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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15 - 세계 최강의 가마 군단인 몽골군의 조직과 구성에 대하여 살펴보다!
몽골군은 전성기에 상대할 적이 없는 군대였으니 전투를 하면 거의 연전연승을 했는데..... 이는 농경 정착민이 보병
이 중심인 정주 국가에 비해 유목민족으로 초지를 찾아 정기적으로 이동하고 또 집단 사냥을 통해
기동성과 조직을 갖춘 때문이니.... 한니발이나 훗날 2차대전 독일의 롬멜 기갑군단이 이런 부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농경민족의 보병은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원정을 가면 하루 이동 거리도 상당히 짧고 또 짐수레 우마차에 식량을
비롯 군수물자를 싣고 가야하며 적을 만나면 쉽게 후퇴하는게 불가능하니 싸우는 수 밖에 없지만 기동력을 가진
몽골군은 불리한 싸움을 절대로 피하니 달아났다가 유리한 때와 장소를 선택해 전투의 주도권을 쥐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몽골 초원에서 자란 말들은 특유의 보법을 배우게 되니 말의 체력 소비를 줄이면서 기수에게 부담도
줄여서 말에 탄채로도 잘 수 있도록 하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몽골 초원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
에는 추운 최악의 환경에 적응하다보니 다른나라 말 보다 투박하게 생겼으나, 그 덕에 고비사막이나
러시아의 추운 환경에서도 끄떡 없었으니 이 말 덕에 몽골 제국은 엄청난 기동력과 진격 속도를 가집니다.
두번째로는 양질의 철광석이었다. 징기즈칸이 부족을 통일하고 요동까지 차지하면서 몽골과 요동
에서 나오는 양질의 철 대량채굴을 바탕으로 갑옷을 입은 중기병을 적극 양성하였다.
당시 중기병들은 가히 탱크에 맞먹는 위력을 지녔기에 몽골제국 군 전력 강화에 큰 이바지를 하였다.
세번째로는 신호체계이다. 전장에서 효시라는 수단으로 쪽지를 아군측에 보내거나 소리나는 것을 대기중인
부대에게 적 위치를 향해 쏴서 진격하게 하는 수단을 가짐으로써 몽골제국군은 효율적으로 일사
분란하게 움직였고 혼전중에는 북이나 징을 동원해 군부대에게 신호를 주며 빠른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1주년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사건은 바이든 대통령의 키이우 깜짝 방문이었습니다.
그는 지난 20일(현지시간) 비행기편으로 폴란드까지 이동한 후, 폴란드에서 키이우
까지 10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이동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나 화제가 됐습니다.
우크라이나의 국영 철도 기업인 '우크라이나 철도 (Ukrainian railways)' 의 대표는 모든
직원들이 이 역사적 방문을 성사시킨 것에 매우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우크라이나 철도 최고경영자(CEO) 인 올렉산드르 카미신은 CNN에 출연해 "바이든 대통령이 우리 열차를
이용했던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해당 열차는 '레일포스 원 (Rail force one)' 이라 부르고
있다" 며 "지난해 2월 전쟁 발발 이후 전 세계 300명 이상의 대표단이 우리 열차를 이용했고,
우리는 이 정상들을 안전히 수송하는 임무를 '강철외교 (Iron Diplomacy)' 라 부른다" 고 강조했습니다.
