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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홍의 아동문학 통신 / 134> (서평)
〚서평〛
어두운 풍경화를 통한 가족 복원에 대한 역설적 열망
명은숙의 단편동화집『천 원짜리 가족』
김 문 홍
가족의 가치에 대한 열망의 뒤집기
유교의 도덕적 이념의 가치를 굳게 지켜오고 있는 우리의 경우는 ‘가족’에 대한 믿음이 유독 강하고 깊다. 관혼상제에 남아 있는 묵시적인 관습, 혈연적 피의 관계를 중시하는 가풍 등이 이를 잘 예시하고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후기 산업사회를 살고 있는 요즈음은 그러한 가족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변질되어 흔들리고 있다.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범죄나 갈등, 반목과 배신 등의 부정적 징후가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하나비』라는 영화로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인 황금사자상을 받아 국제적으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일본의 영화감독이며 코미디언인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이란 남들이 보지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이다.”라고 역설적으로 풍자한 적이 있다. 오죽 했으면 가족 구성원 간에 일어나고 있는 균열과 상처를 이토록 잔인하게 희극적으로 표현했을까 싶을 정도이다.
요즈음은 가족의 굳건한 가치가 흔들리고 있다. 피로 맺은 혈연적 관계를 그렇게 중시하지 않거나, 가계의 전통적 규범이 무너지고 있거나, 진한 피보다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소통을 가족 연대의 핵심적 요소로 꼽고 있는 유사가족의 문제 등을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현상으로 꼽을 수 있다.
교훈과 깨달음을 고유한 덕목으로 치고 있는 아동문학, 그중에서도 오늘 이곳을 살고 있는 우리의 가족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는 동화문학에서도 가족의 가치와 규범에 대한 도전적 시도를 하고 있는 사례가 있는데, 명은숙의 단편동화집 『천 원짜리 가족』(개암나무, 175쪽, 2020.6, 12,000원)의 경우가 바로 그런 예증이다. 이 동화집은 저자의 첫 번째 작품집으로, 명은숙은 2019년 같은 해에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부문과 게몽아동문학회의 ‘황금펜아동문학상’ 수상(동화부문당선)이라는 2관왕의 영예를 차지해 주목을 끌었다. 거기다가 등단한지 채 1년도 되지 않는 기간에 이번에 동화집을 상재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거기다가 기존의 가족의 가치와 규범에 대한 역설적 도발을 시도해 예사롭지 않은 작가라는 인식을 심어주기까지 하고 있다.
이 작품집에는 모두 10편의 단편동화가 실려 있는데, 형식과 주제와 소재가 각기 다른 작품들로 구성된 여타의 동화집과는 달리 구성과 형식이 일정한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소재와 주제의 일관성인데, 모두가 가족의 북원, 균열, 상처 등의 주제로 한 줄기에 꿰어진 구슬들처럼 일목요연하다. 둘째는 작품의 화자가 ‘나’라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거의 모든 작품이 생활동화(사실동화)나 아동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구성 역시 결미 부분에 작품의 주제를 은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거의 모두가 가족의 복원, 균열, 상처, 학대 등의 부정적 가치를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부정적 가치의 주제는 가족의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도발로 주제의 확장성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이러한 어두운 소재와 주제가 어쩌면 작가 자신의 무의식적 트라우마에서 기인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억측을 낳을 수 있다는 부정적 측면이다. 그러나 이 작품집이 기존의 동화문학이 지켜온 규범적 질서에 도발적 저항을 시도하고 있는 주제의식, 그리고 재미보다는 성찰과 깨달음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작가의식의 혁신적 시도라는 점에서는 새로운 시도가 아닐 수 없다.
