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1주일 2023년 12월 31일
빛으로 위로를
루가 2:22-35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을 들었습니다.
당시 율법대로 사내로 태어난 지 40일 만에 산모의 정결 예식을 치르러 온 것입니다.
일년생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바쳐야 하는데, 예수님의 부모처럼 가난한 이들은 비둘기 한 쌍만 바쳐도 되었기에 그리했습니다(레위 12:4-8).
여기서 아기와 부모는 성전을 지키던 시므온이라는 노인을 만납니다.
그는 평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린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기 예수를 두 팔로 받아 안고서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노래합니다.
늙고 병들어 이제는 기력이 없는 노인이 아기를 들고 찬양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시므온이라는 인물을 묵상해 봅니다.
그 역시 젊었을 때는 분명히 의로움을 지키고 행하기 위해 힘껏 노력하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구원을 찾기 위해 열정을 불태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거친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이제 늙고 병들은 후에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를 보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 이제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마음을 비웠을 때, 비로소 진리와 구원을 보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설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려놓으니, 구원이 보인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시므온에게 나타난 구원자는 강하고 힘 있는 젊은이가 아니라 아주 어리고 연약한 아기였습니다. 복음은 성령이 그에게 머물러 있었다고 전합니다.
성전에 머물러 있지만 넓고 깊은 시야를 가지게 해 주셨고, 그것이 바로 지혜였습니다.
성령의 지혜가 그에게 머물러 있었기에, 어린 아기를 보고 단박에 메시아로 알아본 것입니다. 의롭고 경건하게 산 사람이란 곧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평생을 기다렸어도 지혜가 부족하면 자신이 상상한 메시아만을 기다렸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그러했습니다.
똑같이 율법 준수를 목숨처럼 삼았지만, 율법의 근본 의미를 달리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조급함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진리가 보일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와 우리가 정성을 기울일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축복하며 찬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이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두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구원자는 이방인들에게는 빛이 되고,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광의 원뜻은 ‘위로’를 의미합니다.
유대교의 율법대로 살고 평생의 구원을 기다린 골수 유대인 시므온은 메시아는 자신들에게만 오신다는 특권 즉 선민의식을 버렸습니다.
루가복음을 쓰고 읽고 들은 해외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나라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온 인류의 보편적인 구원자라는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시므온의 찬양을 영적으로 성찰하며, 진정으로 의로운 사람은 고질적인 관습과 협소한 시야에서 벗어날 줄 아는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시대의 흐름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진리는 더욱 가까이 있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모르고 배척한 이스라엘 또한 절대로 버리지 않고 위로하심을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공평과 자비는 어느 한 부류에 편중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시므온의 두 번째 축복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한 예언입니다.
“이 아기는 많은 반대자의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과연 예수님 살아생전의 삶은 그야말로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율법 안에 계시지 않고 자비롭고 우리를 자녀 삼으신 분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그로 인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언행으로 유대교 지도자들의 숨은 속셈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하느님은 경외하고 믿고 따르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고 잇속을 챙기기 위한 통치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본래 모습을 왜곡하고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의 감추어둔 욕망이 예수님으로 인해 드러난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꼭꼭 숨겨둔 본성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빛과 어둠의 경계가 명확해진 것입니다.
예수님 살아생전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고생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든 이에게 빛이 되었고,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마리아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깨달아 알게 되고 길이 보이면 감내하고 이겨 나갈 기운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시므온의 기다림, 마리아의 인내함. 우리가 쉽게 따라 하기 어려운 마음가짐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고자 함께 걷는 사람들입니다.
내 안에 기력이 쇠하면 주님께서는 세상을 보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칼에 찔리는 듯 한 아픔을 겪는다면 빛과 영광으로 위로하시며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내 안의 무기력함과 한숨 그 안으로 아기 예수를 안겨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의로움을 입고 노래할 것입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다름 아닌 위로였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지금도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로하고 계십니다.
그 어떤 강함보다, 명확함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위로임을 깊이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