이 우크라이나 철도는 세계에서 6번째로 큰 철도운송업체입니다. 우크라이나는 옛 소련 시절부터 곡창지대의 곡물
을 수송하기 위해 촘촘히 철도망을 깔았고, 현재 2만km에 가까운 철도망을 보유하고 있으니 그래서
전쟁 초반부터 우크라이나 전역에 퍼진 이 거대한 물류 동맥을 장악하는 것이 승패를 좌우할 것으로 예측됐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생각보다 이 철도를 경시했는데요. 우크라이나 통신사인 우크린포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철도와 군 당국은 개전 직전인 지난해 2월20일께 부터 러시아와 연결된 철도들을 모두 파괴하고
있었지만 러시아군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러시아군이 4일 뒤인 24일부터 진격하기
시작했을 때, 우크라이나군은 1차 수비선까지 물러났지만 러시아군이 쓸 수 있는 철도는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보급품 수송이 불가능해진 러시아군은 군인들에게 한달치 보급품을 한꺼번에 지급했습니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전쟁 초반 벨라루스에서 우크라이나 북부 국경을 거쳐 키이우로
진격한 3만명의 러시아 부대는 개전 이틀전인 2월22일 막대한 양의 보급품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걸 다 짊어지고 전투에 뛰어들수 없었던 군인들은 대부분 받은 보급품을 벨라루스 암시장에 팔아버렸고, 가벼운
군장만 한채 전장으로 향했다고 알려졋으니 러시아군은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보급 문제를 안고 시작한 셈입니다.
보급 문제는 초기 러시아군의 발목을 잡게 되는데, 벨라루스 인근에서 곧바로 키이우를 공습한
선봉부대와 여기서 700km 떨어진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진격을
시작한 본진 기갑부대가 유기적인 공격을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인데, 선봉부대는 제대로
된 병참선을 확보치 못하고 우크라이나군 수비대와 싸우다가 결국 교두보 마련에 실패했습니다.
기갑부대는 철도를 통한 유류보급을 받지 못해 결국 탱크를 버리고 걸어서 행군을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2000
대가 넘는 탱크가 길바닥에 버려졌습니다. 개전 초반에 나왔던 뉴스들을 살피다보면 우리 교과서에서
배운 '살수대첩' 이 생각나니, 그때 수나라군도 러시아군과 마찬가지로 보급 문제를 안고 전쟁을 시작했었습니다.
수서 (隋書) 에 따르면 서기 612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양제는 113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수 양제는 우중문에게 별동대 30만명을 이끌고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진격하라고 명합니다. 고구려 방어선을 뚫고 중심부까지 깊숙이 들어가는 이 작전은 매우 위험한 작전이었습니다.
일단 보급선이 차단된 채로 대군이 진격해야했기 때문에 우중문은 병사들에게 최대한 많은 보급품을 지급
하라고 명합니다. 우중문은 병사들에게 1인당 3섬(80kg) 에 달하는 무기와 군량, 말에게 먹일
건초를 들고 진격하라고 지시했죠. 하지만 이걸 짊어지고 요동성에서 평양성까지 수백킬로
미터를 걸어가야하는 병사들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군량을 몰래 땅에 묻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군량을 버리면 사형에 처한다고까지 엄포를 내렸지만, 30만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일일이 다
수색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결국 수나라군은 고구려군과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군량이 떨어져 퇴각했고, 반격에 나선 고구려군은 대부분의 적군을 궤멸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이처럼 아무리 강군이라도 보급에 실패하면 참패를 면키 어려웠으니 고대부터 군량과 무기, 병력을 수송하는
'병참(兵站)' 은 매우 중요한 학문으로 떠오릅니다. 오늘날 물류라는 단어도 똑같이 이 'Logistics' 를
쓰는데 원래 이 말은 현재 수학이나 컴퓨터 공학에서 논리를 뜻하는 로직(Logic)에 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병참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장군들은 참패를 면치 못했습니다. 특히 이를 망각했던 장군들은 역사 속의
졸장으로 악명을 떨치곤 했으니, 2차대전 때인 1944년 당시 일본군 15군 사령관으로 인도를 침공한
'임팔작전' 을 무리하게 감행해 패전을 몰고 온 무타구치 렌야 (牟田口 廉也) 중장이 그런 인물 중 한명입니다.
1944년 3월, 무타구치 중장은 자신의 휘하에서 미얀마 일대에 주둔 중인 15군, 8만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영국령 인도를 무리하게 공격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병참문제를 지적하는 참모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무작정 공격을 감행하는데.... 정글지대인 벵골만 일대로 진격하면서 발생할
보급 문제에 대해 적의 것을 탈취해 진격하는, 13세기 몽골군의 '징기스칸' 작전을 취하자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은 철도나 도로망이 미비한 밀림지대를 통과하기 위해 탄약을 소와 말 등 동물에 짊어지게 해서 진격하고,
탄약을 옮기고 나면 가축을 잡아먹으면서 전쟁을 이어나가면 된다고 주장했는데.... 이 가축에게 먹일
2만톤(t) 에 달하는 건초를 옮기는 문제부터 당장 병사들에게 먹일 군량을 어떻게 옮길지는 전혀 생각지 않았습니다.
