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뒤를 이어 개혁정치로 백성들과 함께 하고자 한 학자군주 정조는 1800년 6월, 정조 24년 향년(享年 누릴 향, 해 년) 49세의 나이로 죽었다. 정조 대왕의 죽음은 왕이 교체된다는 단순한 사실의 변화가 아닌 개혁정치의 퇴보와 백성들의 고통이 겹겹이 쌓일 것이라는 근본적인 삶의 변화이기에 조선의 슬픔이었다.
양난과 사색붕당에 의한 당쟁으로 정치기강의 문란, 지방 토호들의 탐학, 조세수취의 가혹함으로 이미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한 와중에 영·정조의 등장은 가뭄에 단비와도 같이 백성들에게는 희망이었다.
궁에서 궁녀들의 잔심부름을 했던 천한 무수리의 아들이었던 영조는 장희빈의 소생이었던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임인사옥(세제책봉문제와 대리청정문제로 경종이 노론 60여명 처형, 170여명 유배)의 와중에서도 살아남아 무수리의 아들 영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처세술과 더불어 노론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런 노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영조는 노론과 선을 긋게 된 자기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여야만 했다.
사도세자는 15세에 대리청정을 맡을 정도로 총명하였고, 당쟁에 대한 인식도 치우침이 없었다. 그런 그가 나경언이란 일개 별감의 고변에 의해 죽어야만 했던 것은 노론 세력과 등을 지면서 노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영조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다. 영조는 자기 아들을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뒤주에 가두어 직접 못질을 하여 죽도록 했다. ‘아버지를 살려달라’는 손자(정조)의 울부짖음을 외면한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뒤 세자의 지위를 복권시키고, ‘사도’(思悼 생각할 사, 슬퍼할 도)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아들을 죽여야만 했던 아버지 영조의 슬픔은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사도세자가 성격에 이상이 있어서 죽였는지, 노론에 의한 정치적 희생양이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당시의 상황을 추론해보면 답은 나온다.
그 답을 알고 있는 이가 바로 영조의 손자, 즉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였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왕이 된 이후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독자적 정치 노선으로 인한 노론측의 모함’이라고 주장한 반면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성격 이상설’을 주장하여 전혀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단서는 혜경궁 홍씨도 노론 가문 출신인 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정조는 노론측의 모함으로 아버지가 죽음을 당했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런 결론은 지극히 당연한 개혁정책으로 연결되며 그 개혁정책이 지배계층인 노론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백성을 위한 정책과 일맥상통한다.
정조는 영조 때보다 더욱 강력한 탕평책을 폈다. 이름하여 ‘준론(峻論 엄할 준) 탕평’이다. 한자가 의미하는 바처럼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을 추진하여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 환관 등을 제거하고 영조 때의 탕평파 대신들을 엄격하게 비판하였던 노론과 소론의 일부와 정치 집단에서 배제되었던 남인 계열을 중용하였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정조 12년에 우의정에 발탁된 남인 시파 채제공이다. 채제공은 임오화변(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 당시에 ‘폐세자는 부당하다’며 궐문 앞에서 복합상소를 올린 인물이었다.
정조는 개혁정치의 중추기관이었던 규장각을 설치하고 국왕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 강화를 꾀하였으며, 준론 탕평을 통해 당파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고, 백성들을 직접 만나 민의(民意)을 수렴하였다. 愛民의 단적인 예로 격쟁(擊錚, 칠 격, 징 쟁)과 상언(上言)의 폭발적 증가를 들 수 있다. 정조는 궁궐 내에서만 허용되던 격쟁(징을 치고 왕 앞에 나와 호소하는 것)을 국왕의 행차시에도 허락했으며, 상언(글로 호소하는 것)의 자격과 내용 제한을 철폐하였다. 격쟁과 상언의 폭발적 증가는 정조의 화성행차와도 관련이 깊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현륭원(顯隆園)’으로 명명하였고, 정약용의 거중기로 유명한 수원성을 쌓았다. 그리고 재위기간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수원의 현륭원을 행차하였다. 왕이 한양을 떠나 한강다리를 건너서(한강에 배다리, 주교(舟橋) 설치) 수원까지 행차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될 백성들의 삶의 모습, 그리고 그들의 억울함은 격쟁과 상언으로 담겨졌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가능하지 않는가?
이글을 읽고 있는 수험생들에게 묻고자 한다. 뒤주에 갇혀 고통스럽게 울부짖다 죽은 아버지의 묘를 보고 돌아오면서 정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준론탕평을 시행하고 애민정책을 펴고자 했던 그의 아픔은 ‘아버지 묘소의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자 그 송충이를 집어 삼켜버렸다’는 일화를 통해 알 수 있지 않을까?
효도하고자 하여도 살아계시지 않는 아버지!!
뒤주 속에 갇혀서 울부짖던 아버지를 가슴속에 묻어야만 했던 정조!!!
그 정조가 세월을 허송하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였으며,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개혁정책을 펴낸 것이다. ‘초계문신제(조정 문신 중 37세 이하인 자들을 선발하여 규장각에서 공부, 정기적으로 시험 실시 : 신진인물이나 중·하급 관리들의 재교육)’를 시행할 수 있었던 것도 정조의 이런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러분의 수험생활은 어떠한가?
부족함에 핑계와 변명을 찾고 있다면 이제 다시 날을 갈아야 한다. 무뎌진 날로는 종이 한 장 베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기회가 주어질 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만 하며, 목표한 바가 있다면 산맥처럼 당당하게 흔들림 없이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선택당하지 않고 선택하며 사는 삶이다.
그런데 그런 정조가 죽었다. 실학과 진경산수화, 풍속화가 융성하고, 서얼출신들(박제가, 이덕무, 서이수, 유득공)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고, 신해통공으로 상업이 발전하고, 공장안 폐지로 자유수공업(사영수공업)이 발달하였으며, 민의를 수렴하고 정치에 반영하고자 노력한 학자 군주 정조가 죽은 것이다. 자주 시험에 나오고 있는 공노비 혁파(순조 원년, 1801년)도 노비제 혁파를 계획했던 정조의 개혁안에서 크게 후퇴된 것이었기에 정조의 죽음은 슬프다. 아니 조선의 백성들은 지지리 복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