가족의 복원에 대한 역설적 열망
이 작품집에는 열편의 단편동화가 실려 있다.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같이 가족을 소재로, 그 가족의 복원에 대한 열망, 균열, 상처 등이 주제로 설정되어 있다. 표제작인 「천 원짜리 가족」(7-23쪽)은 그 제목부터가 묘한 뉘앙스를 풍겨주고 있다. 가족의 가치에 대한 비아냥이라는 부정적 측면과, ‘천 원짜리 가족’이라도 소중한 것이라는 긍정적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작품의 제목으로 설정된 것에서부터 맨 앞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집의 전체적 경향을 암시하고나 은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 작품의 화자인 ‘나’는 은석이라는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결미 부분에 이르기까지 내가 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지에 대한 결핍의 이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가방에 매달려 있던 공룡 인형 ‘쿵이’가 차도에 떨어져 커다란 버스의 바퀴에 짓눌리는 위기에서 그 결핍의 사연이 다음과 같은 간단한 서술의 문장(20 : 5〜20 : 9)으로 밝혀진다.
......(앞 부문 줄임) 우리 가족이 탔던 배가 가라앉고 있었다. 아빠는 나를 급하게 구명보트에 태웠다. 미처 타지 못한 채 동생을 안고 있던 엄마 눈에는 눈물이 가독 고여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우리 가족의 마지막 모습이었다......(뒷부분 줄임)
선박 사고의 구체적인 상황이 묘사되고 있지 않아 정확한 사고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가라앉고 있는 배의 정황으로 볼 때 세월호 선박 사고에 대한 은유적 상징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화자인 내가 인형뽑기 기계에서 인형을 뽑아 임의적인 가족 구성을 시도하는 것은, 잃어버린 가족을 복원하려는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낯모르는 구둣방 가게 아저씨와 말을 붙이는 행동은 그런 결핍된 안온함을 채우고 느끼려는 행동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결미 부분에서 바퀴에 짓눌린 인형을 수선해 주는 아저씨의 말을 통해 작품의 주제를 암시적으로 은유하고 있다.
“소중한 건 말이야,있을 땐 잘 모를 수도 있어.”
아저씨는 거친 손으로 쿵이를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듯 정성스럽게 기웠다. 아저씨 손이 닿을 때마다 터진 자리가 말끔하게 메워졌다.
“잃어버리고 나면 다시 찾을 수 없는 것도 있단다.”
아저씨는 기운 부분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나에게 쿵이를 건넸다.
“그래도 이만한 게 정말 다행이구나.”
아저씨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가 다행인지 모르겠다. 혼자 남겨진 것도 다행인 걸까. 다시 눈물이 고였다. 내 가슴 속 솜들이 이리저리 튀어나오고 있었다. (21〜23쪽)
작가는 아저씨의 말과 행동, 그리고 나의 서술적 독백을 통해 가족의 상실이라는 비극적 상황에 대한 역설적 은유를 제시하고 있다. 타인의 건네는 위로의 한 마디가 정말 그 사람의 상실감을 치유해 줄 수 있을까, 또는 화자인 내가 그토록 열망하던 유사 가족에 대한 꿈 또한 그 근원적 아픔을 치유해 줄 수 있을까에 대한 염려와 연민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 문장인 ‘내 가슴 속 솜들이 이리저리 튀어나오고 있었다.’(고딕체 부분)라는 은유적 상징의 서술을 통해 마무리하고 있다. 이미 화자의 가슴 속은 인형들처럼 솜으로 채워져 있어 그들과 가족이라는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비록 천 원짜리 가격의 싸구려 인형들이라도 슬픔에 대한 연민과 연대감이 형성된다면 그것은 피를 나눈 가족 못지않은 훌륭한 가족이 될 수 있다는 단언 같은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근원적 아픔에 대한 치유는 그 아픔에 대한 동질감이며, 진정한 가족은 진정성 있는 사랑과 소통을 통한 연민과 연대감이며, 유사 가족도 하나의 훙륭한 대안 가족이 될 수 있다는 무언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가족의 균열
이 작품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가족의 균열에 대한 작품들이다. 균열의 양상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과 반목을 다룬 「악마의 편지」(38-51쪽), 엄마의 부재로 인한 안온한 모성적 가치의 부재를 다룬 작품인 「시클라멘과 쌀국수」(71-91쪽)과 「헬로우 딩동」(121-141), 인간 이외의 동물에 대한 평가절하적인 이기심을 풍자하고 있는 「고양이 마당」(157-173쪽) 등 4편은 가족 가치의 균열로 인한 갈등과 반목을 다룬 작품들이다.