참모들이 밀림지대에서 비행기로 군량을 투하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제안을 했지만 이것도 묵살해
버립니다. 밀림에서 비행기가 필요없다는 논리였지만 적군인 영국군은 이 방식으로
군량 보급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했습니다. 결국 그가 이끌던 8만5000여 병사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5만명 이상이 굶주림으로 사망하며 작전은 대 참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칭기즈 칸의 대외 정복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으니 그 중 하나는 칭기즈 칸이 본래 관심을 가졌던
쪽은 세계 정복이 아니라 교역이었다는 것인데... 원래는 북중국과 서요 정도로 만족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서요는 몽골 통일 이후 칭기즈 칸에게 패하여 도주했던 나이만 족의 왕자 쿠츨루크가 장악한 상황이었으니
서쪽과의 교역은 호라즘 왕국과 교류하는 정도로 그치려고 했는데, 호라즘 왕국이 거부하는 바람에
"그럼 직접 길을 트겠다" 라는 식이 되버렸다는 것이고 서쪽으로 계속 진출하다보니 일이 커졌다는 결론입니다.
다른 가설로 몽골족은 원래 싸움이 끊이지 않다가 겨우 통일국가를 이룩한 상태라서 얼마든지 내부 분쟁의
씨앗이 존재했고, 이러한 내부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 밖으로의 원정을 감행했다는 설도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론, 테무진이 "칭기즈 칸" 의 호칭을 얻으면서 부터 세계를 지배
한다는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고, 그것이 타국과의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칭기즈 칸의 정복 활동을 살펴보면 연경(북경)을 포위한 후에도 정치적 복속과 조공품의 상납만 약속받고 초원으로
돌아가는등, '지배' 하는 것에 큰 욕심을 가졌다고는 보이지 않는 점이 많으니 원정은 지배가 아니라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목적이 짙었으며, 이 과정에서 응징과 복수를 명분으로 내걸었을 뿐이며 몽골이 그나마
정복전에 가까운 전쟁 양상을 띄게 된 것은 오고타이 칸 시절부터며 아무리 빨리 잡아도 칭기스 칸 말년부터 입니다.
칭기즈 칸이 정복한 대외 영토가 워낙 넓은지라 평생을 대외 정복에 힘 써온 것으로 착각할수 있는데,
칭기즈 칸의 생애 대부분은 몽골 통일 전쟁을 하면서 보냈으며.... 가문이 망하고
부족들이 흩어진후 적대 부족에 노예로까지 붙잡히는등 완전히 밑바닥에서 부터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겨우 세력을 일으킨 초창기에는 강한 부족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으며, 특히나 전략에 능한 자무카가 그의 라이벌
이었는데 자무카는 끈질기게 테무진을 붙잡고 늘어졌으며, 마침내 자무카를 꺾은 다음 부터는 몽골 통일
과정이 순식간에 진행되었으니.... 몽골 통일이 1206년이고 칭기즈 칸 사망년도가 1227년이니, 대외 정복에
힘을 기울인 시기는 21년 밖에 되지 않는데 그 정도 기간에 세계 제국의 건설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세운 것입니다.
케시크 (keshig) 는 칸의 호위 부대를 말하는데.... 초기에는 수백 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수가 늘어나 나중에는 만명 단위가 되니, 이렇게 된 이유에는
정원 자체가 늘어난 것도 있지만 케시크들이 합류할 때 자신의 수행원들을 대동한 것도 있다.
칸의 막사는 기본적으로 사병들과 500m 간격을 두고 세워졌다. 이는 화살의 사정거리의 2배 정도에
해당하는 거리로 아마도 암살을 막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케시크들은 여기에 칸과 함께 주둔
했다. 활을 들고 수행하는 코로치와 칼을 들고 수행하는 울두치가 있었으며 일부는 바토르로 구성되었다.
