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스승 번암(樊巖) 채제공. 미수 허목, 성호 이익을 그리며 222년전에 관악산에 오르다. 지금으로 부터 300년 전에는 성호 이익선생께서 관악산에 오르시고 글을 남겼다.(제일 아래 참조) 관악산은 예로부터 진산으로 많은 이들이 올랐고 지금도 일주일 내내 많은 이들이 찾는 명산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환갑이 넘으신 예순일곱의 백발로 신발조차 변변치 않고 지금보다 산길이 더욱 험하고 숲이 우거졌을텐데 2박3일간 어찌오르셨는지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이보다 간결하며 생생한 관악산 등반기를 볼 수 있을까 [사진·글정리 2008 2 28 금요일 한국의산천]
▲ 관악산 육봉에서 ⓒ 2008 한국의산천 빈손 노래 문희옥 (작사 이정화. 작곡 안치행) 아 엽전한닢 없는 무일푼 빈털털이 그러나 마음은 항상 행복이란다 못생겨도 잘생겨도 애당초 빈손 애당초 빈손 바람에 구름가듯 그렇게 가는 인생
아 오직 남은것은 새하얀 머리카락 외로운 인생길에 선물이더냐 따르는 한잔술에 과거를 마신다 왕년의 이야기를 하지말아라 잘살아도 못살아도 애당초 빈손 애당초 빈손 구름에 세월가듯 그렇게 가는 인생
예순 일곱에 오른 관악산 연주대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여관악산기(遊冠岳山記) 그 중 동자하(과천쪽에서 오르는 길)가 가장 아름다웠으며, 관악산 전체로는 연주대의 경관이 빼어났다. 채제공은 여든 셋의 나이에 날 듯이 관악산을 오른 허목을 생각하고, 그의 체력과 학문을 따르고자 하였다. 채제공은 허목처럼 여든 셋의 나이는 아니었지만 예순 일곱에 관악산을 오르게 된다. (미수 허목(1595-1682)은 17세기 남인의 영수였으며 조선조 5백년 동안 임금으로부터 거택(居宅)을 하사받은 정승은 황희 정승,오리정승 이원익 그리고 미수 허목 세 사람뿐이다.)
명재상 채제공 그는 정조 개혁 정책의 총사령관이었다. 정조는 죽기 몇 주일 전 신하들과 대담한 오회연교(五晦筵敎)에서, 자신의 탕평정치의 기둥은 8년 정도 시련을 주었다가 믿고 골라서 등용한 3정승이라고 지적하였다. 정조는 이 세사람을 선택한 기준을 ' 맑은 의견을 지키고 준엄한 정치원칙을 지닌 인물'이라고 밝혔다. 그 세사람은 노론 청명담의 김종수와 윤시동, 그리고 남인 청류당의 채제공이다.
▲ 구름이 있어 더욱 파란 하늘과 관악산 정상부 ⓒ 2008 한국의산천
번암(樊巖) 채 제공(蔡 濟恭 1720-99: 정조때 영의정) 유관악산기 (遊冠岳山記)
번암 채제공이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쓴 글 (원문인 한문은 생략) "나는 또한 힘을 다하여 곱사처럼 등을 구부리고 기어서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돌이 있으니 평편하여 수십명이 앉을만 하였다. 그이름을 차일암(遮日巖)이라고 하였다. 옛날 양영대군이 왕위를 회피하여 관악에 와 머무를 때 간혹 여기에 올라서 대궐을 바라보았는데 해가 뜨거워서 오래 머무르기가 어려우므로 작은 천막을 치고 앉았다고 한다. 바위 구석에 우묵하게 파놓은 구멍이 네 개가 있다. 아마 천막을 안정시키는 기둥을 세우던 곳일 것이다. 구멍이 완연하다. 대를 연주대(戀主臺)라고 하고 바위를 차일암이라고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글 채희묵]
▲ 사극 정조 이산에서 채제공역을 맡은 탈렌트 한인수(정조가 세손이었을 당시 왕세자 교육을 담당했던 채제공) ⓒ 2008 한국의산천
정조가 출생하던 1752년 겨울, 사도세자는 당론을 잘못 처리했다 하여, 홍역이라는 열병을 앓는 상태에서 눈 위에 엎드려 대죄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영조가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는 선위소동을 잇달아 일으켜 또다시 며칠 동안 얼음 위에서 석고대죄까지 해야 했다. 그 결과 사도세자는 정신병을 얻었고, 이것이 화병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 관악산 염주암에서 휴식중인 등산객 ⓒ 2008 한국의산천
시,서,화 삼절로 빼어나 조선조 4대 문장가였던 채제공.