①
“그거......오빠가 만날 나한테 하는 말이잖아!”
갑자기 벌떡 일어난 작은 악마, 동생은 울먹이며 악을 썼다.
“오빠가 먼저 나한테 그런 소리만 했잖아!”
나는 당황스러웠다. 혼이 나야 할 사람은 동생인데, 내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달아올랐다.
“나보고 만날 바보라고, 잘하는 것도 없고, 친구도 없을 거라고.....오빠가 먼저 그랬잖아!”
동생은 펑펑 울면서 묻지도 않은 자기 죄를 스스로 고백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도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동생의 우는 얼굴 위로 미연이와 동준이 얼굴이 겹쳐졌다.
(「악마의 편지」, 51 : 2〜51 : 12)
②
그날 밤, 별똥별이 떨어졌다. 별똥별은 기다란 빛 꼬리를 달고 땅으로 내려앉았다. 나는 눈을 들어 엄마 별이 있던 자리를 찾으려 별을 헤아렸다. 무슨 일인지 엄마 별을 찾기가 힘들었다. 한참 동안 부릅뜬 눈이 아파 왔다. 하늘로 들고 있던 고개도 아팠다.
나는 고래를 내리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하늘로 얼굴을 들었다.
작은 별이 보였다. 엄마 별이 있던 곳에 별이 하나 떴다. 오늘은 그만 찾아보기로 했다. 작은 별을 찾은 것으로 만족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마루로 들어서는 입구에 화분이 있었다. 아직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겨울이었지만, 화분 안엔 붉은 꽃들이 가득했다.붉은 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시클라멘과 쌀국수」, 90 : 13〜91 : 4)
③
딩동맨이 캐나다로 돌아가고 나서, 나는 새끼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눈이 유난히 검은 ‘겅둥이’, 엄마 고양이를 많이 닮은 ‘마니’, 털이 똥색인 ‘딩동’. 딩동맨은 고양이에 대해 아주 잘 알았다. 나는 새끼 고양이가 내 손에 닿지 않게 조심해서 딩동맨이 보내 준 고양이 쿠션을 상자에 넣어 주었다. 딩동맨은 한국에 오면 다시 찾아오겠다는 편지도 한께 보냈다.
편의점 물건을 옮기는 아빠가 보였다. 나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딩동 소리에 아빠는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잘못 본 것일까. 얼핏 본 아빠 얼굴이 크게 실망한 표정이었다. 아빠도 누군가 들어오는 딩동 소리를 기가리는 걸까?
그때 등 뒤에서 다시 벨이 울렸다. 아빠와 나는 동시에 문 쪽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헬로우 딩동」, 139 : 10〜140 : 2)
④
새로운 가게 주인들은 ‘정’이라는 약속을 지켰다. 식당 앞에는 주차장 대신 우리들이 쉴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생겼다. 사람들은 엄마의 돌무덤 주변에 울타리를 세우고 꽃을 심었다. 소문이 났는지 마당에는 나 말고도 몇 마리의 고양이가 더 생겼다.
“얘들아, 밥 먹을 시간이다.”
새 주인이 사료 그릇에 사료를 가득 부었다. 마당에 흩어져 있던 고양이들이 모여들었다. 벌써 친해진 듯 주인에게 몸을 부비는 녀석도 있었다. 고집쟁이 형은 담장 위에서 주인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형은 여전히 사람이 오면 멀찌감치 피했다.
“천천히 먹어. 많이 있으니깐......그런데 산에서 구조된 풍이는 잘 지내려나?”