몽골군의 숙영지에는 경계 임무에 사용되는 개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관리하는 것도 케식의 임무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개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은 케시크들이 따로
있었다. 사람 한 명당 2마리의 맹견이 할당되었으며 이렇게 사육되는 개들의 수는 수천에 달했다.
구성원은 몽골의 귀족과 피정복지의 지배 계급이 주를 이루었다. 기본적으로 칸의 막사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제국의 판도가 넓어지면서부터는 점차 정치적인 영향력을 넓혀갔다. 이들은
군 내부에서의 세력을 넓혔고 통치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형성했다.
피정복민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는 인질로서 의도가 강했고, 민족통합정책 의도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바토르는 돌격 임무를 맡은 결사대로 최정예 전사들과 죄수들로 구성되었다. 잘못을
범한 병사는 그에 대한 처벌로 바토르에 편성되기도 했다. 이 경우
결사대에서 3 ~ 4회의 전투를 치르고 살아남아야 본래의 부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탐마 (tamma) 는 정보를 수집하고 정복지를 관리하기 위한 소수 정예부대. 탐마에 소속된 대원을
탐마치 (타마친) 라고 하며, '탄마(tanma)' 라고도 불렀다. 초창기 이들은 몽골족 전체
병력중에서 차출된 일종의 파견부대였다. 목적은 점령지에서 몽골족의 통치를 유지하거나
가능하면 확장하는 것이었고, 초기에는 대체로 스텝지대와 정주(定住)사회의 경계지대에 주둔했다.
정규군이 아니어서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편성되었는데, 1250년대 훌레구가 페르시아와 이라크를 치러 갈때
형인 대칸 몽케가 '탐마' 군대를 내주었다. 페르시아의 역사가이자 일칸국의 관료였던 주베이니의
서술에 따르면, 이 '탐마' 부대는 활용가능한 몽골족 병사 10명당 2명을 뽑아 구성한 것이라고 한다.
후기로 갈수록 순수 몽골족으로만 구성되었던 규칙이 약해져 점차 정복지의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케리크는 주로 농경민족으로 이루어진 병사들로 방어를 담당하는 보병이다. 몽골의 판도가 넓어지면서
몽골인만으로는 영토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게 되자 피정복민들을 군대에
받아들였다. 투르크-몽골계의 유목민족들은 경기병 체제의 몽골군에 빠르게 동화될 수
있었으나 한족이나 페르시아인들처럼 불가능한 경우도 많았다. 이런 인원들은 대부분 케리크가 되었다.
주 구성원은 한족을 비롯한 농경민족이었으며 슬라브민족들도 대거 있었다. 초기에는 기병 중심으로 운영
되던 몽골군이었으나 점차 보병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후로는 이들에 대한 대접도 좋아졌다. 한족
보병들은 남송과의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으며 이례적으로 고급 지휘관으로까지 승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카라우나스 (Qaraunas) 는 페르시아 동부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조직적인 약탈을 일삼던 집단. 유명한
마르코 폴로도 1272년 이들과 조우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들 부대는 '탐마' 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오고타이 칸의 치세에 최초로 파견되어 인도와의 국경지대에 주둔
했다. 그들은 몽골의 다양한 부족 출신으로 구성되었고, 사실상 새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부족'이었다.
13세기 페르시아 사료(史料) 에 따르면 '카라우나스' 는 대개 일칸국의 적대세력으로 묘사된다. 이는
'카라우나스' 에 일칸국의 경쟁자인 킵차크칸국의 장군이 지휘하는 병력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훌레구가 페르시아-이라크 원정을 단행할 때 대칸 몽케가
'탐마' 로서 군대를 뽑아 훌레구에게 주었는데, 킵차크칸국에서도 전통에 따라 일부 병력을 지원했다.
