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를 바라보는 세가지 방면(고전1:18-25)-2013.3.24 종려주일
누구든지 기독교하면 쉽게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사실 다른 종교에 비해서 기독교는 상징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독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물처럼 인식되는데 부정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생각할 수도 없고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기독교의 상징이라해도 과언은 아니라는 생각에 동감합니다. 굳이 그것이 우상물이다 아니다라는 논쟁을 떠나서 기독교의 심볼처럼 여겨진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모든 십자가가 기독교를 대변하는 상징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2천년전 우리를 위해 갈보리산에서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우리가 기억하고 따를 뿐입니다. 그때 거기에 세워진 그분의 십자가만 말입니다. 좌우편의 강도들 중앙에 세워진 그 십자가 말입니다. 자신의 죄와는 전혀 상관없이 짊어지시고 죽으셨던 그 십자가 말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분의 십자가 말입니다. 그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는 십자가의 도가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 속에는 엄청난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어찌보면 구약이 들어 있고, 신약이 들어 있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신구약의 모든 말씀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모든 믿는 이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독교의 진리요, 핵심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를 잘 깨달아 믿지를 못하고 전달하지 못합니다. 그냥 막연하게 십자가를 들먹이며 십자가를 장식처럼 부착하고 다닐 뿐입니다. 십자가 목걸이, 십자가 귀걸이, 십자가 장식등 아주 다양하게 말입니다. 때로는 불신자들도 십자가의 장식을 많이 하고 다닙니다. 가끔씩 물어보면 그냥 좋아서 하고 다닌다는 둥, 예뻐서 하고 다닌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십자가는 우리가 장식하고 다닐 정도로 아름답거나 예쁘거나 좋은 것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이 많은데 굳이 십자가를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사형도구입니다. 사형도구를 목에 걸고 다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귀에 걸고 다니는 이유는요? 신기하지요. 하필 십자가일까요? 기독교인들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안다면 달라지지 않을까요?
십자가가 기독교 상징으로 쓰이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십자가의 역사는 그리스도교가 출현하기 훨씬 전부터 고대민족 사이에서 종교적인 상징으로 쓰이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바빌로니아인이나 갈대아인은 하늘의 신인 아누신의 상징으로서 등변십자가를 사용하였고, 고대 이집트인은 영생의 상징으로서 바퀴가 달린 십자가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또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폴로신이 십자형의 홀을 가지고 있고, 게르만 신화에서는 토르신이 십자 모양의 해머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인도에서는 옛날부터 ‘만자(卍字:갈고리형 십자가)’로 사용되었고, 힌두교에서는 오른쪽 어깨가 올라간 갈고리형 십자가가 가네사라 불리는 남성적 원리를 상징하였으며, 그 변형인 왼쪽 어깨가 올라간 갈고리형 십자가인 사우바스티카는 칼리라 불리는 여성적 원리를 상징하였다고 전해오기도 합니다.
그 외에 십자가는 고대 페르시아인 ·페니키아인 ·에트루리아인 ·로마인, 갈리아 지방이나 브리타니아의 켈트인,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페루 등지의 주민 사이에 널리 종교적 의의를 가지고 사용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십자가를 중죄인을 처벌하는 사형도구로 사용하기는 페니키아인이 최초라고 추정합니다. 그것은 뒤에 각 민족 간에서 널리 사용하게 되었으나, 로마인은 너무나 잔혹하여 노예나 흉악범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처형당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아무 죄없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입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지만 사실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저지른 죄악이 무섭고 무거우며 더럽고 추악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더러운 죄악을 다루시는 의지가 단호하시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죄악을 다루시는 가장 무섭고 무거운 공의의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마디로 십자가의 처형보다 더 무섭게 죄악을 다루시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구약 성도들에게도 십자가의 예표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명기21장22-23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거든 죽여서 나무에 메어달라고 주문하십니다. 그리고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최고로 저주받은 자의 죽음을 나무에 메어 달리는 죽음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 사상은 신약시대에 우리 주님이 친히 나무 십자가에서 저주를 당하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3장13절도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고발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친히 당하신 저주의 십자가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교회와 성도는 십자가의 도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2:2“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씀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갈6:14). 그의 신앙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증거합니다. 아주 간단한 구절이지만 십자가의 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분명히 알려주는 구절입니다. 십자가의 도의 결과가 얼마나 큰 가를 똑똑히 알려주는 구절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바르게 깨닫고 믿지 아니하면 가장 미련한 사람이요, 십자가의 도를 바르게 깨닫고 믿는 사람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미련하고 지혜로운 사람의 단순한 차이가 아닙니다. 미련한 사람은 멸망받는 사람이요, 지혜로운 사람은 구원을 얻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다 십자가의 도를 바르게 깨달아 알기 원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과 멸망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바르게 깨닫고 영접하면 구원을 받지만, 만일에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무시하거나 받아 드리지 못하면 멸망을 받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에는 우리의 선행이나 공력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지혜가 첨부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신 능력이요, 우리에게 들려주신 그분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받아드리기만 하면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크게 세 방면의 시선을 볼 수 있습니다.