나는 자료를 먹다가 새 주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내가 이럴 때 집을 나간 우리 아빠와 똑같은 이름이었다.
마당 입구에 낯선 고양이들이 하나둘 모였다. 햇살로 데워진 오후의 마당은 누워 있는 고양이들로 가득했다.(「고양이 마당」, 170 : 171 : 10)
위의 작품 네 편은 가족 구성원 간의 반목과 갈등으로 인한 가족의 균열을 다루고 있다. 인용문 ①의 「악마의 편지」(38-51쪽)은 화자인 오빠와 여동생의 반목과 갈등을 통한 상처와 마음속의 앙금을 다루고 있는데, 자신을 모함하는 쪽지를 아파트 현관문 틈새에 꽂아 놓은 범인을 찾아가는 추리적 기법의 서사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모함의 내용은 ‘누가 널 좋아하겠어?’와 ‘너는 외톨이야’, 그리고 ‘네까짓 게 뭘 해?’ 등으로 화자의 성격적 결함과 행동을 까발리고 있다. 화자인 나는 같은 반 친구인 동준이와 미연이를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막상 용의자는 가족 구성원인 여동생으로 밝혀진다. 범인이 밝힌 쪽지의 내용은 바로 화자의 잘못 된 언행과 행동으로 밝혀진다. 서두에 인용한 일본의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역설적 풍자인 ‘가족이란 남들이 보지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가 은유하는 가족 구성원 간의 소외, 그리고 반목과 갈등을 뜻한다. 우리가 받는 가장 큰 상처는 타인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혈육인 가족 구성원일 수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타인으로 인한 상처와 마음속의 앙금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 금세 잊혀지고 치유될 수 있지만, 늘 대면하고 살아야 하는 갈등과 상처는 마치 화인처럼 깊이 새겨져 오랜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이 작품은 이처럼 오늘을 사는 가족의 소통 부재로 인한 반목과 갈등을 얘기하고 있어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되돌아보게 한다.
인용문 ②와 ③은 가족 구성원의 부재로 인한 상실의 아픔과 갈등, 그리고 그리움의 열망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인용문 ②는 「시클라멘과 쌀국수」(71-91쪽)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화자의 집에 어머니의 부재를 대신한 베트남 새엄마가 아버지와 함께 방문하게 되면서 느끼는 서먹함과 냉담, 그리고 화해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제목인 시클라멘과 쌀국수는 새엄마와 화자의 화해를 매개하는 아주 중요한 오브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국수를 좋아하는 화자가 베트남 새엄마의 쌀국수에 거북한 반응을 보이지만, 결국은 새엄마가 감싼 목도리에 의해 죽어가던 시클라멘이 꽃을 피우게 됨으로써 새로운 어머니의 자리에 대한 포용을 하게 된다.
인용문 ③은 「헬로우 딩동」(121-141쪽)의 결미 부분으로 역시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아픔과 그리움을 겪고 있던 화자가 아버지가 운영하는 편의점 종업원으로 근무하게 되는 한국계 캐나다인과, 어미를 잃은 채 편의점을 서성이는 고양이 새끼를 통해 어머니의 부재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매사에 긍정적인 생각으로 어머니를 찾는 한국계 캐나다인 ‘핼로우 딩동’과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는, 어머니의 부재에 대해 함구하는 아버지에 대한 화자의 의혹을 풀어주고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화자의 심경 변화에 중요한 매개체 구실을 하고 있다. 앞의 「시클라멘과 쌀국수」에서의 어머니는 죽고 없다면, 「헬로우 딩동」 속의 어머니는 외국의 어머니를 찾아갔지만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귀국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부재를 대신하고 있다. 이 작품 결미 부분의 마지막 문장인‘우리는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라는 표현은, 편의점을 방문한 사람이 어머니인지, 아니면 화자와 아버지가 같은 곳을 향해 시선을 주고 있다는 것으로 두 사람의 화해와 그리움의 열망에 대한 동질성을 의미할 것이라는 추측을 낳고 있다.
