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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1-19)
할렐루야!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온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봄비가 내렸습니다.
길가의 목련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상큼한 꽃내음새가 얼어붙었던 우리의 마음을 깨우는 계절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왜 숨어야 했을까요? 왜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없었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가 있으면 숨을 수밖에 없습니다. 도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부르실 때, 우리는 아담처럼 숨으면 안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예배의 자리에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의 자리에 있습니다.”
“은혜의 자리, 축복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있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는 은혜의 자리요, 축복의 자리인 하나님의 집인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을 수 있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합니다.
복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복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시편 1:1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복을 받기 위해서는 악인들의 꾀를 따르는 자리에 있으면 안됩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 있으면 안됩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어야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는 과연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예배 드릴 때, 우리는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을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은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신 28:12)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물창고를 열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내게 축복의 단비를 내려 주시고, 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 드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아름다운 보물 창고 문이 활짝 열려서, 은혜의 단비, 축복의 단비가 내리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예배에 승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이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였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야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수님이 활동하던 그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불쌍한 사람, 가장 많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 나병환자의 이야기입니다.
12-1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아멘.
나병은 어떤 병입니까? 우리 몸 속에 나쁜 세균이 들어가, 몸이 썩으면서, 마디마디가 다 떨어져 나가고, 냄새가 나는데도,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병입니다.
더구나 이 병은 그 당시에는 치료방법이 없어서,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절망적인 병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병에 걸린 사람은 종교적으로 죄를 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부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사회적으로, 사람들과 격리되어,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냉대와 소외를 받았습니다. 돌봄을 받지 못했습니다. 버림받았습니다.
종교적으로, 죄인 취급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가난하여, 굶주릴 수밖에 없는 처참한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열 명의 나병 환자는 그들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병 환자 열 명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왔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사람이 오면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로부터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가지 아니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부정하다. 부정하다”라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도망치지 않고 예수님께 나와서 긍휼을 구했습니다. 치료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왜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을까요? 그들은 왜 그렇게 소리 높여 외쳤을까요?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믿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향하여, 그렇게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비록 멀리서나마, 자기들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을 간청했습니다.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여러분! 나병 환자들이 예수님께 소리 높여 외쳤다고 하는 것은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의학적으로 버림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 나와서 간구하면, 주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모른 척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세상으로부터,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았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와,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 죄가 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때로는 절망과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용기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슨 문제가 있든지,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가지고 나와, 부르짖어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결코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불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마지막에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너무너무 벅찬 문제가 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안 될 것 같은 일이라도, 결국 형통하게 됩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잘 될 것 같은 일이라도, 결국은 안 됩니다. 일이 풀리지를 않습니다. 일이 실타래처럼 점점 더 꼬이게 됩니다.
마지막까지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하지만, 기도를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고, 온갖 냉대와 멸시 속에서, 겨우 입에 풀칠하며, 목숨을 부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외치는 열 명의 나병 환자들에게, 특별히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은 “너희들의 병이 낫게 될 것이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로 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의 나병이 깨끗하게 치료될 것을 믿었기 때문에,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제사장을 찾아가는 것은 자신의 몸에 있는 나병이 깨끗하게 치료되었음을 제사장으로부터 증명 받기 위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나병이 그대로 있으면, 제사장을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제사장을 찾아간다고 하는 것은 나병이 깨끗하게 치료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을 깨끗하게 치료하여 주실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지금 그들의 몸에는 나병이 그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될 것이라고 믿고, 제사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가는 길에 치료받았습니다.
믿음으로 행동할 때, 불가능한 일도 가능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도, 순종이 없으면, 올바른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순종하는 믿음이 진짜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응답을 받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교회는 많이 아는 사람보다는 순종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1-2)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평생 우상을 숭배하며, 우상을 만드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5)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말하면서, 깊은 데로 가서, 진짜로 그물을 내렸습니다. 순종했습니다. 그리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복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하지만, 잡지 못하는 그런 어부의 삶을 평생 살았을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그것을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인들이 순종했을 때, 그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만약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순종은 중요합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원한다면,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총을 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복과 은총은 순종을 타고 내려옵니다.
15-1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아멘.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만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요,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은 괴로운 사람이며,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요,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최고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하나님이 없습니까? 하나님을 아직도 만나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이리 저리 찾아 헤매고 다니십니까?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아무리 축복을 많이 받아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축복이 오래 가지 않습니다. 다 사라지고 맙니다.
한때는 축복을 많이 받았다가, 그 축복을 모두 다 잃어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왕년에는 잘 먹고, 잘 살았는데, 왕년에는 믿음이 좋았는데, 왕년에는 열심히 충성했는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지금 현재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다 놓쳐버린 사람들입니다.
환난과 슬픔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축복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감사하는 것에 인색해서는 안됩니다. 늘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축복의 열쇠를 손에 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도 인색한 사람은 손에 쥔 축복의 열쇠를 깊은 강물에 던져 버린 사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발로 차 버린 사람과 같습니다.
여러분!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늘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에게 행복이 있겠습니까?
아니면, 항상 감사하는 사람에게 행복이 있겠습니까?
늘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행복을 모르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어떤 환경이든, 늘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7-19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아멘.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육의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병들지 않아야 합니다.
육신적인 병이나 영적인 병에 걸리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순종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감사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자리에 있으면 안됩니다. 말씀의 자리, 예배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이 아니라, 우상 앞에, 세상 앞에, 물질 앞에, 권력 앞에, 그런 곳에 있으면 안됩니다. 그런 곳에 기웃거리면 안됩니다.
기도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불순종의 자리에 있으면 안됩니다. 순종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의 자리에 있으면 안됩니다. 찬양과 감사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감사하는 사람이 이렇게 적으냐”
여러분! 축복을 받은 사람은 많지마는 감사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아도, 다른 아홉 사람도 고침을 다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감사드리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한 사람만이 주님께 찾아와, 영광을 돌리며 감사드렸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듣고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매일 매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많은 은혜와 복을 받으면서도, 감사를 다 드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열 가지 은혜를 받으면서도, 겨우 한 가지에, 감사를 드릴까 말까 할 때도 있습니다.
감사는 행복의 시작입니다.
여러분!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는 늘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이 자리에 나왔사오니,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사오니,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겠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았사오니,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로 넘쳐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