훌레구의 정복이 끝난뒤 영토 경계를 놓고 두 칸국끼리 분쟁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킵차크칸국에서 차출되었다가
살아남았던 이들 병력이 '카라우나스' 부대와 합류해 일칸국의 배후를 교란했던 것이다. 계속된 전쟁 끝에
일부 '카라우나스' 는 일칸국에 항복했지만, 나머지는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칸국에 귀순해 계속 일칸국을 적대했다.
러시아인으로 이루어진 보병 돌격대도 있었는데, 이들이 몽골인 기병보다 우수한
장비를 지급받기도 했다. 대부분은 공성전의 전열에 내세워 화살받이로 썼지만?
케리크 이외에도 많은 피정복민들이 몽골 군대에 편입되었다. 중국측의 기록에는 몽골군에서 순수 몽골인은 소수
이며 나머지는 전부 피정복민의 군대였다는 내용이 있다. 여진족과 거란은 중장기병으로, 한족과 아랍인
기술자들은 공병부대에 소속되었다. 심지어 빈 근교에서 잉글랜드인 기사가 척후 임무를 보았던 기록도 존재한다.
병참 (兵站) 이나 전략전술 등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몽골인이 아닌 이방인들의 기록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남송인인 조공(趙珙)이 남긴 몽달비록(蒙鞑备录), 팽대아(彭大雅)와 서정(徐霆)의 흑달사략(黑韃事略)
등 중국측 기록을 비롯하여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 카르피니의 몽골여행기 등
유럽인의 기록에서도 많은 부분을 참고하고 있는데 몽골군이 가진 특징을 그들의 관점에서 자세하게 묘사했다.
병참선이 중요한데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병참을 유지하지 못하면 전투를 벌일 수 없고, 근거지에서 멀어
질수록 병참선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런 점에서 몽골군의 원정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를 들어 바투의 서방원정군은 근거지인 몽골고원에서 6,000km 이상 떨어진 곳까지 육로로 이동했다.
과장 좀 보태 지구 반바퀴 떨어진 곳의 토착민들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는데, 산업혁명 이전의 군대로서는 거의
불가사의 급이다.13세기 중반의 전선은 한반도에서부터 동부 유럽에 이르렀다. 직선거리로 대략
8,000km에 달하며, 이 정도의 전선이 역사에서 재현되는 것은 이후 19세기 러시아 제국이나 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자를 스스로 자급했으나 원정이 장기화될 경우에는 현지에서 조달하는 비율이 늘어났다.
현지의 자원을 수탈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악마 같았다. 피정복민들에게 조공과 식량, 목초지를 요구
했고 이를 거부할 경우 노동력으로 부려먹거나 화살받이용 돌격대에 써먹었다.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의 상당부분을 피정복민들에게 전가했기 때문에 본대의 전력이 소모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었다.
오히려 원정을 계속하면서 병력이 늘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투의 원정군은 볼가 불가르와 쿠만족
(킵차크)을 학살한 후 그들에게서 약 5만 ~ 7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징발했다. 러시아와 중국
문헌에는 공통적으로 1명의 몽골 병사당 10명의 현지인 포로를 잡아와 부역에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법 외에 보급로를 통해 물자를 운반하기도 했다. 주요 거점에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병참기지
로 삼는 한편, 장인과 수공업자들을 이주시켜 보급품을 조달하게 했다. 정주민족의 수공업자들의 기술을 인정
하고 그들로 하여금 각종 군수품을 생산하게 했다. 오고타이 시대에 역참이 정비되면서부터는 100리마다 역을
두었다. 물자 수송은 말과 낙타가 사용되었으며, 이들은 100kg 이상의 짐을 지고 하루에 수십km를 이동하기도 했다.
주식은 쿠루트 라고 하는 "말젖" 이었다. 모든 병사는 분말 형태로 된 마유를 지참하고 다녔으며 먹을
때는 물에 풀어 마셨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는 4~5kg 정도의 분말을 휴대하고 다니다가
아침 무렵에 500g 정도를 가죽자루에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저녁 때 불려 먹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유지가 물에 뜨는데 이것은 걷어내어 버터를 만들고 남아있는 액체를 마셨다고 한다.
