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핵심 개념 중에 眞如(진여)라는 말이 있다. 흔히 妄念(망념) 妄想(망상)과 대비되는 말로 영어로는 suchness(그러함)로 번역되는 말이다. 우리는 사물이나 어떤 현상을 언어나 관념이나 욕망에 사로잡혀 오염된 마음으로 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망념에 사로잡히기 쉽다. 이러한 미혹된 망상이 모든 苦의 원인이며 이러한 미망에서 깨어나 아무 것에도 물들지 않은 구슬 같이 투명하고 맑은 佛性으로 볼 때만 진여를 볼 수 있고 그래야 세상에 집착하거나 끄달리지 않고 해탈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나는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이 좋다. 우리가 큰 일인 것처럼 여겨 끄달리기 쉬운 생노병사나 성공과 실패, 미움과 사랑도 있는 그대로 보면 아무 일도 아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면 그의 어리석음이나 단점, 욕망, 비열함, 거짓, 허영심, 이기심, 교만등이 맑은 물 속에 노니는 물고기처럼 환히 보인다. 물론 장점들도 잘 보인다. 그러한 것이 보인다 해서 그것이 나를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 그냥 그러하다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그러하다고 보면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
나는 말로는 사랑을 자주 말하지만 남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누가 아프고 힘들다 해도 나는 잠시 같이 아파하는 것으로 끝이다. 나는 그의 고통을 가슴 속에 담아두지 않는다. 하물며 남의 단점이나 미움이나 애증 같은 것은 왠만해선 달라붙지 못한다. 나는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해서도 별 애착이 없다. 나는 하루살이다. 오늘 하루 잘 살면 그것으로 족하다.
우리가 자신이나 남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고 그로인해 실망하고 괴로워하며 심지어 그를 미워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사람이 본래 그러하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에서 오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필요한 만큼의 어리석음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숨쉬는 공간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미타불이 착한 사람도 구원해 주는데 하물며 악인을 구해주지 않겠느냐?“는 신란이라는 스님의 말씀을 좋아한다.
나는 또한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좋아한다. 아버지의 마음은 자기와 함께 거하며 착하게 사는 아들보다 집을 나가 허랑방탕하게 사는 타락한 아들에게 있다.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대체로 자기를 부족하거나 죄인이라 여기는 사람 보다 신에게서 멀다. 아니 신에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사람에게서도 멀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비난하거나 하찮게 여기고 자기를 잘났다고 하고 의롭게 여기며 자랑할 수 있겠는가?
비난은 충고를 간절히 원하는 아주 가까운 이에게 진심으로 사랑의 마음이 우러날 때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자기 자신을 보면 수많은 어리석음과 단점이 보이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비난하겠는가?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고 그러하다. 나는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뻔뻔하게 산다. 하느님도 나를 불쌍히 여기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