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이 덮었던 황장엽-김덕홍의 이야기 전문
황장엽-김덕홍-김용삼 기자 인터뷰 내용 전문
기자: 황선생께서는 96년 11월10일자 친필서신에서 「광주학살 문제도 그들을 뒤에서 사주한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전가한 일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광주 문제와 북한이 어떤 연관이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황: "북에서는 자기네들의 대남사업에 대한 공로를 과장하느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남한에서의 모든 운동, 투쟁은 다 자기네가 지하조직을 통해서 지도한 것으로 주장합니다"
김: "북한의 통일전선부에서는 분기에 한 번씩 강연을 하는데, 광주 문제를 자기네들이 한 것으로 이야기 하더군요"
황: "북한 내부에서 대남사업을 하는 내용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상식화 되어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높아가는 한국에서 왜 데모나 운동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모두 북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대남정책에서 두 가지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는 남로당 때와 같이 (조직을) 노출시키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하당을 이중 삼중으로 만들어 누가 지도하는지 모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노동자나 군인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학생들 속으로 들어가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광주에서 사람들 학살당하게 만든 배후조종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김: "모든 문제는 통일이 되어야 밝혀집니다. (북한에서는) 각 부서에 자신의 사적(기록)이 다 있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의 비준 받은 것, 광주에 가서 어떻게 하겠다는 시나리오가 다 남아 있고, 그 성과로 표창 받고 훈장 받은 사적들이 모두 정리되어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모든 것이 다 나타나기 때문에 여기서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통일이 된 후에 구체적으로 누구의 조작에 의해 광주 문제가 생겼는가, 물론 많은 시민들이 민주화 투쟁에 나선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 앞에 책임질 장본인이 있습니다. 북한에 이런 것들이 다 기록되어 있어요"
황: "광주 문제에 대해 우리는 공개적으로 말 못합니다. 저네들(북한)이 조직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국내에서 일어나는 운동에 대해선 평가를 안 합니다"
기자: 북한에서 어떤 식으로든 광주 문제와 관련하여 접촉과 지령과 움직임이 있었다는 뜻입니까.
황: "그건 우리가 모르지요"
김: "김일성 종합대학 옆에 3호청사가 있어요. 광주운동 이후에 3호청사 사람들이 표창을 많이 받았어요"
황: "동생, 그런 얘기 했다가 또 혼이 나려고 그래?"
김: "형님, 우리가 이런 얘기 하자고 남한에 온 것 아닙니까. 형님은 왜 자꾸 말을 못하게 하십니까. 여기 남한에 와서 꼭 하고 싶은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3호청사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후 일제히 훈장을 받았습니다. 내 친구들이 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들도 광주민주화운동 후에 훈장을 탔다고 축하 술을 함께 마시면서 그들에게 직접 들은 겁니다. (광주 문제는) 통일되기 전에 서둘러서 평가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김용삼 전 기자의 입장 표명
저는 월간조선 편집장으로 근무했던 김용삼입니다. 현재는 언론계를 떠나 경기도 산하기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초에 황장엽 망명 당시 비화를 취재하던 월간조선 후배 기자들이 저를 찾아와 황장엽 망명 당시 공개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묻기에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증언했고, 그것이 월간조선 2013년 5월호에 보도되었습니다.
월간조선 5월호가 발매된 후 TV조선, 그리고 채널A에서 출연 요청이 와서 출연을 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설 논란이 제기되었습니다.저와 ‘광주 문제’와 관련된 내용의 자초지종은 1996년 11월 10일자 황장엽 씨의 친필메모가 그 발단이었습니다.
저는 이연길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장을 통해 북경에서 김덕홍과 황장엽 씨가 망명 의사를 타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연길 회장을 통해 전해지는 황장엽 씨의 친필서신 등 모든 자료를 보관 중이었습니다. 당시 북에 있던 황장엽 노동당 비서는 김덕홍 씨를 통해 자신의 심정을 적은 친필서신을 여러 차례 보내왔는데, 그 중 11월 10일자 친필 메모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었습니다.‘광주 학생문제도 그들을 뒤에서 사주한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전가한 일이다.’
저는 황장엽 씨가 망명한 1997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조선일보에 이 내용이 들어 있는 친필서신을 공개하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황장엽 망명과 광주 민주화운동이 오버랩되면 여러 가지 논란이 벌어질 것을 우려하여 이 부분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또 한 가지, 이 부분을 보도하지 않은 이유는 문맥상으로 볼 때 ‘광주 학생문제’라는 표현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말하는 것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자로서 의문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광주 학생문제’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지칭하는 것이 맞다면 이것이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전가한 일이라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 이런 의문은 황장엽 씨가 한국으로 망명을 한 지 16개월 만에 풀렸습니다.