연주대(戀主臺)는 영주대(靈珠臺), 또는 영주대(影炷臺)라고도 한다. 채제공은 양녕대군의 자취가 서린 곳이라 하였지만, 그 후학 홍직필(洪直弼)은 고려 말 사천(沙川) 남을진(南乙珍)·송산(松山) 조견 ·번당 서견(徐甄) 세 현자가 세상을 피하여 머리를 깎고 이곳에 삼막(三幕)을 지어 멀리 개성의 곡령(鵠嶺)을 바라보며 통곡하였기에 연주대(戀主臺)라 하였다 한다.
채제공 1720(숙종 46)∼1799(정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채제공의 자는 백규(伯規),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 본관은 평강(平康)으로 채응일의 아들로 태어으며 그의 5대조가 효종(1649 ~ 1659)때 대제학(정2품)을 지낸 채유후(1599 ~1660) 이다. 채제공은 1758년 당시 영조(1724 ~ 1776)가 사도세자를 폐하려고 할때 목숨을 걸고 이를 저지할만큼 강직한 사람이었다 이때에 영조는 채제공이 당색을 떠나 원칙에 충실한 충신임을 인정했다고 한다.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악화되어 세자 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하여 후일 영조는 채제공을 지적하여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 라고 정조에게 말했다 한다.
1735년(영조 11) 15세로 향시에 급제한 뒤 1743년 문과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채제공이 정조와 정식으로 인연을 맺게된건 1767년 세손우빈객.공시당상이 되면서부터이다. 다시말해서 세손(훗날의 정조)의 교육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1776년 3월에 영조가 죽자 국장도감제조에 임명되어 행장·시장·어제·어필의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어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책임자들을 처단할 때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를 처결하였다. 또한 영조 승하이후 정조 치세에서 채제공을 빼놓고는 논할수 없을만큼 채제공의 역할은 컸었다. 정조 4년 홍국영(洪國榮)의 세도가 무너지고 소론계 공신인 서명선(徐命善)을 영의정으로 하는 정권이 들어서자, 홍국영(1748 ~ 1781)과의 친분, 사도세자의 신원에 대한 과격한 주장으로 정조 원년에 역적으로 처단된 인물들과의 연관, 그들과 동일한 흉언을 했다는 죄목으로 집중 공격을 받아 이후 8년 간 서울근교에서 칩거 생활을 하게되며 채제공이 다시금 조정에 출사하게된건 1788년 정조가 채제공을 우의정(정1품)에 제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때에 채제공은 '6조진언'을 올린다. 이후 1790년 좌의정으로서 행정 수반이 되었고, 3년 간에 걸치는 독상(獨相)으로서 정사를 오로지 하기도 하였다.
