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세상을 뒤흔드는 '두 손 문화'의 탄생
두 손은 우리가 뭔가를 직접 만드는 일을 할 때 반드시 필요한 도구다. 그래서 도구를 만드는 손은
문명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완제품의 단순한 소비 문화가 발전하면서 두 손은 찬밥 신세가 되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사이버 문화가 발달하면서 두 손은 최후의 카운터 펀치를 맞았다.
컴퓨터를 사용함에서 한 손 문화의 상징은 마우스다. 손가락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듯 보인다. 그러나 마우스 문화는 이미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이고 클릭할 때에만 번성하는 수동적 방식의 문화다. 만일 당신이 문서를 만들고,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뭔가에 대해 주장하려고 한다면 마우스를 버리고 다시 두 손으로 자판을 두들겨야 한다.
사이버 세계로 들어간 두 손이 자판을 두들기며 만들어낸 것 중 소비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상품에 대한 구매자 리뷰일 것이다. 소비자의 의견은 상품의 인기를 좌우했고, 생산자는 소비자
의 의견을 상품에 반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단지 소비자일 뿐이었지만, 생산자에게 압박을
가해 상품을 변모시키는 프로슈머(Prosumer : 생산에 참여하는 소비자)가 되었다.
두 손은 두 가지를 상징할 수 있다. 하나는 기존의 소비 문화와 소비- 생산 관계에 대한 저항(소극적
이든 적극적이든)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시간을 소비해가면서 하는 참여이다. 그러므로 두 손 문화
는 기성 소비문화에 대한 저항 성향이 참여의 형식을 통해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시간을 들일 여유와 적당한 소득 수준이 가능할 때에 일어난다. 여유와 소득은 두 손
문화를 번성시키는 에너지이자 이것을 새로운 트렌드로 만드는 힘이다. 한국 경제가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맞이했다는 것은 두 손 문화의 번성을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된다.
꾸미기 열풍이나 복고 상품에 대한 애착은 완제품 소비에 대한 비교적 소극적인 저항이라고 할 수 있
다. 이에 비해 좀더 적극적인 저항이자 자기 실현의 수단으로서의 소비도 있다. 바로 DIY(Do It
Yourself)이다. 1990년대 초반 국내에 소개될 때부터 DIY는 일종의 여가 활용, 혹은 취미 활동이었다.
완제품 구매에 싫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반제품 상품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에 와서 또 한 번
성격 변신을 하게 된다. 마침 소비자의 능동성이 여러 방면에 걸쳐 강화되고 있는 사회 분위기와 인
터넷을 통해 DIY 정보를 쉽게 습득하고, 동호인들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 크게 한몫 했다. 완제품 소
비문화에 대한 저항의 성격과 함께 소비 시간을 자기 표현의 시간으로 전환하려는 문화 운동의 성격
을 띠게 된 것이다.
소비자들의 참여와 저항은 소비- 생산의 일반적인 관계도 바꿔놓는다. 프로슈머들은 맹렬히 전화를 걸
어대고, 시위를 조직하고, 불매 운동을 벌이고, 사이버 세상에서 눈부신 타자 실력을 뽐내며 두 손을
놀려댄다. 한 홈쇼핑 회사는 깐깐한 고객들의 모임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그들의 제안은 상품평을 넘
어서 경영 정책에도 반영되고 있다. 깐고모(깐깐한 고객들의 모임)는 일시불 3% 할인 정책, 방송에
등장하는 디스플레이의 개선, 시청자에게 방송편성 정보를 수시로 제공하자는 제안이 실현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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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바라보고 있다.
