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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사모 12월 모임에 나갔다. 탁사모는 탁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거의 매일 효령타운 탁구장에서 탁구를 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삼겹살로 저녁식사를 하고 2018년도 야유회에 관해 의견도 나누었다. 이렇게 끝내려고 하는데 여자 회원들이 노래방에 가자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따라 갔다.
나는 노래를 잘 못한다. 그래서 빨리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두고두고 부르는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부대끼지 않는다. 이후로 여자 회원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이어지더니 김 선생의 구수한 목소리의 노래가 멋들어지게 울린다.
그런데 그 노랫말이 가슴을 후벼 판다. 한국 전쟁 이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넘어야 했던 그 지긋지긋한 보릿고개를 생각나게 한다.
그 노래의 가사를 다시 읽어본다.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에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초근목피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에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통곡이었소.
아이들은 뛰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 노래 가사는 ‘아야, 뛰지 마라.’고 한다. 왜? 시끄러우니까? 아니다. ‘배 꺼질라.’ 라고 했다. 그것은 어머니의 ‘가슴 시린 보릿고개’다. ‘어머니의 한숨’이라고, ‘어머니의 통곡’이라고 읊었다.
김 선생이 부른 대중가요 ‘보릿고개’가 가난했던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나의 할머니가 생각나게 한다.
1950년대 그때는 배가 고팠다. 당시 나의 생모는 전쟁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갔었다. 해남 연동의 언니 집으로 갔다가 절골 친정으로 갔다. 젖먹이 여동생을 등에 업고 갔다.
나는 두 살 아래 남동생과 함께 할머니 슬하에서 살았다. 그 때 인민군들이 집에 왔다. 머리에 인민군 모자를 쓰고 어깨에 총을 메고 와서는 창고를 뒤지고, 솥까지 열어서 먹을 것을 가져갔다. 무조건 다 가져갔다.
할머니는 쑥을 캤다. 그것으로 죽을 끓이셨다. 쑥도 먹을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소나무 속껍질 즉 송피로 죽을 끓이셨다. 그 비참한 삶을 가시에서는 ‘초근목피(草根木皮)’라고 한다. 할머니의 눈물겨운 정성으로 연명했고, 지금의 내가 있다.
할머니는 앞 냇가에서 빨래를 하셨다. 그럴 때면 물놀이를 했다. 고무신을 물에 띄우기도 하고 돌을 갈아 물에서 색깔을 내기도 했다. 장날이면 할머니를 따라 장에 갔다. 탐진강은 거북 모양의 징검다리로 건너갔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껑충껑충 뛰어 건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를 사랑해 주셨던 할머니는 1988년까지 사셨다. 향년 92세였다.
대중가요 ‘보릿고개’가 나의 생모도 생각나게 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어머니를 따라 광주로 나왔다. 어머니는 손재봉틀을 돌려 옷을 만드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입힐 추석 옷이었다. 아들 셋이고, 딸 둘이었으니 명절이 되면 다섯 벌의 옷을 만들어야 한다. 어머니의 고생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그 희생이 한 없이 고귀하게 느껴진다.
어머니는 1956년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다섯째 막내 동생의 나이는 불과 3살이었다. 그 어머니의 기일은 음력으로 동짓달 초엿새로 당시에는 12월 23일(토)이었다. 김 선생이 부른 대중가요 ‘보릿고개’가 어머니의 61주기도 생각나게 했다.
가난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가난했던 시절의 노래 ‘보릿고개’가 나의 어린 시절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살리게 한다. 할머니와 어머니도 생각나게 한다. 애틋한 정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