(1)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먼저, 십자가를 바라보는 유대인의 시선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비록 소수의 유대인들이 어렴풋이나마 메시아로 기대했던 예수님에 대한 환상이 단번에 망가진 곳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는 아니라는 확실한 단서가 된 것입니다. 그들이 고대하는 메시아는 예수님처럼 무기력하고 연약하게 한마디 저항도 없이 군중들의 손에 의해 처형당하는 힘없는 메시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고대하는 메시아는 자기 동족을 압제하는 로마를 당당하게 물리치고 구해주는 민족적 영웅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대적들을 통쾌하게 때려 부수고 승리하는 강력한 왕같은 메시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 기대마저 완전히 허물어 버린 사건이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십자가에서 무기력할 정도로 처참히 죽어가는 연약한 모습을 보고 극도의 배신감 내지는 실망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은 어느 민족에게서도 볼 수 없는 자부심입니다. 그들은 메시아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토록 험한 고난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입니다. 이른바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유대 땅에서 나올 것이며, 자기들을 통해서 나온다는 강한 자부심으로 지금까지 살아 온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고, 자부심이 대단한 민족입니다. 어찌보면 가장 유대인다운 기질은 메시아사상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2천년 전에 유대 땅에 와서 모든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던 주인공이 기껏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다니요?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일입니다. 그들의 영적인 자존심을 한방에 무너뜨린 가장 추한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예수가 십자가에 죽는 것을 보고나서 그들의 실망감은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상당수는 막연한 기대감이었지만 십자가에서 뭔가 그럴듯한 일이 벌어질 줄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죽이는 로마 군병들을 한방에 물리치는 정의로운 상상이라든지, 아니면 십자가에서 아무리 죽이려고 시도해도 죽지않는 불사신 같은 모습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애당초 그들의 목적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들이 상상하던 어떤 영화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자존심은 아마도 완전히 뭉개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민족적인 수치심으로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여 이방인들에게까지 엄청난 영향을 끼친것이 사실이었거든요. 자기들이 무시하고 천대하던 이방인들을 예수님은 친히 만나셨고, 그들은 예수님을 추종하며 오히려 자기들보다 훨씬 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사역하실 때만해도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얼마나 거리끼게 생각하고 훼방했는지 모릅니다. 그것도 가장 종교적이라는 사람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른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대제사장과 장로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정말 눈엣가시 같이 여기고 거리끼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거리낌은 걸림돌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
거리끼게 생각한 이유는 자기들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요, 자기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모든 종교적인 권위가 예수 때문에 완전히 축소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뜻대로 되어지지 아니하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의 하는 일에 걸림돌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는 일마나 브레이크를 걸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차라리 예수가 그들에게 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불편한 존재로 여긴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실 때에 그들이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거든요. 태초로부터 한번도 없었던 어두움이 임하여 계속됨은 물론이거니와, 그렇게 두터운 성소의 휘장에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고 잠자던 성도들의 상당수가 일어나는 것을 그들은 경험했거든요. 그걸 보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믿지는 못하고, 일어난 일들을 보니 정말 기막힌 일들이 벌어지고 차라리 예수가 자기 땅에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것도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저주받은 사람들을 처형하는 사형방법이었기에 그들이 바라보는 십자가는 그들만의 종교를 지켜내기 위해서 생각하기도 싫은 걸림돌로 여긴 것입니다. 오직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기들의 종교를 지켜내기 위하여 거리끼는 것으로 치부하고 만 것입니다. 마치 자기들의 유대교를 지켜내기 위한 걸림돌로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고 아직도 십자가앞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쌍한 영혼들입니까?