소비자는 진화했다. 그래서 기업들도 소비자를 피드백의 테스터 정도로 바라보던 종래의 태도에서 진
화하여 사업 파트너로 격상시켰다. 능동적 소비자들이 생산의 지형을 어디까지 변화시킬지는 아무도
모른다. 소비자가 요구하면 기업은 응해야 할 것이다. 다 만들어놓은 제품도 소비자가 요구하면 수정
해야 할 것이다. 인기 외화 드라마 <X- 파일>의 출시사(폭스코리아)가 <X-파일> 동호회들의 압박에 못
이겨 한글 더빙판을 만든 것이 그 예다. TV 방영 때는 없던 무삭제판이라, 멀더와 스컬리의 목소리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추가로 녹음까지 해야 했다. DVD 판매업체의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임의 접속' - 굴레 없는 관계 맺기
인터넷 커뮤니티 다음(www.daum.net)의 회원수를 개설된 카페 수로 나눠 보면 1인당 7개가 약간 넘는
카페에 가입되어 있다. 인터넷 동호회 600만 개 시대, 우리의 관계 맺기 방식은 임의적 방식, 즉 제
뜻대로 이루어지는 관계 맺기 양상으로 변화했다. 정과 관습에 연연하지 않고 필요와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접속과 해제를 되풀이하는 관계 맺기가 보편화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접속의 공간 또한 임의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주어진 가치 체계와 코드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경향은 비즈니스 세계에도 변화를 일으
킨다. 독일의 미래학자 군돌라 엥리슈는 『잡노마드 사회』라는 책에서 직업을 따라 떠도는 새로운
비즈니스맨들의 등장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은 한 직장, 한 업종에 얽매여 살기를 거부한다.
임의의 사전적 풀이는 내 뜻대로 하는 일이다. 가족과 직장이라는 우리 삶의 가장 원초적 대상과의
새로운 연결 방식에서 보듯, 이제 나와 나 이외 모든 것들의 연결은 주체적 선택의 중요성이 강조되
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임의 접속의 문화가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고,
우리 모두는 임의적 접속자(Optical Connecter)'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임의 접속의 시대에는 삶의 경량화가 화두가 된다. 유목민은 언제라도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으며, 짐
이 되는 것들을 기꺼이 버린다. 그러므로 소유보다는 경험이야말로 그들이 욕망하는 대상이 된다.
이전 시대의 자산이 토지·노동·자본 따위였다면 새로운 시대의 자산은 정보·기술·지식과 같은 무
형의 것이다. 이 새로운 요소들은 모두 활발한 이동과 탐색을 통하여 좀더 높은 질과 많은 양을 얻을
수 있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새 시대의 성공적 비즈니스의 표상은 사무실 크기와 비서의
숫자가 아닌 항공 마일리지와 활동 공간의 이동 가능성으로 변동하고 있다.
임의 접속 시대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생존의 극한점을 여행하는 기업 차원에서도 새로운 짝짓기 양
상을 촉발시키고 있다. 이른바 셰어링(Sharing)'이 새로운 경영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예컨
대 삼성과 풀무원은 김치냉장고를 위해 공동으로 태스크포스 팀을 구성했다. 가전업계의 대표적 라이
벌인 삼성과 LG마저도 서로의 제품을 공유하고 있다. 삼성은 LG에 캠코더를, LG는 삼성에 식기세척
기와 가스오븐레인지를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납품하고 있다. 이런 임의적 접속이 가능
한 것은 부족한 자원을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다. 셰어링이란
발빠른 시장 선점을 위해 달려가는 노마드적 경영 기법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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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 시장에서 기업과 개인 쌍방 간에 이루어지는 임의적 접속 방식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뚜렷한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기업은 핵심 역량을 보존하는 가운데 부가가치가 적은 사업 영역을 아
웃소싱 하고 있다. 여기에 시간제 취업, 계약 근로제, 파견 근로제, 재택 근무제 등 고용 형태의 다변
화를 추구하며 전통적인 노동 방식의 경계를 앞장서서 뛰어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통계청의 경제활동 인구조사를 중심으로 10년간(1993년∼2002년)의 노동시장 변화
를 추적한 결과를 보자. 정규직 임금 근로자가 1993년 642만 명에서 2002년 629만 명으로 2.0% 감소
한 반면, 비정규직 임금 근로자는 477만 명에서 719만 명으로 거의 50%나 급증했다. 대기업, 중소기
업, IT 기업을 망라하여 기업들의 프리랜서 의존률은 어느덧 24%를 넘어서고 있다. 이는 직업 활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기업과 연결되어야만 하던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구체적 일감에 따라 임의적 접
속을 되풀이하는 새로운 직업 활동의 방향을 드러내준다. 일거리 중심의 노동 문화는 질 높은 전문
성 갖추기라는 또 다른 특질을 만들어낸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미래의 노동성격 변화를 이렇게 예측하고 있다. 앞으로 노동은 삶과 일
이 결합된 형태가 되리라는 것이다. 일과 놀이, 일과 취미 활동의 구분이 사라지고 생활 자체가 곧
일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러한 흐름은 비단 직장과 고용 형태만이 아니라 노동 자체의 임의적
성격 역시 강화할 것이다. 직장이라는 닫힌 공간을 떠나 일상적 생활 자체가 부가가치 생산 활동이
되고, 일상공간 자체가 생산의 장이 되는 것, 바로 임의 접속 시대의 새로운 직업 풍속도이다.
