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국인 스위스가 서방 세계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들은 대공방어망·전차 등에 사용되는 스위스산 탄약이나 무기, 부품 등을 쌓아놓고도 우크라이나에 지원하지 못하는 중이다.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요충 바흐무트 주변 마을에 자리 잡은 T-64 전차 앞에서 우크라이나군 병사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AFP연합뉴스© Copyright@국민일보 스위스는 군수산업이 매우 발달한 나라다. 그러나 국제법으로 중립국 지위를 보장받은 ‘영세 중립국’으로서 다른 나라의 전쟁에는 철저하게 선을 긋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스위스는 원칙에 따라 분쟁 지역인 우크라이나에 자국산 무기·탄약을 수출하지 않는다. 이미 수출된 무기도 다른 나라를 거쳐 분쟁 지역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통제한다. 나토 회원국들이 우크라이나에 스위스 무기와 탄약을 지원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그래서다. 실제로 스페인과 덴마크는 ‘아스파이드’ 대공방어망, ‘피라냐Ⅲ’ 보병전투용 장갑차 등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한다는 방침을 밝혔으나 스위스의 반대로 철회했다. 두 무기체계는 모두 스위스산 부품을 활용한다. 독일 역시 수십 년 전 비축한 스위스산 게파르트 자주대공포 탄약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려 했으나 스위스의 반대에 백지화됐다. 게파르트 대공포는 우크라이나가 이란제 자폭 드론을 방어하는 데 효율적으로 활용돼왔다. WSJ는 서방 국가로선 시간이 지날수록 스위스산 무기 수출 허용이 절실해지고 있다고 짚었다. 이미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서방국가는 자국의 무기 비축량을 우크라이나 지원용으로 상당 부분 소진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의 포탄·로켓탄 소비량은 서방 정보당국의 예상을 웃돌았다. 서방 국가들의 생산량도 우크라이나의 소비량을 따라잡기 어려울 지경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추가적인 무기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에 우크라이나 고위 당국자가 스위스를 직접 찾아가 이번만큼은 예외 허용을 호소할 방침이라고 WSJ는 전했다. 우크라이나 의회 외교위원회는 스위스 수도 베른에 공식 방문단을 파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우크라이나 의회의 올렉산드르 메레즈코 외교위원장은 WSJ에 “스위스가 우크라이나를 더욱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위스는 주변의 압박에도 중립국 지위를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중립국 지위는 스위스 헌법에서 정해진 원칙이라는 입장을 꺾지 않고 있다. 하지만 스위스 의회도 주변국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특히 스위스산 무기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독일은 스위스 방산업체와 계약 중단까지 거론하며 압박에 나섰다. 스위스 의회에서도 자국의 방위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무기 재수출을 허용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스위스는 전 세계 14위 무기 수출국이다. 스위스 전체 국내총생산(GDP)에서 방위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에 이른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지난달 “우크라이나만큼은 중립인지 아닌지를 따질 게 아니다. 자주권을 존중할 것인지, 법치주의를 수호할 것인지, 유엔 헌장을 사수할 것인지의 문제”라며 스위스의 변화를 촉구했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