 벽에 달라 붙어 하지 정맥 내 판막의 기능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평생 보행장애가 따라 다니게 된다.
하지 심부정맥혈전증은 예방이 아주 중요하다. 일상 생활에서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가벼운 걷기를 자주 하고, 누운 자세에서는 양다리 아래에 베개를 받쳐 심장과 비슷한 높이로 들어주는 것이 좋다. 오랫동안 운전을 할 때는 잦은 휴식시간을 갖고, 장거리 비행기 여행시에는 가끔씩 일어나 다리를 풀어줘야 한다. 또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지 말고 1~2시간마다 자세를 바꾸는 것도 질환 예방에 도움이 된다.
도움말=우종수 동아대병원 흉부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