2부 성공의 꿈과 욕망이 빚은 자본주의적 트렌드
네버랜드(Neve rland) 러시
네버랜드(Neverland)'는 『피터팬』에 나오는 신비한 섬이다. 거기서는 아무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 오
늘날 거의 모든 세대가 젊게 살기라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예전부터 장수(長壽)의 꿈은 늘 존재해왔
지만, 이제 단순히 건강하게 오래 살기가 아니라 오래오래 젊게 살기로 바뀌어가는 형국이다.
성형외과 의사들에 따르면, 지난 외환 위기 이후 병원을 찾는 중년 남성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살아
남기 위해 성형 수술을 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일반적으로 은퇴 직후 건강에 이상이 생기거나 노화
가 빨리 찾아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계속되는 고용 불안으로 조기 은퇴는 점점 늘어나고, 급기야
2003년, 38선이란 유행어를 낳으면서 30대 조기 퇴직이 최대의 뉴스로 떠올랐다. 직장생활이 이렇게
짧아지는 것과는 달리, 평균 수명은 또 상대적으로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어떻게든 현장에서 살아남기
경쟁을 해야 하거나 기나긴 2막 인생을 준비해야 하는 이런 상황에서 젊게 살기 혹은 젊어지기 바
람이 부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 노력은 금을 찾아가는 골드 러시에 비견할 만한 네버랜
드 러시(Neverland Rush)인 것이다.
젊어지기 위해, 건강해지기 위해 사람들은 달린다. 일반인들이 참가할 수 있는 최근의 크고 작은 마라
톤 열풍은 중년의 늦바람에 힘입은 바 크다. 이들은 무조건 시간 안에 완주해야 하는 일반 마라톤이
아니라 천천히 즐기면서 달리는 엔터테이닝 마라톤을 선호한다. 달리기를 하면 골다공증, 유방암, 비
만의 발생률이 현저하게 낮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그들의 달리기를 더욱 부채질한다. 심폐 기능이 향
상되고 혈압이 안정되며 심장 근육도 강화되는 최고의 운동 아닌가? 게다가 미용에도 효과가 있다니
안 달릴 수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취감이 가장 큰 보람이다. 스포츠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무기력
- 6 -과 자기 비하,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 달리기만큼 좋은 운동이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 젊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최근 30∼50대 직장인들 사이에 불기 시작한 운동 열풍은 전국적인 현상이며, 생활 패턴까지 덩달아
바뀌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제 기업에서도 건강 열풍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체력이 국력이듯
이, 사원의 젊고 건강한 몸이 곧 사력(社力)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현대중공업은 울산 본사에
380여 평 규모의 건강증진센터를 열었고, 삼성 SDS도 최근 경기 분당 하이테크센터에 70평 규모의
헬스 센터를 열었다. 또 매주 월요일마다 모든 임직원들에게 CEO의 월요 편지'를 보내 건강관리 비
법을 전파하기도 한다. 좀더 경제력이 있는 개인의 경우, 또 다른 방식의 몸 만들기를 시도한다. 언제
부터인가 불기 시작한 웰빙(Well- being) 붐을 타고, 안팎으로 건강한 몸 만들기가 유행이 된 것이다.
그들의 식단을 보자.
아침 식사를 거르지 않는다. 되도록 고기를 피하고 야채와 생선을 즐겨 먹는다. 샐러드 드
레싱은 걸쭉한 사우전드 아일랜드 대신 묽은 오일 앤드 비니거를 택한다. 한 달에 한
번은 필드에서, 세 번은 실내 연습실에서 골프를 친다. 비타민 C가 들어있는 영양제를 하
루에 4차례 먹는다.