채제공의 6조 진언의 내용 1. 황극 즉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바로 세울것 채제공의 이 6조진언을 정조는 모두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동안 정계에서 소외돼 왔던 남인과 북학파들을 대거 기용하게 된다. 남인의 정약용,이가환 북학파의 박제가 서얼출신의 유득공,이덕무 등이모두 이때에 활약하게 된다. 흔히 말하는 실학은 이때에 이르러 크게 융성했다고 전하며 1790년 채제공은 좌의정에 제수되는데 공교롭게도 이때에는 영의정과 우의정이 공석이었다고 한다. 이같은 현상은 향후 3년간 지속되는데 흔히 이3년간을 일컬어 채제공의 독상(獨相)이라고 말한다. 즉 하나의 정승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문장은 소(疏)와 차(箚)에 능했고, 시풍은 위로는 이민구(李敏求)·허목(許穆), 아래로는 정약용(丁若鏞)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또한, 학문의 적통(嫡統)은 동방의 주자인 이황(李滉)에게 시작하여 정구(鄭逑)와 허목을 거쳐 이익(李瀷)으로 이어진다고 하면서 정통 성리학의 견해를 유지하였다. 때문에 양명학·불교·도교·민간신앙 등을 이단이라고 비판하였다. 채제공은 1798년 79세의 나이로 수원성 축성 감독(수원성을 지은 책임자로 기록된 정조 때의 영의정 채제공의 공식 직함은 "화성성역도감華城城役都監)을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하고 8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채제공은 1801년 신유박해때 관작을 추탈당하다가 1823년에 와서야 신원이 된다.
저서로는 번암집, 함인록(채제공 연행시집) 등이 있다. 번암집(樊巖集)은 그의 호인 번암(樊巖)을 따서 명명한 61권 27책의 목판본 규장각도서이다. 권두에 정조의 친필어찰 및 교지를 수록하였다.이 책은 시문집으로 그가 죽은 약 25년 후인 1824년 순조 때 그의 아들 홍원(弘遠)이 이정운, 최헌중등의 협력을 얻어 간행된 책이다.그는 '경종내수실록'과 '영조실록'· '국조보감'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1801년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추탈관작되었다가 1823년 영남만인소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799년 1월 18일에 사망, 3월 26일에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가 거행되었고, 묘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체재공의 묘 앞에는 '소나무처럼 높고 높아 우뚝 솟았고, 산처럼 깎아지른 듯 험준하여라'고 시작되는 뇌문비(뇌 文碑)는 정조가 번암(樊巖)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생전의 공적을 친히 짓고 쓴 뇌문을 새겨 세운 비석으로 두전(頭篆)에 새긴 '御製 文'이라는 글자는 30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고, 임금의 친필 어제이기 때문에 찬(撰)하고 쓴 사람이 없다.
번암(樊巖) 채제공의 묘 비문(碑文)에는 '조선국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 겸령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검교규장각제학 증문숙공 번암채선생제공지묘' 라 쓰여 있다. 비문의 내용은 채제공의 공적을 기리고 애도의 뜻을 표한 거승로, 5백여자로 되어 있다. 서두에 "소나무처럼 높고 높아 우뚝 솟았고, 사처럼 깍아지른듯 험준하여라"하면서 칭송하였다. 그리고, 성품을 "그 기개는 엷은 구름같이 넓고, 도량은 바다를 삼킬 듯 크다."고 하였다. 문장은"강개하고 청명하여 장주의 정을 취한 듯, 열자의 진액인 듯하고, 사마천의 골수 같고, 반고의 힘줄 같다."고 격찬하였다. 이어서 정조와 채제공의 친분을 일일이 열거하였다.
