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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5일 (요12 온 세상이 따르다).hwp
2020년 4월 5일 평화목교회 주일가정예배 말씀묵상
홍지훈 목사 * 사순절 여섯째 주일(종려주일)
요한복음 12:12-19
온 세상이 따르다
<요한복음 12:12-19>
“다음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타셨다. 그것은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과 같았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이것이 예수를 두고 기록한 것이며, 또 사람들도 그에게 그렇게 대하였다는 것을 회상하였다. 또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 일어난 일을 증언하였다. 이렇게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가 이런 표징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올 해 사순절 동안 평화목교회는 단 한 번도 예배당에서 함께 모이지 못하고 드디어 종려주일을 맞았습니다. 2월 중순부터 마스크를 쓰고 겨우 모이다가, 3월 한 달 내내 우리는 가정예배로 드렸습니다. 교우들도 그러하시겠지만, 제 경우에는 무척이나 어색하고 답답합니다. 주일을 맞으면 당연히 교회에 가는 것이 저의 일상인데, 집에 그냥 있으려니 도무지 익숙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시간에 교회에 가서 가정예배 순서지에 따라 드린 예배영상을 밴드를 통해서 평화목교회 교우들께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아파트 상가교회여서 보는 눈이 많기 때문에, 평화목교회가 오해 받지 않도록 조심하느라고, 토요일에 가서 영상을 만들기도 하고, 지난주에는 아예 영상이 아닌 사진을 넣어 프레젠테이션 예배자료 비디오를 집에서 만들어 올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배당에 가본지도 이번에는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혹시 물은 새나오지 않는지, 화분은 잘 살아있는지, 지금도 걱정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 예배당에 가서 영상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종려주일이니까 더욱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주일이 부활주일인데, 부활절에는 함께 모이면 정말 좋겠다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부활절에 모인다고 해도 마스크를 써야하기에 예배의 분위기도 정상이 아닐 것이고, 또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야하기에 친교의 식사도 나누지 못할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서로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합하여 찬양하며 예배드리던 때가 정말 그립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모이지 못하게 되니, 전에 모이던 것이 그립다는 것은 그 고마움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쁜 일 때문에 교회에 오지 못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경우를 위해서 주보와 설교문을 Daum Cafe에 올려둡니다. 멀리서라도 읽어보시고,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예배를 그리워하시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예 모이지 못 하게 되니 마음이 어떠십니까? 교회에 가고 싶은데도 가지 못하는 심정 말입니다. 혼자서 집에 앉아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마주 않아도 그렇습니다. 제가 밴드에 올린 영상을 휴대폰으로 보며 따라하는 것도 쑥스럽습니다. 산책을 하다보면 요새 부쩍, 휴대폰으로 예배음성을 듣고 다니는 분이 많아졌더군요.
예배 이야기만 하고 있지만, 사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모두 이상해졌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어오면 몸이 먼저 반응하면서 피하지 않습니까?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스크 안 쓴 이웃을 만나면 얼굴을 돌리지 않습니까? 모두가 다 이상해진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외국인은 물론이고, 외국에서 돌아오는 동족에게 까지도 날선 반응을 보이에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선대하라는 가르침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만큼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합니다.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더군요. 모이는 이유가 혼자서 신앙생활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연합이란 삼겹줄과 같아서 강합니다. 혼자서 신앙을 지키는 것은 매우 강한 사람이 아니면 어렵습니다. 교회에서 함께 모여서 무엇인가 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일과 같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런 마음으로 예루살렘 성문 앞에 모인 군중들의 음성과 그 사건에 관한 말씀묵상을 통하여, 주님의 가르침으로 “모인” 우리의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종려주일이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어린나귀를 타고 입성할 때, 백성들이 종려나무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구원하여주십시오!)라고 크게 외치며 환영한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스가랴 9장 9절을 보면, 이스라엘을 구원할 임금이 오실 때에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예언이 있어서 주님은 그렇게 입성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 밖에서 주님이 활동할 때에는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그리 크게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소식은 듣고 있었고, 위험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기회가 생기면 제거해야한다고 모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가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예수님은 성안으로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이미 여러 차례 들어갔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쫒아내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러므로 오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은 다른 의미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무엇일까요? 공식적 입성일까요?