비용이 만만치 않겠지만 그들은 아낌없이 돈을 투자한다. 왜? 젊어지고 건강해지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없기 때문이다. 경기가 불안할수록 건강 관련 업종이 호황을 누린다고 한다. 믿지 못할 경제 상황,
불안한 미래가 사람들의 심리를 위축시키고, 결국 몸이 재산이며 믿을 건 몸뿐이라는 인식이 높아진
다는 것이다. 1994년 7,990억 원이었던 건강 기능식품 시장은 2002년 약 1조 5,000억 원으로 성장했다.
전문가들은 국민소득(GDP)이 1만 달러를 넘고 본격적인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건강 기능식품 시
장이 매년 20% 가량의 성장세를 이어나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 식품 관련 시장뿐인가.
끝없이 증폭되고 있는 건강 바람은 거리의 풍경도 바꿔놓았다. 찜질방이나 마사지 숍, 피부 관리실,
스파 센터 등 전에 못 보던 간판이 거리를 수놓고 있다.
생명공학계는 한 번의 성공으로 일약 갑부로 도약하려는 꿈을 가장 빨리 실현할 수 있는 분야이다.
영원한 젊음을 가능케 해주는 약 하나면 빌 게이츠가 부럽지 않을 것이다. 게놈학의 발전은 개인의
맞춤의학 시대를 뜻하며, 결국 질병 퇴치 및 수명 연장의 꿈을 실현시켜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류 최대의 프로젝트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현대인들의 젊게
오래 살기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이는 구체적인 동기가 되고 있다. 과연 생명공학도들의 신약이 네버
랜드의 입장권이 될 것인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그 입장권이 아무리 비싸도 우
리는 기꺼이 지갑을 열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객 존중을 넘어선 메모리 마케팅
적절한 수요량을 예측할 수 없는 기업들 간의 경쟁은 수요가 예상 외로 하락하면 언제든지 공급 과잉
상태가 된다. 공급 과잉이야말로 자본주의에서 기업이 고객을 왕으로 모시는 근본 원인이다. 최근 고
객 관리의 방법으로 각광받는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 고객관계 관리) 등은 근본적
으로 공급자들의 경쟁 과잉이 잉태한 공급 과잉 스트레스의 결과물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기업들
은 상품을 더 잘 팔기 위해서는 고객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객의 욕망, 그의
버릇, 그의 가치관, 심지어는 그의 입냄새까지도. 기업들은 고객에 대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록하고
- 7 -기억했다가 필요할 때 가장 유용하게 써먹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마케팅 경쟁의 핵심은 어느 공급
자의 고객 기억력이 더 완벽하고 효율적인가에 달려 있다. 그래서 이것을 메모리 마케팅(Memory
Marketing)'이라고 한다.
첨단 시스템은 고객에 관한 거대한 기억 창고가 되고, 기억 창고의 완벽함은 그대로 회사의 마케팅으
로 연결될 것이다. 완벽한 기억력, 이것은 공급 과잉의 구조적 한계를 안고 가는 기업들의 궁극적 지
향이 될 것이다.
기억력 강화의 선두 주자는 전자 기억력을 갖춘 웹사이트들이다. 그들은 로그인이라는 절차를 통해
고객에 대한 기본 정보를 얻는다. 이후부터는 고객의 클릭 하나하나가 고객에 대한 정보로 기억된다.
세계적인 서적 판매 사이트였던 아마존(www.amazone.com)은 한 번 주문한 고객이 다시 방문하면 자
동으로 그 고객을 기억하는 기능을 최초로 마련했다. 100명이 찾든 1,000명이 찾든, 전자 기억력의 한
계는 무한하다. 고객의 선택들은 그대로 고객 취향의 분석에 필요한 기억 소자가 되고, 다음에 방문하
면 그 소자들을 활용해 부가적인 상품들을 추천할 수 있다.