(2)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이방인들에게 비춰지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물론 이방인이라면 주로 헬라인들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의 반대적인 개념은 이방인인데, 대표적인 이방인으로 헬라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런 영향가운데 하나는 사도 바울이 세상을 유대인과 이방인의 시각으로 나누고 있고, 더욱 정확히는 유대인과 헬라인으로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정말 미련함의 극치였습니다. 당시 헬라인과 로마인들은 십자가의 형이 중죄인을 다루는 극악무도한 사형방법임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형제도가 얼마나 더럽고 무거운 죄를 다루는지 그들이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형은 로마인들은 제외하고 노예나 이방인들을 주로 처형하는 지저분한 사형제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 자기들이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헬라인들의 시선으로 볼 때 십자가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지나가던 개도 웃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정말 미련하기 그지없는 가장 멍청한 방법으로 여긴 것입니다. 중한 죄인을 처벌하는 십자가에서 메시아가 죽다니요? 그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십자가는 싸구려 삼류 소설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자칭 지혜롭다는 그들의 상식으로는 소설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솔직히 지금도 기독교의 진리는 자칭 지혜롭다고 까부는 사람들에 의해 얼마나 수모를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가끔씩 메스콤을 타고 자칭 잘났다는 사람들에 의해 진리가 난도질을 당하기도 합니다.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공격합니다. 어설픈 지식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훼손합니다. 자칭 지혜롭다고 큰 소리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는 십자가는 미련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지금도 자기들의 지혜를 자랑하며 잘난척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앞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복음을 영접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똑똑하게 여기는 지혜가 그들의 영혼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지혜가 지혜롭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어찌 감히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가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본문도 말씀하십니다(20절).“지혜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라고 말입니다.
세상에 지혜를 숭배하고 숭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가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정말 불쌍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세상적인 지혜를 마치 우상처럼 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진리는 무지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거절하고 반박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무식하다고 거부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큰 소리를 쳐도 감히 하나님의 지혜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당시 고린도 교인들마저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헬라적 사고방식으로 접근하려는 무모한 생각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매우 노골적이고 자존심상한 어조로 질타합니다(26-29절). 그렇습니다. 교만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어리석은 지혜로 하나님의 거룩한 지혜를 비판하려들지 마십시오. 그것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려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십시오.
(3)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믿는 성도들의 시선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자기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는 자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완벽하게 담겨 있는 최고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구원의 최종적인 완제품이 십자가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인간의 작은 지혜로 어찌 판단할 수 있으며, 인간의 생각으로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유대인들의 왜곡된 신학적 사상과 관념을 통째로 깨뜨리시는 혁신적인 하나님의 능력이요, 이방인들의 교만한 지성과 생각을 한방에 무너뜨리시는 하나님의 파격적인 능력입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가장 완전하고 완벽하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유대인들이 거리끼게 생각하고 이방인들이 미련하게 생각하는 방법을 통해 그들의 무지함을 부끄럽게 만들 것이요, 그들의 쓸데없는 자존심을 수치스럽게 만들어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어떤 조건도 없이 가장 안전하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어떤 수고나 노력이나 공로가 없을지라도 확실하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떤 세상적인 지혜나 지식이나, 종교적인 기반이 없을지라도 분명히 믿는 모든 자들을 완전하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고 따른 모든 자들을 한 사람도 예외없이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비록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비록 신앙의 연륜이나 경륜이 짧을지라도 괜찮습니다. 비록 신앙적인 직분이 없을지라도 괜찮습니다. 십자가를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한 사람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당하던 한편 강도 를 보십시오. 한편 강도는 죽어가면서까지 곁에 계신 주님을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비방하던 그를 책망하던 한편 강도는 어떻게 되었는지요? 주님으로부터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엄청난 복을 받은 주인공이 되었음을. 감히 이런 결정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가장 충분한 능력이요, 완벽한 능력이며, 확실한 능력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경륜이 몽땅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 들어 있고, 예수님의 희생이 들어 있으며, 죄를 이기는 능력이 들어 있고, 생명을 얻는 신비가 풍성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분의 능력을 믿으시면 십자가를 보고 믿으십시오. 십자가를 따르십시오.
십자가는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을 화목케 하는 능력입니다(골1:20).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을 어떻게 화목 시킬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화목 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이 땅에는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의 십자가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또한 십자가는 원수된 것을 소멸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엡2:16). 우리의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못박게 하는 능력입니다(갈5:24). 이 땅에 자기의 육체적인 소욕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의 정욕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다못해 자신이 즐겨하던 세상적인 연락을 끊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담배하나 끊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끊는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정말 뼈를 깎는 결단과 고통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런 모든 육체적인 정욕들을 단번에 끊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그 십자가만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 십자가만 자랑하며 말입니다. 그는 고전2:2절에서 십자가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제가 갈라디아서6장14절을 읽어 드리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우리 모두 2천년전에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2013. 3. 24 종려주일 설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