인용문 ④의 「고양이 마당」(157-173쪽)은 화자인 동생 고양이의 시선으로 서사가 전개되고 있는 작품으로, 사람들에 의해 버림받았던 고양이 일가가 가게 주인인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자식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인간과 고양이의 공생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화자의 형인 고양이는 인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으로 끝까지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동생 고양이인 화자는 인간과의 소통과 공생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결미 부분의 마지막 두 문장인 ‘마당 입구에 낯선 고양이들이 하나둘 모였다. 햇살로 데워진 오후의 마당은 누워 있는 고양이들로 가득했다.’라는 표현은 인간과 고양이의 소통과 공생이라는 이상적인 꿈을 드러내고 있다.
「하얀 선물」(142-156쪽)은 일본의 어느 지역에 세워져 있는 ‘소녀상’의 소녀와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새의 시각을 통해, 피해자와 가해자의 용서와 화해를 통한 휴머니즘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화자인 소녀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으며, 이 소녀상을 늘 찾아와 대화하는 일본인 소녀 유미코는 가해국의 폭압적인 과거 행적으로 사죄하는 인물로 상징되고 있다. 유미코가 소녀를 찾아와 언니라고 부르며 낙엽 더미로 소녀의 언 발을 덮어주는 행위는 가해국으로서의 사죄를 나타내고 있다. 유미코는 어머니에 의해 인본주의적인 행위가 차단되지만, 결국은 하나의 가족으로 치환되어 완전한 소통을 이루게 된다.
소외와 폭행의 한계상황에 내몰린 가족
「엄마의 마네킹」((52-70쪽)과 「숨바꼭질」(92-104쪽)은 한계상황에 내몰린 가족의 위기를 다룬 작품이다. 「엄마의 마네킹」에서 화자의 엄마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아이들 옷을 판매해 상당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 커리어 우먼이다. 화자인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쇼핑 모델로 엄마의 스튜디오에서 촬영 일정에 쫓기고 있다. 화자는 엄마의 꼭두각시가 되어 주체적인 판단과 행동을 저지당한 채 엄마의 지시대로만 움직인다. 사진가로 활동하는 아버지마저 엄마의 비위를 맞추기에 여념이 없는데, 화자로서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엄마 앞에서 일언반구도 할 수 없다.
어느 때부터 엄마는 화자가 못 마땅하여 화자 대신 마네킹을 대체하여 촬영을 하기에 이른다, 이 때부터 화자는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은 열망과 이에 못 따르는 현실적 장애 앞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에 이른다. 그 순간부터 화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마네킹에게 빼앗긴 채 자신은 침묵 속에서 지내야 하는 혼란의 와중에 휩싸인다.
나는 놀라 돌아선 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이 방엔 옷들이 걸려 있는 옷걸이들과 새로 들어온 하얀 마네킹뿐이다. 눈이 점점 어둠에 익숙해져 갔다. 나는 방 가운데 서 있는 마네킹을 보았다. 마네킹 모습이 이상했다. 이제는 하얀 마네킹 얼굴에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지금은 눈, 코, 입이 다 있었다.
“넌, 누, 누구야......?”
안 나오는 목소리를 겨우 짜냈다. 목구멍이 막혀 버린 것만 같았다.
“나? 난 너야! 유진이!”
마네킹의 하얀 이빨이 서서히 드러났다. 마네킹은 징그럽게 웃고 있었다. 마네킹의 그림자가 점점 다가왔다.
어서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불을 켜야 한다. 코앞에서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 눈을 질끈 감고 스위치를 켰다. 눈이 부셨다.