서울대병원 강남검진센터는 최첨단 장비를 갖춰놓고 맞춤 서비스를 제공한다. 편안하게 휴양도 하고
숙박도 하면서 건강진단을 받는 숙박 건강진단은 비용만 200만∼300만 원에 이른다. 일대일 서비스
가 가능하니까 고객에 대한 병원측의 기억력은 탁월할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탁월한 기억력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지출 여력이 있어야 한다. 메모리 마케팅은 고객을 일일이 구분함으로써
필연적으로 고객을 차별하는 마케팅이다. 그리고 제대로 차별해야 부자들의 넉넉한 호주머니 구경을
할 수 있다.
우리 시대 소비자들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기성복 고르듯 하는 소비에 싫증을 느끼게 된 것이다. 따
라서 기업이 고객에 대한 완벽한 기억력을 갖춘다 해도, 생산 측면에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느냐 하
는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된다. 완벽한 주문 생산만이 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으니까…. 결국 마케팅
이 완벽한 기억력의 세계를 지향한다면, 거기에 걸맞는 생산 측면의 짝은 주문 생산이 된다.
이런 새로운 생산 방식의 선두 주자이자 가장 확실한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델(Dell) 컴퓨터다. 미
국 대기업의 최장수 CEO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마이클 델이 1984년 델 컴퓨터를 만들었을 때, 그의
아이디어는 컴퓨터 솔루션의 직거래였다. 중간유통 단계를 줄이겠다는 발상이었다. 이후 델은 성장을
거듭하여 1996년에 전자상거래를 시작하면서 업계를 이끌더니, 마침내 1998년 대량맞춤 생산방식에
의거한 온라인 판매라는 모델로 엄청난 양의 컴퓨터를 팔아대기 시작했다. 델 컴퓨터의 고객들은 델
의 제품 라인들 중 자기의 기호에 맞게 시스템을 선택한 후, 가격을 확인하고 온라인 상에서 주문했
다.
모든 상품이 대량 맞춤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메모리 마케팅의 짝으로서 생산양식 부문의 대
량 맞춤이 효과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고객의 다양한 욕구를 생산 차원에서 조응해
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고객의 요구는 선택의 폭과 다양성 면에서 더 높은 수준을 필요로 할 것이
다. 대량맞춤이 새로운 정보통신 기술과 생산조립 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결과였듯이, 앞으로 어떤 신
기술이 출현해 고객의 다양한 욕구를 100% 만족시킬지는 아무도 모른다.
- 8 -
3부 오래된 과거를 깨고 나오는 한국인
충동조절장애 증후군과 불신 사회
충돌조절장애(Impulse Control Disorder)는 병적인 징후가 있는 도박, 방화, 도둑질, 머리카락 쥐어뜯기
등과 모든 종류의 중독(쇼핑, 마약, 인터넷)을 포함한다. 본능적 욕구가 너무 강하거나 자기방어 기능
이 약해져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증세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이와 유사한 준(準)환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무한 경쟁은 이미 우리 사회의 주류적 체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취업 스트
레스에서 보듯 경쟁의 강도가 높을수록 스트레스는 쌓여만 가고, 황폐해지는 인간의 내면이 있다. 또
권력 집단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불신이 축적되면서 사회적 울화가 깊어졌다. 이러던 차에 군사 문화
적 권위 구조가 해체되고 수직적 상하서열 사회에서 수평적 네트워크 사회로의 이동 등 권력 이동기
에 억눌려왔던 충동이 뚫고 나갈 틈이 생겼다. 민감한 주제에 대해 인터넷 게시판에 쌓이는 리플들이
폭력적 언어로 점철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 문화의 번성도 충동을 억제할 필요
가 없는 공간을 제공한 셈이다.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을 쓴 홍세화 씨는 프랑스인들의 톨레랑스(Tolerance : 프랑스어로
약자에 대한 자비, 다름의 존재에 대한 인정, 관용, 용서, 화해를 뜻함) 의식이 한국 사회에서도 필요
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 톨레랑스가 필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르상티망(Ressentiment : 원한, 증오, 질
투 같은 감정이 반복해서 마음에 쌓인 상태를 말하는 프랑스어)의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충동에
이끌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곧 르상티망, 즉 한국 사회에 누적된 금기 사항들이 많다는 의미가 된
다. 르상티망의 사회에서 톨레랑스의 사회까지, 그 건널목에는 수많은 충동조절장애의 징검다리가 있
을 것이다. 단번에 건너 뛰고 싶겠지만 우리가 억압과 금제(禁制)를 풀기 위해 쌓은 내공은 아직 충분
하지 않다.
