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우현(洪禹賢)
[본관] 남양(南陽[唐])
[진사] 숙종(肅宗) 8년(1682) 임술(壬戌) 증광시(增廣試) (進士) 3등(三等) 38위(68/100)
[생졸년] 1654년(효종 5)~1729년(영조 5) / 壽 75歲
[거주지] 만경(萬頃: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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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첨정 홍공 묘갈명(外舅僉正洪公墓碣銘)
공은 휘가 우현(禹賢), 자가 사희(士希)이다. 홍씨는 고려 태사 은열(殷悅)에게서 나와 대대로 알려진 사람이 있어 역사에 끊임없이 기록되었다. 우리 조선에서는 동성균 휘 경손(敬孫)과 관찰사 휘 춘경(春卿)이 연달아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났다.
증조 휘 명원(命元), 호 해봉(海峰)은 재상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으나 관직이 경기 관찰사에 그쳤다. 조부 휘 처심(處深)은 사재감 첨정을 지내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수제(受濟)는 공조 정랑을 지냈다. 모친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현감 지렴(之濂)의 딸이다.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공이 장남이다.
공은 어려서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말과 웃음이 적어 어른처럼 의젓하여 어른들이 원대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외조부가 일 때문에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었을 때 공은 열다섯도 되지 않았으나 따라가서 곁에서 모시며 일마다 수고를 대신하였다. 어버이를 섬길 적에는 지극히 부드럽게 하는 데 힘썼고, 책을 읽거나 글을 지을 때도 반드시 부모 옆에 있으면서 따로 편의를 도모하려 하지 않았다.
숙종 임술년(壬戌年, 1682, 숙종 8) 진사가 되었다. 서하(西河) 이민서(李敏叙) 공이 이조에 들어갔는데 공의 외가 친척이었기에 재주를 아까워하여 관직을 주려고 하였다. 공이 사양하며,
“나이가 젊고 한창 과거공부를 하고 있으니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공이 면전에서 탄식하기를,
“말세에 보지 못한 일이다.”
하였다.
송 숙인은 고질병을 앓았는데 공과 아우들이 옷의 띠를 풀지 않고 5년을 하루처럼 간호하였다. 거만한 늙은 어의가 있었는데 병자의 집에서 불러도 가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나 유독 공의 효성에 감동하여 재촉하지 않아도 왔다. 상을 당하자 맛있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고, 아무리 날이 더워도 최질(衰絰)을 벗지 않았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도 그렇게 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703, 숙종 29), 명릉 참봉(明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친혐(親嫌)으로 사면하였다. 갑신년(甲申年, 1704, 숙종 30) 현릉 참봉(顯陵參奉)으로 복직하고 규례대로 사옹원 봉사, 영릉 직장(寧陵直長)으로 옮기고 사복시 주부로 승진하였다.
정승 김우항(金宇杭)이 제조였는데, 공은 인척의 혐의로 체직을 청하였다. 어떤 이가 사복시는 상피하는 아문이 아니고 예전에도 그대로 맡은 사람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공은 끝내 구차히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오랜 뒤 다시 종부시 주부가 되고 얼마 후 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 옮겨 과옥(科獄)을 조사하는 데 참여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함열 현감(咸悅縣監)이 되었는데, 다스릴 적에는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실질적인 혜택을 베푸는 데 힘썼다. 함열현에 고기 잡는 호구가 있는데,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해 거의 다 흩어졌다. 공은 재물을 모아 관청을 설치하고 관청에서 구입하니 포구의 백성이 안도하였다.
마침 흉년이 들자 진휼하는 밑천을 마련하여 마음을 다해 구제하였는데, 역시 자신을 자랑하려는 꾀를 부리지 않았다. 얼마 후 문서 때문에 상관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어 돌아왔다. 뒤에 서용되어 다시 사재감 주부, 공조 정랑을 지냈다.
정유년(丁酉年, 1717, 숙종 43), 은진 현감(恩津縣監)에 임명되었다. 고을의 토호 한두 사람이 횡포를 부려 폐단이 극심하였는데 공이 엄격히 다스렸다. 환곡의 수량이 포흠난 것이 많았는데, 창고를 조사하여 모조리 징수하였다. 고마청(雇馬廳)의 재물은 빈 장부 뿐이었는데, 말을 다시 마련해 내었다.
또 양호(養戶)의 버릇을 엄금하여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으나 비방하는 말이 무성하여 온갖 방법으로 중상모략하니, 여름 고과 때 과연 하고(下考)를 맞았다. 남쪽 사람들이 탄식하기를,
“앞으로 어찌 원망을 떠맡고 일을 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721, 경종 1), 지금 성상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공은 익위사 사어에 임명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흉당이 요사한 여종 및 역적 환관과 안팎으로 결탁하여 헤아릴 수 없는 변란이 일어나려 하였다. 공은 숙직한 신하들과 인대(引對)하여 더욱 공경하고 더욱 효도하며 궁궐을 깨끗이 하라는 이야기로 경계를 드렸는데 말뜻이 간절하여 소리와 눈물이 함께 나왔다.
물러나 탄식하기를,
“내 힘으로는 간사한 싹을 꺾고 동궁을 보호하기 부족하다. 한갓 간신들 사이에 끼어 있을 뿐이니 끝내 무엇을 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체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늘 나라를 걱정하여 눈물을 흘렸다.
을사년(乙巳年, 1725, 영조 1), 종묘서 영에 임명되고 상의원 첨정으로 옮겼다가 곧 혜국 낭청으로 차임되었다. 낭청은 실직(實職)이 아니었기에 으레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공은 홀로 말하기를,
“어찌 농단하는 혐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상의원의 직임을 그만두었다.