이 사건의 핵심은 예수가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다는 점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것이지요. 만일에 주님이 자기가 누군지 관심을 받지 못하던 때에 어린 나귀를 타고 성으로 들어왔다고 가정해봅시다. 아마 “저 어른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어린 나귀를 타고 돌아다니는가?”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는 유명한 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구약 예언서인 스가랴에 기록된 예언을 행하는 것은 주목을 크게 받을 일이지요. 여기서 스가랴 9장 9-10절 한 번 읽어 보십시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왕이 오시는데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온다고 예언합니다. 그런데 그 왕은 “온순한” 왕입니다. “겸손”을 상징합니다. 그 말의 의미는 지배자 군주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하죠. 병거를 없애고, 군마를 없애며, 활도 꺾어버린다고 말입니다. 이 왕은 이방세계에도 평화를 선포하고 그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즉 온 세상에 퍼진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문 앞에선 백성들이 와~ 와~ 환성을 크게 올리면서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구원자라고 외친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자신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환영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가 “자신들을 구원할 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왕다운 왕이 없습니다. 헤롯대왕의 후손들이 나누어 다스리던 시절이었는데, 그들은 정통 이스라엘의 족속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지배자인 로마에 아첨하는 매국노 취급을 받았습니다. 과거 다윗 왕 시절의 영화로움을 추억하는 백성들은 다윗 가문도 아닌 헤롯이 다스리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지금 호산나 구원자여라고 외치며 환영하는 것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나온 말입니다.
오늘 묵상말씀 속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맨 마지막 말입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한 말입니다. 바리새파는 체념하고 포기하였습니다. 그토록 막아보려고 했는데, 예수운동을 이제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백성이 들고 일어나면 도저히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는 예수의 모습이 스가랴 9장 9절에 나오는 예언의 성취이고, 백성들이 이것을 인정한다는 것을 바리새파 사람들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도 스스로를 왕이라 생각하고, 왕에 걸 맞는 기적들을 보였고, 백성들도 모두 저렇게 열렬히 환영을 하니, 이제 세상이 뒤집힐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익숙한 바리새파사람들은 스가랴 9장 9절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다음 10절은 눈에 안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 왕이 “평화의 왕”이라는 말은 못 본 모양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하나님이 보내시는 종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이사야 53:4-6)
바리새파 사람들만 이 사실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성을 울리던 백성들도 똑같이 몰랐습니다. 관심이 없었던 것이죠. 아니면 관심이 달랐을 것입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가 갖고 싶은 것만 바라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정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가 이런 표징을 행하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요12:18) 무슨 기적인가하면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는 기적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그런 날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어떤 분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따르던 자신을 한 번 돌아보게 만드는 날입니다. 나도 그런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다 따라갔다>고 바리새파도 착각하고, 백성들도 모두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꾸면 맞지요. “온 세상이 다 자기가 바라는 길로 따라 갔다.”고 말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방향을 예수께 맞추지 않으면, 그것은 다 자기 갈 길로 가면서 말로만 예수 따른다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께 방향을 맞추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매사에 예수 이름을 부른다고요?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한다고요? 예수의 가르침을 모르는데 그게 되겠습니까? 알아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지워버렸는데 예수께 방향이 맞추어지겠습니까? 성경을 잘 안다는 바리새인도 스가랴 9장 9절만 보고 10절은 기억에서 지워버리지 않습니까?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사순절 5째 주간을 우리가 <방향정하기>를 하자고 했고, 6째 주간 고난주간을 <확인하기> 주간으로 삼자고 했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삶이 어디에 중심을 두고 있는지를 깨닫기 위함입니다.
예수께 방향을 정하고 예수 중심으로 산다면,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중심이 나로부터 조금이라도 이동할 기미가 보이는지 확인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태어납니다. 형제와 나누는 것이 때어나서 처음 겪는 시련이지요. 부모에게 받기만 바라지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드리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자식이 원하는 대로 해줄 용의는 쉽게 생기던가요? 부부간에 중심을 상대방에게 주는 것은 어떠신가요? 가족의 범주를 넘어서면 어떻습니까? 나보다 못해 보이는 타인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내가 옳다고 판단되면, 상대방의 주장은 묵살하다 못해, 망신을 주게 되지 않던가요? 정의를 실천하다 자비를 잃어버려도 안 되고, 자비를 실천하다가 정의를 놓쳐도 안 되지 않습니까?
“저 성문 안으로 어린 나귀타고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은 예수님만 알았습니다. 주님은 지금 죽으려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문 앞에선 우리들은 “저분이 들어오면 우리는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며 환영합니다. 죽음으로 주시려는 구원의 의미와 우리가 기대하는 구원이 다른 것입니다. 이것을 일치시켜보는 것이 사순절이고 고난주간입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라는 바리새파의 체념 섞인 말이 진실이 되게 만들어 보는 시간입니다.
어떻게 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는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개인이 해결해야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가 자기의 중심이 되는 일을 지나치게 좋아한다는 것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