금기와 절대 권력에의 귀의로 충동을 억제한 한국인이 그나마 국가 권력이나 국민들에게서 지원받은
이데올로기는 경제발전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로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은 미움받는 한국인
이다. 한 신문은 한국사회 신뢰위기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사례들을 다뤘다.
지난 8일 제프리 존스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은 신뢰 부재가 한국의 가장 큰 문제라며
한국 사람들은 나만 이겨 살아남으려고 생각하는데 그런 전략으로는 거래가 지속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지난해 아르헨티나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싫은 외국인 2위로 꼽혔고,
인도네시아에서는 각종 법규 위반으로 강제 추방된 외국인으로 한국인이 1위를 기록했다.
최근 멕시코의 유력 일간지 「레포르마」는 한국 이민사회에 대한 특집 기사에서 멕시코
시티 후아레스 구역은 여러 국가 이민자들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지역이었으나 한국인들이
들어온 뒤부터는 이웃간 정이 깨진 불만이 가득한 지역이 됐다고 성토했다. 이 신문은 더
나아가 한국인들은 공존하기가 매우 어려운 민족이라고까지 하며 한국인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을 드러냈다. - 「한국경제」2002년 2월 11일
내부로부터의 불신 때문에 자국 경제가 어려워진 일본과 마찬가지로, 외부로부터 미움받고 신뢰받지
못하는 한국인 역시 내부로부터의 불신이 경제침체의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한국인은 지금 충동
조절장애의 빅뱅과 국내외적 불신 사회라는 이중고를 안고 있다. 둘 다 억제와 금기의 르상티망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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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기보다는 위로해주는 인간 관계가 자살·가출·이혼·폭력 등의 충동을 치유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그런 관계가 소비 사회에 침투할 여지는 있는 것일까. 아직 미흡하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신뢰 마케팅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현대백화점 매장에는 가끔 이런 공지문
이 나붙는다.
오늘 딸기는 산지 우천 관계로 당도가 떨어지고 조직이 다소 무릅니다. 수박, 참외는 아
직 제철이 아니어서 당도가 낮습니다. 왜 이런 불리한 공지문을 내거는 것일까? 오직 신뢰를 위해서
다. 실제로 「매일경제」가 주관하는 매경 주부 모니터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2003년 6월), 현대백화
점은 다른 기업들을 제치고 식품의 맛과 신선도에서 1위를 차지했다. 중소 기업인 신진메디칼은 모발
전용비누인 인디모를 출시하면서, 2개월 이내에 효과가 없으면 전액 환불해주는 신뢰 마케팅으로
2003년 상반기 동안 매달 3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개가를 올렸다.
현대의 소비 사회는 기호와 상징의 소비 사회다. 충동적 행동들, 자기 이외의 모든 타인에 대한 불신
이 사회 곳곳에서 우리 사회의 안전을 허물어뜨리는 중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신뢰야말로 소비자들
이 원하는 새로운 기호다. 절반에 가까운 국민이 기업에 대해 불신을 표시하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우리 사회 르상티망의 절반쯤은 사라지지 않겠는가?
금기를 깨고 쾌락하기
홍수처럼 쏟아지는 미디어의 정보들 속에서 어른들의 시선이 가장 쏠리는 것은 성에 대한 각종 통계
와 현상들이며, 그것은 늘 숨가쁜 질주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관습과 법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행위는 비단 성적 일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류 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도 내
에서의 가벼운 앙탈에서부터 폭력적인 일탈에 이르기까지, 마치 사회 전체가 금기 깨기에 도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은 데서부터 고정관념이 깨지는 예를 보자.
