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두통약 뇌신 |
이승하 |
오후의 햇살이 비쳐들면 *뇌신 : 내 어린 날의 두통약으로 ‘뇌신’과 ‘명랑’이 유명하였다. 흔히 ‘노신’으로 불린 이 약은 내성이 강해 점점 더 많이 먹어야 효과가 나타났다
세상은 졸음에 겨워 노랗게 되곤 했습니다
가게 한 귀퉁이에서 어린 저는 졸고
어머니 이맛살에는 깊은 골이 패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괭이질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누르고
나중에는 손등으로 이마를 때리고 때립니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 포 나중에는 하루에 다섯 포
머릿속에 거머리가 기어다니는 것 같구나
약의 양이 느는 동안 어머니는 늙어갔습니다
노란 셀로판지 하늘 붉은 색으로 바뀌면
어머니는 마침내 저를 깨우고
저는 약국에 가 뇌신을 사오곤 했습니다
한 사발 물과 함께 이맛살이 평평해지면
어머니는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약에 취해 비틀비틀 걸어가시면서
아이고, 머리가 안 아프니 살 것 같다
아들 보며 희미하게 웃으시는 어머니
어느 날은 뇌신 한 포 몰래 먹어 봤더니
세상이 금방 노랗게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곁에서 오래오래 잠들고 싶었을 따름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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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강물은 바다로 가고 싶어한다
이승하
포유류가 흘린 모든 피
여기에 와서 방파제를 난타한다
살아 있음을, 살아 있는 존재임을
뜨거운 아픔으로 증명하는 것들이여
아파서 소리치는 바다에 이르렀구나
분만의 고통을 체험한 이들이여
태어나는 괴로움에 대해 말하지 말라
여기, 태어나면서 비명 지르는 것들이
있다 아프기 때문에 태어난 것들이
있다
지상의 길은
바다에 이르면 죄다 끊어진다
회임한 여인의 자궁에
고통 덩어리가 들어 있듯이
자연의 거대한 자궁인 바다
수많은 주검의 무덤인 저 바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언제나
통증으로 울부짖는 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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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나 사이의 그대
나를 미행하는 그대는
그대 나를 안다면서
그대 안다면서 -------------- 귀 향
이승하
그리 멀지도 않건만
허나, 세상의 모든 길은
한가위로다
인생행로 걸어도 달려도
싸늘히 식은 가슴 지닌 이들이
내 인생의 남은 날들이여
이승하
그대 안다면서
또다시 온 밤의 이 험준한 기슭에서
내 벌거벗은 혼으로 내처 날뛰다
다리에 쥐난 마라토너처럼
털썩 주저앉고 마는 이유를
저 해가 보낸 것 은밀히
내 등뒤에서 따라오며 작은 소리로
자네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이런 무모한 짓을 왜
이런 무의미한 일을 왜
매일 하느냐고 속삭이는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저 해
해의 밀사가 날이면 날마다
끈질기게도 따라다녀 내 미치겠네
그대를 보낸 저 해는
나에 관한 정보를 다 안다면서
내가 미친 듯이 웃을 때
해는 동정의 눈짓을 보내고
내가 한 찬양의 말을 듣고
해는 경멸에 차 얼굴을 찌푸리지
어둠 속에 불끄고 숨죽이고 있으면
난 차라리 마음이 편해져
내 오늘도 이 험준한 밤의 기슭에서
밑 빠진 가슴에 술을 퍼붓다가
시체처럼 늘어져 잠들고 마는 이유를.
고향으로 가는 일이 참으로 힘들구나
저마다의 고향으로 나 있는 법
그대 태어난 곳 자라난 곳
꿈을 키웠던 그곳
사춘기 시절엔 줄곧 떠나고 싶었던 곳이어서
그대 고향을 버리고 비로소 어른이 되었지
연어도 때가 되면 모천으로 회귀하는데
타향의 하늘에서도 이국의 하늘에서도
두둥실 떠 있는 원반형의 달
어머니 등에 업혀 쳐다보았던 달
사랑을 잃고 술에 취해서 쳐다보았던 달
오늘밤 저 달은 한껏 발그레해지리라
어느 길 할 것 없이 험하기만 했다
망망대해 달려도 멈추어도
어느 뱃길 할 것 없이 무섭기만 했다
하지만 고향으로 나 있는 길에서는
지친 새도 날개를 접을 수 있다
그대 탯줄이 거기 묻혀 있기에
그대만을 기다리는 노모가 있기에
고향에 돌아온 날은 왁자지껄하리라
따뜻한 고봉밥 넘치는 술잔
사투리가 갑자기 입에서 튀어나오고
잊어버린 친척 아이 이름을 묻는다
잃어버린 내 별명을 여기서 찾는다
이번 한가위만 같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