(「엄마의 마네킹」, 59 : 4〜59 : 18)
위 인용문은 어둠 속에서 화자가 마네킹과 자신이 서로 몸과 마음이 뒤바뀌는 환상에 빠지는 대목이다. 화자는 엄마가 쇼핑 모델을 화자에서 마네킹으로 뒤바뀌는 순간 착시 현상에 빠지게 된다. 이는 곧 엄마로부터의 소외로, 소외는 곧 가족 구성원의 역할마저 빼앗기게 되는 상황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 후기 산업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경쟁의 룰에서 움직이게 된다. 쇼핑 모델을 마네킹에게 빼앗기게 된다는 것은 곧 그러한 경쟁에서의 탈락을 의미하고, 탈락은 곧 소외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화자는 엄마가 정해 놓은 경쟁의 규칙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경쟁에서 탈락하게 된 화자는 소외감을 느끼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숨바꼭질」은 가족의 폭행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 속의 화자 역시 엄마의 기준과 목표대로 움직여야 한다. 그 기준에서 벗어나게 되면 엄마의 폭행을 감수해야 한다. 엄마의 폭행은 당연한 듯 행해지고, 아빠 역시 엄마의 강행에 동참해야 한다. 엄마의 폭행은 감금, 폭언, 강압적인 단식으로 이어진다. 화자는 이러한 엄마의 폭행을 견디기 위해 숨바꼭질이라는 방어기제를 발동한다.
나는 주먹으로 방문을 두드렸다.
탕! 탕! 탕!
소리치고 싶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열어야 한다. 이 문을 꼭 열어야만 한다.
“나 여기 있어요!”
나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얼마 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작은 창문으로 빛이 새어 들었다. 내 방 작은 창틈을 비집고, 하얀 햇살 한 줌이 들어오고 있었다.
똑똑.
나는 더 이상 숨바꼭질을 하고 싶지 않다.(103 : 18〜104 : 10)
위 인용문은 이 작품의 결미 부분으로, 방안에 감금되어 있는 화자가 빆으,로 나가기 위해 구조 요청을 하고 있는 대목이다. 어쩌면 화자는 실제로 엄마에 의해 감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폭행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가상적인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폭행에 의해 감금된 화자는 곰돌이 인형 ‘통통이’에게 화풀이를 한다. 이것은 폭력의 대물림이라는 끔찍한 환상에 대한 은유적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다. 폭행을 당하면서 성장한 아이는 커서도 폭행을 일삼는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견해이고 진단이다.
화자에 대한 엄마의 폭행 이유는 정당하게 비친다. 화자가 나쁜 아이 되지 말라고 혼낸다는 명분을 내세우면, 화자 역시 무릎을 꿇은 채 그 명분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구체적인 서사는 없지만, 화자의 서술적 독백과 행동을 통해 가정 내에서의 폭력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
명은숙의 첫 번째 단편동화집 『천 원짜리 가족』은 일관된 소재와 주제의식으로 가족의 명암을 그려내고 있다. 가족의 소통 부재, 반목과 갈등, 상처와 소외, 그리고 폭력이라는 명암을 정제된 구성과 문체로 형상화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가족의 부정적 측면만을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이는 건전하고 안락한 가족을 복원하고 싶은 역설적 열망일지도 모른다. 표제작인 「천 원짜리 가족」이 이를 은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진정한 가족은 혈연적인 덕목보다는 진정성을 지닌 소통과 연대만 이루어진다면 가족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반어적인 명제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집을 읽는 독자들은 칙칙하고 불편한 가족의 어두운 풍경화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불편한 진실 속에 사실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가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작가 명은숙은 이번 작품집을 통해 사실은 우리의 민낯을 드러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가장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꿈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번의 작품집을 통해 한 꺼풀 허물을 벗은 셈이다. 그런 만큼 다음 작품집은 틀림없이 우아한 재미 속에서 꿈과 환상을 좇는 판타지가 전개될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비단 평자의 소망만은 아닐 것이다. 작가의 빛나는 서사적 상상력괴 정교한 문체의 연금술에 힘찬 박수를 보낸다. (60 매)
첫댓글 물질은 풍요해지나
갈수록 가족은 해체됩니다.
조금의 희생도 싫다는 마음때문일 겁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