종마를 사용하지 않고 거세마와 암말을 선호했는데 수유기에 들어간 암말 2필이 생산하는 마유는
병사 1명이 5달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 징기스 칸이 호라즘 원정을 떠나기
전에 병사들로 하여금 암말을 관리해서 전쟁기간 동안 말젖을 얻을 수 있게 하라는
구절이 있다. 암말은 병사들의 식량을 제공해 주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준비가 필요했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군이 말의 피를 먹었다고도 했다. 병사 1명 당 5필 정도의 말을 소유했기 때문에
이들에게서 조금씩 섭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의 건강을 해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비상시에만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더불어 마르코 폴로는 몽골군이 행군
중에는 간소하고 소박하게 식사했으며 불을 쓰지 않는 음식만으로도 10일을 행군할 수 있었다고 썼다.
가축을 데리고 다니며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몽달비서에 의하면 몽골인들은 전쟁을 할 때
양떼와 함께 이동하는데, 그 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그들로서도 다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곡식도 먹었다. 존 데 플라노 카로피니[4]는 이들이 겨울철에 기장으로 만든 죽을 먹었다고 한다.
매우 묽어서 죽이라기보다는 국에 가까운 상태였다. 겨울철은 말젖이 나오지 않는
시기로 마유 이외의 다른 식량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졌을 것이다. 피정복민의 군대를
위한 식량으로서도 곡식은 필요해서, 오고타이 시대에 정비된 역참에는 곡물을 갖추어 놓아야 했다.
행군 중에는 종종 수렵이 행해졌다. 네르제라고 불리우는 전통 사냥방식은 포위섬멸전의 모의전
형식을 띄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형태로 측면에서부터 사냥감을 에워싸
차례로 화살로 쏘아 잡는 방식이다. 이는 유목민족의 전투훈련인 동시에 식량확보 수단 중 하나였다.
몽골군이 목초지에 거점을 마련한 후에는 주변을 샅샅히 뒤져 먹을 것을 찾아 나서는데 사냥 역시 중요한
수단 중 하나였다. 이들이 사냥한 짐승은 중앙 아시아의 마못을 비롯하여 들개, 늑대,
영양 등 다양했다. 노획물은 국을 끓여서 모든 병사가 나누어 먹고, 일부는 남겨서 보존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보존식의 대표는 보르츠라는 물건이 있다. 과장스러운 언급에 의하면 소 1마리의 고기를 말려서
소의 방광에 넣은 물건이다. 먹을 때는 뜨거운 물에 보르츠를 약간 덜어서 불린 다음 먹는다.
몽골인의 식습관은 프랑크인들에게 어지간히도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카로피니는 몽골인들이 말의
태반과 이, 쥐를 먹는 것을 혐오스럽게 여겼고, 이는 다른 유럽인들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튜
패리스는 몽골인들이 인육과 피를 먹고 살아가는 족속이라며 거의 공황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타타르인들은 괴물이라서 인간의 생피를 마시는데 먹을 피가 없으면 흙탕물을 마셔서 갈증을 달랬다 하더라?
유럽인들의 기록에는 말안장 밑에 고기를 깔아 발효시켜 먹었다는 타타르 스테이크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이것이 훗날 햄버거의 기원이 되었다고 하는데 몽골이나 중국 측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카르피니는 몽골 군의 군장(무기) 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모든 몽골군은 다음과 같은 장비를
소지해야 했다. 좋은 활 2~3개, 화살이 가득 찬 화살통 3개,
도끼, 밧줄, 투구와 흉갑이 그것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병사는 휘어진 외날검을 썼다."
그러나 이것은 제국이 어느정도 정비된 13세기 중반의 일이고 13세기 초 급격히 팽창해 가던 몽골군이 어떤 장비를
썼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공통적인 의견은 그들의 주무기가 활이었다는 것이다.
몽골군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경기병이었고 그들이 사용했던 무기는 각궁이었다. 짐승의 뿔과 힘줄,
나무 등의 재료를 이어붙여 만든 복합궁으로 살상력이 뛰어난 위력적인 무기였다. 각궁의
최대 사거리는 약 300m 정도였지만 실전에서는 150m 미만에서의 사격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티모시 메이는 몽골군의 기마사격을 카라콜과 비슷한 형태의 것으로 보았는데,
이 전술에서 전열은 적 부대 앞 50m까지 근접하기도 했다.