정조 스스로 "경을 알고 경을 씀에 내 득실히 믿었노라"하였다. 끝부분에서는 "조정에 노성이 없다면 국가를 어찌 보존하랴. 또한 어버이에게 효도한다 소문 자자하니 경같은 이는 매우 드물도다"하면서 5백여 마디의 말로써 뇌문을 지었노라고 자술하였다. 정조 23년(1799)에 세워진 이 비문에서 신하와 왕의 관계를 뛰어 넘는 애뜻한 사랑이 느껴진다. 이 비문의 맨 끝에 [乙未三月 二十六日]이라는 명문 있어 정조 23년(1799) 3얼 26일에 지어 새긴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 관악산 연주대 정상석 ⓒ 2008 한국의산천
예순 일곱에 오른 관악산 연주대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여관악산기(遊冠岳山記) 그 중 동자하(과천쪽에서 오르는 길)가 가장 아름다웠으며, 관악산 전체로는 연주대의 경관이 빼어났다. 채제공은 여든 셋의 나이에 날 듯이 관악산을 오른 허목을 생각하고, 그의 체력과 학문을 따르고자 하였다. 채제공은 허목처럼 여든 셋의 나이는 아니었지만 예순 일곱에 관악산을 오르게 된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미수 허목(許穆) 선생이 여든 셋에 관악산 연주대(戀主臺)에 오르는데 걸음걸이가 나는 듯하여, 사람들이 이를 쳐다보고 신선으로 여겼다고 한다. 관악산은 서울의 신령한 산이요, 선현들이 일찍이 유람한 곳이기도 하다. 한 번 그 위로 올라가서 마음과 눈을 씩씩하게 하고 산을 우러르는 마음을 깃들이고자 하여 오랫동안 간절하게 계획을 품어왔지만, 속세의 때를 벗지 못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병오년(정조 10년 1786) 봄 노량진 강가에 우거하고 있었다. 관악산 푸른 빛이 눈으로 들어올 듯하였다. 가고 싶은 뜻이야 너울너울 춤을 추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4월 13일 남쪽 이웃에 사는 이숙현(李叔賢 이름은 廣國)과 약속하고 말을 타고 길을 나섰다. 아이들과 종도 너댓 명이 되었다.
▲ 동자하동계곡(과천코스) ⓒ 2008 한국의산천
10리쯤 가서 자하동(紫霞洞)으로 들어갔다. 한 칸 규모의 정자에 올라 쉬었다. 계곡물이 산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데 숲이 뒤덮고 있어 그 근원을 알 수 없다. 물길이 정자 아래에 이르러 바위를 만나게 된다. 날리는 것은 포말이 되고 고이는 것은 푸른빛을 이루다가 마침내 넘실넘실 흘러 골짜기 입구를 에워싸고 멀리 떠나간다. 마치 흰 비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언덕 위에 철쭉꽃이 막 피어, 바람이 불면 그윽한 향기가 때때로 물을 건너 이른다. 산에 들어 가기도 전에 시원하여 멀리 떠나온 흥취가 일었다.
정자를 경유하여 다시 10리쯤 갔다. 길이 험준해서 말을 탈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말과 마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가서 넝쿨을 뚫고 골짜기를 지났다. 앞에서 길을 인도하던 자가 절이 어디 있는지를 잃어버렸다. 동서남북도 알 수 없었다. 벌써 해가 질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길에 나뭇꾼이 없어 물어 볼 수도 없었다. 하인 중에 어떤 놈은 앉았고 어떤 놈은 서 있으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갑자기 숙현이 날 듯이 끊어진 낭떠러지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리 저리 번쩍번쩍하는 모습이 보이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한편으로 괴이하고 한편으로 괘씸하였다.
조금 있으니 흰 중옷을 입은 사람 4∼5명이 어디선가 나타나 빠르게 산을 내려왔다. 하인들이 모두 소리를 지르고 기뻐하며 "스님이 왔습니다." 하였다. 숙현이 멀리서 절을 보고 먼저 가서 승려들에게 우리 일행이 여기에 있다고 일렀던 것이다. 이에 승려의 인도를 받아 대략 4∼5리쯤 떨어져 있는 절에 이르렀다. 절 이름은 불성암佛性庵이었다. 절은 삼면이 봉우리로 둘러쌓여 있는데 한 면만 탁 트이어 막힘이 없었다. 문을 열면 앉으나 누우나 천리 먼 곳까지 눈 안에 들어왔다. 다음날 해가 뜨기 전에 밥을 재촉하여 먹고 연주대라는 곳으로 찾아가려 하였다. 건장한 승려 약간 명을 골라 인도하게 하였다. 승려들이 나에게 말했다.
"연주대는 여기서 10리쯤 됩니다. 길이 매우 험하여 나뭇꾼이나 중들도 쉽게 넘을 수가 없습니다. 기력이 못미치실까 걱정됩니다."
채제공은 말하였다. "천하만사는 마음에 달렸을 뿐이다. 마음은 장수요,기운은 졸개다. 그 장수가 가는데 그 졸개가 어찌 가지 않겠는가?"