저는 1998년 7월에 황장엽, 김덕홍 씨와 정식으로 인터뷰를 하게 됐고, 인터뷰 과정에서 지금까지 품고 있던 의문에 대해 황장엽 씨에게 질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장엽, 김덕홍 씨와의 인터뷰 기사는 월간조선 1998년 7월호에 ‘김일성의 서울행을 김정일이 반대했다’는 제목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저는 황장엽 씨에게 광주 문제와 관련하여 친필서신에 적혀 있던 내용에 대한 질문을 했고 황장엽 김덕홍 씨는 그에 대한 답을 했습니다. 당시 황장엽, 김덕홍 씨의 인터뷰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을 밝히고자 합니다. 황장엽 김덕홍 씨와의 인터뷰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저는 국정원에 “배석자 없이 ‘최대한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황장엽, 김덕홍 씨는 김대중 정부의 국정원에서 각종 도청장치와 감시 카메라가 달려 있는 공간에서 거의 감금생활을 강요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정원 측은 저의 요구조건을 수락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루 앞두고는 “두 분에 대한 신변경호 문제로 국정원 직원 두 사람이 배석하겠다. 대신 배석자들은 일체의 필기도구를 지참하지 않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나 인터뷰 당일에는 약속과는 달리 네 명의 국정원 요원이 인터뷰 장소에 들어와 가림막을 치고는 뒤에 앉아서 황장엽 김덕홍 씨가 월간조선과 나눈 대화내용을 모두 기록해 갔습니다. 책임 있는 국가의 정보기관이 언론과의 약속을 식은 죽 먹듯이 뒤집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기자로서 말할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더욱 속이 뒤집히는 것은 인터뷰 다음날 국정원 고위 간부가 전화를 걸어 황장엽, 김덕홍 두 분의 광주 관련 언급이 광주 지역 여론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됐는지 “두 분이 민감한 현안문제를 언급한 부분(광주 문제)에 대한 보도 자제”를 요청해 온 것입니다.
제가 “그럴 바에야 인터뷰는 무엇하러 하는가” 하고 거세게 항의하자 “민감한 사안이라서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다. 표현을 순화시켜달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든 언론사가 다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20년을 근무한 월간조선의 경우는 해당 기자가 쓴 기사는 출고되기까지 여러 과정과 절차를 거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선 동료 기자들과 선배 기자, 그리고 차장을 거쳐 편집장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여러 관련자들이 기사를 돌려봅니다.
특히 민감한 사안을 다룬 기사일수록 검증 절차는 더욱 까다롭게 진행됩니다. 동료 기자나 선배들이 기사를 보면서 사실 관계가 잘못된 부분은 없는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소지는 없는지, 수치나 이름 지명 등이 제대로 표기됐는지,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없는지, 기사가 특정인이나 단체 등의 명예를 실추하거나 훼손시킬 만한 표현이나 내용은 없는지 등을 꼼꼼하게 지적하고, 지도하고 수정하는 ‘게이트 키핑’ 기능을 수행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모르겠습니다만 월간조선 편집진에서도 황장엽 인터뷰 기사 중 광주 관련 부분은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분들과의 분란이 발생할 경우 황장엽 씨의 입장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해 월간조선 편집진이 문제의 부분을 보도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제가 이번 광주 문제와 관련한 논란이 제기되면서 오래 전의 자료와 파일들을 찾다보니 황장엽 김덕홍 씨와 인터뷰를 한 후 정리한 초고 원고가 파일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당시에 공개되지 못하고 저의 컴퓨터 속에 잠자고 있던 황장엽, 김덕홍 씨의 광주 부분 관련 대화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부분은 이 자리를 빌어 처음 공개하는 것입니다(아래 내용 중 ‘황’은 황장엽, ‘김’은 김덕홍을 지칭).
이것이 당시 황장엽, 김덕홍 씨와 제가 나눈, 국정원 측의 ‘협조 요청’으로 공개되지 못한 대화 내용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 문제와 관련하여 보수 우파 인사들끼리 감정충돌이 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북한군 특수부대가 광주에 왔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아마 북한이 원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이런 싸움이 일어나 서로를 공격하고 비방하여 분열을 조장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감정싸움보다는 지금이라도 여러 사실관계들을 명명백백하게 연구하고 추적하여 진실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김덕홍 씨 말처럼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설 여부에 대해서는 현 단계에서 서둘러 “그런 일 없었다”고 결론을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먼 훗날 통일이 되어 동독에서처럼 북한판 슈타지 문서가 공개되어 어떤 진상이 드러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봅니다. 김덕홍 씨는 저와의 인터뷰에서 “구체적으로 누구의 조작에 의해 광주 문제가 생겼는가, 물론 많은 시민들이 민주화 투쟁에 나선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 앞에 책임질 장본인이 있다. 북한에 이런 것들이 다 기록되어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김덕홍 씨가 한국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려고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꾸며내서 위와 같은 발언을 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북한에서 고위층으로 살다가 목숨 걸고 탈출해 한국으로 망명해 온 분들의 소중한 증언을 애써 무시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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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환 편집인/김용삼 전 월간조선 편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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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올인코리아
http://www.allinkorea.net/sub_read.html?uid=27683§ion=section11§ion2=
2013.6.8. 지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