수십 년 동안 우유=흰색이라는 불문율이 유지되어온 우유 시장을 보자. 검은색을 절대로 쓰지 않던
금기를 깨고 롯데우유가 출시한 검은콩우유는 대박을 터뜨렸다. CJ의 가쓰오우동 , 동원 F&B의 야끼
소바 같은 일본어 브랜드도 등장했다. 일본이라는 금기가 상당한 속도로 해체되고 있다는 증거다. 노
골적인 부의 추구를 천시하던 분위기도 급격하게 일변했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 의 광고카피에서부
터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류의 책이 봇물처럼 쏟아지면서 부자 욕망 깨우기가 절정에 달했고, 그
이후로는 절대로 그 이전과 같을 수 없어졌다.
우리는 외부의 누군가가 던져놓은 금기 앞에서 본능적으로 반항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 누군가
가 권위 있어 보일수록 금기를 더 잘 지킨다. 하지만 사회적 강자들에 대한 불신은 누적적으로 쌓여
이제 더 쌓일 곳이 없다. 불신은 바른 생활을 무시하게 만드는 사회 심리적 토대이며, 민주화 과정에
서 군사 정권이 낳은 독재적 통치 체제의 그림자(공포와 굴종의)를 거의 벗게 된 요즘, 이 불신은 불
만의 폭발로 나타나고 있다.
바른 생활을 통해서는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고 믿을 때, 그것은 괴로움이 된다. 예정된 미래를 따라가
거나 유행을 좇다가는 진정한 나를 발견하지 못한다고 믿게 될 때, 우리는 절망한다. 정해진 틀, 넘지
말라는 금을 믿는 한 우리는 쾌락의 부재를 경험할 뿐이다. 그래서 금을 밟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금기를 넘어서 쾌락을 향해 질주하는 집단 이동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금기를 깨고
- 10 -쾌락하기라는 트렌드가 된다.
좀더 일상적이고, 좀더 영구적으로 나를 표현하고, 또 다른 나를 찾는 그 무엇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 중 하나는 패션이요, 또 하나는 몸이다. 현대 M카드의 광고에는 짧은 치마를 입은 남자들이 등
장하고, 면접이나 맞선을 볼 때 남자들이 하는 색조 화장도 관습의 금기를 넘어선 것이지만 큰 탈은
없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까지 일상적이었던 남자들의 귀고리도 금기였다. 남성들이 귀고리를 하기 시
작하자 그들만을 위한 디자인이 나왔다. 이때 여자들은 귀고리보다 더한 피어싱에 도전했다. 하지만
사실 패션을 통한 금기에의 도전은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훨씬 많아 보인다.
문신은 관습이나 풍습을 넘어서서 법이 정한 선을 넘는다는 의미에서 시선의 전복 이상의 쾌락을 동
반한다. 금기를 넘어서서 즐기는 쾌락은 금지의 강도가 강할수록 더 짜릿해진다. 더구나 문신의 제재
가 보건 단속에 의한 특별조치법 위반이라는 황당한 죄목에 의거하다 보니, 반항하는 사람들의 명분
도 약하지 않다. 문신은 일단 새기면 옷처럼 쉽게 벗어버릴 수 없는 것이기에, 행위 자체가 커다란 의
미를 띤다. 관습뿐만 아니라 법의 금기마저 어기고 하는 행위이기에 쾌락은 더 크고, 또 다른 나의 영
구적인 정체성의 표현 방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금기를 깨는 데서 오는 쾌락을 즐기려는 트렌드를 설명해왔지만, 성적 금기에 대해서는 조
금 다른 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성적 충동의 만족에서 오는 쾌락과 성적 금기를 돌파하는 데서 오는
쾌락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TV를 통해 꾸준히 공감을 얻은 것은 외도라는 주제였
다. 2003년 7월의 조사에 따르면, 결혼한 남자의 42.2%, 여성의 19.9%가 애인을 사귀어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한겨레21」·명필름 공동조사, 기혼자 3,857명(남자 2,175명, 여자 1,628명) 대상]. 그런데 흥
미로운 것은 남녀 통틀어 배우자와의 성관계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13.4%에 불과했다는 점이
다.
결혼한 남녀가 혼외의 애인을 만들고 싶어하고, 실제로 만드는 것은 성적 쾌락 이외에 혼인 계약
이라는 금기를 넘어서는 데서 오는 쾌락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성적 충동과 금기를 깨고
자 하는 충동을 자주 혼동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충동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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