▲ 채제공께서 지나가신 불성사에서 연주대로 오르는 길 오른쪽으로 연주대가 보인다. (제 모습 하나 건졌습니다) ⓒ 2008 한국의산천
마침내 절 뒤편의 가파른 벼랑길을 넘어섰다. 길을 가다가 끊어진 길과 깎아지른 벼랑을 만나기도 하였다. 그 아래가 천길 절벽이므로 몸을 돌려 절벽에 바짝 붙어 손으로 늙은 나무뿌리를 바꿔 잡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현기증이 나서 옆으로 눈길을 보낼 수가 없었다. 혹 큰 바위가 길 가운데를 막고 있는 곳을 만날 때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오목하여 그다지 뾰족하지 않은 곳을 골라 엉덩이를 거기 붙이고 두 손으로 그 주변을 부여잡으며 미끄러지듯이 내려갔다. 고쟁이가 뾰족한 부분에 찢어져도 안타까워할 틈이 없었다. 이와 같은 곳을 여러 번 만난 다음에야 연주대 아래에 이르렀다.
이미 정오가 되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놀러온 사람들 중에 우리보다 일찍 올라간 이들이 만 길 절벽 위에 서서 몸을 굽히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흔들흔들 마치 떨어질 듯하였다. 이를 보자니 모골이 다송연하여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하인을 시켜 큰 소리로 "(위험하니)그만 두시오, 그만 두시오." 하였다.
▲ 관악산 연주대 ⓒ 2008 한국의산천
나는 또한 힘을 다하여 곱사처럼 등을 구부리고 기어서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돌이 있으니 평편하여 수십명이 앉을만 하였다. 그이름을 차일암(遮日巖)이라고 하였다. 옛날 양영대군(讓寧大君)이 왕위를 회피하여 관악에 와 머무를 때 간혹 여기에 올라서 대궐을 바라보았는데 해가 뜨거워서 오래 머무르기가 어려우므로 작은 장막을 치고 앉았다고 한다. 바위 구석에 우묵하게 파놓은 구멍이 네 개가 있다. 아마 천막을 안정시키는 기둥을 세우던 곳일 것이다. 구멍이 완연하다. 대를 연주대(戀主臺)라고 하고 바위를 차일암이라고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연주대에 오른 채제공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관악산 연주대와 연주암 ⓒ 2008 한국의산천
▲ 채제공의 말씀대로 서쪽은 마치 하늘과 바다가 이어져 있다. 하늘에서 보자면 바다고 바다에서 보자면 하늘처럼 보일 터이나, 하늘과 바다를 누가 분간할 수 있겠는가? ⓒ 2008 한국의산천
한양의 성궐이 밥상을 대한듯이 바라보였다. 일단의 소나무와 전나무가 빽빽하게 에워싼 곳이 경복궁 옛터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수백 년이 지난 일이지만, 양영대군이 배회하면서 그리워 바라본 그 마음을 지금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바위에 기대어 '시경詩經'에 나오는 노래를 외웠다.
산에는 개암나무 있고 "노래소리에 그리움이 있군요. 임금을 그리워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어찌 차이가 있겠습니까?" "임금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륜인지라, 고금에 무슨 차이가 있겠소. 다만 내 나이 아직 예순 일곱이라. 미수 어른이 이 산을 오를 때 그때 나이에 열 살하고도 여섯 살이나 미치지 못하오. 그런데도 미수 어른은 걸음걸이가 날 듯하였는데, 나는 기력이 쇠진하고 숨이 차서 온갖 것이 괴롭다오. 도학과 문장에 고금의 사람이 서로 같지 못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지만, 근력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 것은 어찌 이리 차이가 나는가? 천지신명의 힘을 입어 내가 여든 셋이 된다면 비록 남에게 들려 업혀 오더라도 반드시 이 연주대에 다시 올라 옛사람의 발자취를 잇고 싶구려. 그대는 이를 기억하시오."