정미년(丁未年, 1727, 영조 3), 시국이 일변하자 공은 또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하였다. 기유년(己酉年, 1729, 영조 5) 11월 30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은 76세였다. 이듬해 2월 충주(忠州) 덕령산(德靈山) 정랑공 묘소 뒤쪽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도량이 침착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하였다. 모든 언행이 겉치레를 일삼지 않아 한번 안색을 보면 덕 있는 공손한 군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나와 연로한 뒤에도 부모 이야기가 나오면 오열하느라 말을 잇지 못하니, 사람들은 종신토록 사모한다고 하였다.
아우들과 즐겁게 지내며 헛되이 보내는 날이 없어 벼슬할 때도 조정의 권귀는 한번도 찾아가지 않고, 관청에서 퇴근하면 오직 형제들을 만나 즐겁게 지냈다. 정유년(丁酉年, 1717, 숙종 43) 이후 형제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공은 상심하며,
“늙은 나만 혼자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하고 하루종일 웃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슬픔을 막으려는 생각에 간혹 술을 마셨으나 취하면 또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관직에 있으면서 직무를 수행할 때는 단지 본분에 따라 당장 해야 할 일을 하였으며, 이익과 손해, 칭찬과 비방에 흔들리지 않았다.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오면 곧 먹을 것이 없어 걱정하였다.
어떤 사람이 우활(迂闊: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을 의미함)하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는 집안에서 전해받은 재산이 없는데 온 집안 식구가 춥고 굶주리지 않는 것은 모두 나라의 은혜이다. 어찌 자손을 위한 계책을 세워 집안에 전해오는 청렴결백을 잃겠는가.”
하였다.
남을 대할 적에는 온후함을 위주로 하였으나 옳지 않은 일을 보면 절대 구차하게 용서하지 않았다. 언론은 관대하고 화평하기를 힘썼으나 의리가 달린 일에는 반드시 일도양단(一刀兩斷) 하였다. 윤증(尹拯)을 불러들이라고 청할 때 소수(疏首)가 된 적이 있는데, 윤증이 신유년(辛酉年, 1681, 숙종 7)에 보내려던 편지를 보고서야 스스로 한스러워하며,
“이런 일이 있는 줄 일찌감치 알지 못하여 젊었을 때 호오(好惡)가 분명하지 않았으니 후회한들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중씨 참판공이 항상 말하기를,
“우리 형님의 언론이 구차하지 않기가 이와 같다.”
하였다.
공은 두 번 혼인하였다.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지유(之游)의 딸로 죽서(竹西) 종직(宗直)의 증손이다. 부인의 덕과 능력을 모두 갖추어 친족들이 칭찬했다.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석주(石洲) 필(韠)의 손녀로 증 참판 직(謖)이 그 부친이다.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 전처의 자녀를 은혜로 대우하였다.
두 숙인(淑人)은 모두 공의 묘소에 부장하였는데, 한 무덤의 좌우에 있다. 아들 계조(啓祚)와 김준희(金俊煕) 및 판서 이재(李縡)에게 시집간 딸은 심씨 소생이다. 아들 진사 계상(啓祥)과 윤면(尹勉)에게 시집간 딸은 권씨 소생이다.
손자는 도해(道海), 생원 겸해(謙海), 일해(日海), 운해(雲海)이다. 외손은 현감 김원조(金遠祚), 부사 이제원(李濟遠), 윤재임(尹在任), 윤재신(尹在莘), 윤재갑(尹在甲)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보통 사람이 벼슬하는 이유는 / 凡人祿仕
대부분 가난 때문이라네 / 多爲貧制
명분과 행실에 대해서는 / 其於名行
스스로 가다듬는 이 드무네 / 鮮克自礪
꼿꼿하여 속되지 않은 모습 / 骯髒不俗
공의 만년에 보았네 / 見公暮歲
낭관과 수령의 직임 / 郞官百里
덕은 컸으나 지위는 낮았네 / 德鉅位細
도에 어긋남을 부끄러워하여 / 恥存違道
백성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었네 / 民被實惠
나는 내 강직함 지키니 / 吾秉吾直
걸핏하면 시대와 어긋났네 / 動與時戾
청렴결백한 선조에 누가 되지 않고 / 無忝淸白
후세에 전하였네 / 以遺後世
출처는 의리에 따랐으니 / 行止以義
상황 따라 변하지 않았네 / 不失潦霽
칼로 자른 듯한 것은 / 一刀截斷
바른 것과 사악한 것이었네 / 邪正之際
허물이 있으면 통렬히 고치고 / 有過痛改
머뭇거린 적이 없었네 / 曾不吝滯
참된 사대부이니 / 眞士大夫
누가 미칠 수 있으랴 / 其孰能逮
평소의 행실을 따져보면 / 原其素行
효제에 근본을 두었네 / 蓋本孝悌
사위는 덕에 훈도를 받아 / 甥館薰德
교분이 두터웠네 / 情好相契
명에 미덕을 수록하여 / 銘以載美
영원히 변치 않고 전하리라 / 永世不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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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장인 …… 묘갈 :
이 글은 저자의 장인 홍우현(洪禹賢)의 묘갈명이다. 홍우현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사희(士希)이다. 1654년(효종5) 태어나
1729년(영조 5) 11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양호(養戶) :
부유한 자가 천인의 조세를 대신 납부하고 노비처럼 부리는 대상을 말한다.
[주03] 윤증이 …… 편지 :
윤증이 1681년(숙종 7) 송시열에게 보내려던 편지를 말한다. 윤증은 이 글에서 송시열이 왕도와 패도를 아울러 쓰고 의리와 이익을
겸하여 행한다고 비난하였다.《明齋遺稿 別卷3 擬與懷川書》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