숙현이 말하였다. "그때 저도 따라오겠습니다. 저 숙현의 나이도 65세가 되겠지요."
이날 불성암으로 돌아와 하룻밤을 머물고 이튿날 노량진 집으로 돌아왔다. 함께 유람한 이는 이숙현과 생질 이유상, 집안의 동생 서공, 아들 홍원, 종질 홍진, 손자뻘 되는 이관기, 겸인 김상겸이다. [이종묵 서울대 국문과 교수 글 일부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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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리산 자락 부곡동에 위치한 성호 이익선생[1681년(숙종 7)~ 1763년(영조 39)]의 묘역과 사당 ⓒ 2008 한국의산천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인 1707년 4월 성호 이익(1681~1763)은 관악산을 올랐다. 그는 어릴 때 병약하여 밖으로 나가 스승에게 배우지 못하고 형에게서 글을 배웠다.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품고 열심히 공부하였지만, 26세 때 스승이자 형인 이잠(李潛)이 장희빈(張禧嬪)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국문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성호는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산행을 나섰다. 삼각산(三角山)을 둘러보고 내려와 발걸음을 남으로 돌려 관악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연주대(戀主臺)에 오른 뒤 성호는 이렇게 글을 지었다.
이 해 4월 갑자일(甲子日)에 삼각산에서 길을 돌려 관악산으로 들어갔다. 어른, 아이 몇과 동강(東崗)을 경유하여 불성암(佛成庵)에 도착하였다. 노승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승려가 말하였다. "산에는 영주대(靈珠臺)가 있는데 실로 가장 높은 봉우리지요. 산의 빼어남이 이곳보다 나은 곳은 없답니다. 다음은 자하동(紫霞洞)인데, 자하동이라고 이름한 곳은 넷이지요. 불성암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곳을 남자하(南紫霞)라 하고, 남쪽에서 서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곳이 서자하(西紫霞)인데 모두 일컬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영주대 북쪽이 북자하(北紫霞)인데 자못 깔끔하기는 하지만, 동자하(東紫霞)의 기이한 볼거리보다는 못하지요. 못도 있고 폭포도 있어 영주대에 버금갑니다. 나머지 사찰이나 봉우리 중에도 종종 볼 만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에 느지막이 서쪽 바위에 올라 일몰을 보고 암자에서 잤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북쪽으로 올라갔다. 봉우리로는 용각봉(龍角峯)도 있고 비호봉(飛虎峯)도 있으며, 바위로는 문암(門巖)도 있고 옹암(甕巖)도 있었다. 모두 보고 지나가서 의상봉(義上峯)에 도착하였다. 곧 예전 의상대사(義上大師)가 머물던 곳이다. 관악사(冠岳寺)와 원각사(圓覺寺) 두 절터를 지나 영주대 아래에 이르렀다. 영주암 터에서 쉬었다가 마침내 영주대에 올랐다. 바위를 깎아 돌계단을 만들었는데, 바위틈을 따라 사람이 올라가게 되어 있다. 바위를 잡고 기어 점점 올라가서, 빙 돌아 영주대에 이르렀다. 영주대 꼭대기는 3면이 훤히 바라다 보인다.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이 서 있는데, 절벽에 불상을 새기고 다시 바위로 처마를 만들어 보호하였다. 바위에 의지하여 단을 쌓았는데, 돌을 포개고 흙으로 메워 1백여 사람 정도 앉을 수 있다. 바위 끝에 또 구멍을 파서 등불을 넣어두는 곳으로 만들었다. 도성 안에서도 그 빛이 보이도록 한 것이다. 아마도 개국 초 불교를 숭상할 때 일인 듯하다. 다시 차일봉(遮日峯)을 넘어 북자하를 내려다보고 동자하를 지나 폭포를 보고 돌아왔다.
▲ 성호 이익 선생의 묘소 앞에는 산수유꽃이 만개했다.ⓒ 2008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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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람 저편 굽이치는 산맥넘어 원문보기 글쓴이: 한국의산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