활을 쏠 때 다른 유목민족과 마찬가지로 손에 깍지를 꼈다. 이는 시위에 손을 베지 않기 위한
것으로 활을 당기는 것을 좀 더 수월하게 해 주었다. 유럽의 활과는 달리 다른
아시아 국가들처럼 화살을 활의 오른쪽에 매겼는데 이렇게 할 경우 명중률이 좋아진다고 한다.
화살은 60개를 휴대했으며, 장인이 만든 것도 있으나 병사 스스로 만들기도 했다. 길이는 2피트(60.96cm) 정도로
프랑크인들의 화살보다 길었다. 화살촉은 쇠, 강철 등 금속제 외에 짐승의 뼈나 뿔로 만들기도 했는데,
화살들은 전부 용도가 달랐다. 폭이 좁고 뾰족한 화살은 갑주 관통용이었고 폭이 넓은 화살은 갑옷을
입지 않은 적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위한 것이었다. 촉을 뭉툭하게 만든 살은 생포해야 하는 적을 쏠 때 사용되었다.
금속제 찰갑을 입기도 했으나 두정갑이나 층상형으로 만든 가죽 갑옷이 선호되었다. 이는 만들기 쉬웠던 점도 있으나
층상형 갑옷이 화살에 대해 높은 방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몽골인들이 갑옷을 입은 건 아니어서
후위 부대원은 펠트로 된 외투만을 걸치기도 했다. 그래도 투구만큼은 금속제를 써서 강철로 만든 후에 동을 입혔다.
많은 피정복민들의 무기를 받아들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괄목할 만한 부분은 공성무기의 발달이다.
13세기 초 몽골군에게는 공성전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았으나
13세기 중반 이후 중국으로의 남진이 본격화되면서 공성무기가 크게 발달했다. 투석기와
노포, 높은 누대가 동원되었으며 특히 남송과의 전쟁에서는 아랍인들이 만든 신형 투석기가 활약했다.
목초지는 식량이나 무기 못지않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다른 요소가 모두 갖추어져도 말을 제대로 활용
할수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목민족 사이의 전투에서는
서로의 목초지를 확보하고 빼앗는 것이 중요했다. 농경민족의 농지를 황폐화시키고 그 자리를
목초지로 만드는 일도 있었는데, 이 경우 아군의 병참을 확보하면서 상대의 생산력을 저하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원정에 동원되는 병력의 규모는 사용 가능한 목초지의 면적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었다. 기동력을
살려 제 힘을 내기 위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했는데, 병사 1명이 5 ~ 6필 정도의
말을 소유했다. 이 말들을 먹여살릴 초지를 찾는 것은 사람이 먹을 식량 못지않게 중요했을 것이다.
적당한 목초지를 찾지못할 경우 전투에 투입할수 있는 말의 수가 제한되었을 것이다. 이 경우 지휘관들은 병사 1명당
사용하는 말의 수를 줄일 것인가, 아니면 작전에 투입할 인원을 줄일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을 가능성이 크다.
서아시아에 도착한 몽골군은 만족할 만한 목초지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그 결과 일 칸국의
기병들은 점차 전형적인 아랍의 중기병처럼 변해갔다. 말 5필 이상을 운용하는
경기병 중심 체제에서 1필이나 2필만을 데리고 근접전을 위주로 하는 돌격병의 비중이 늘어났다고 한다.
몽골인들 사이에서 말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식량을 제공해
주고 이동수단이 되며 전장에서는 든든한 아군이었다. 말은 사람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다.
몽골 병사는 2 ~ 3마리에서 6 ~ 7마리까지 말을 소유했고 전장에서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최고의 상태인 말들을 탈
수 있었다. 숙영지에는 말을 관리하는 부대가 따로 있었다. 이들은 마초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날이 어두워
지기 전에 가장 먼저 텐트를 쳤다. 하지만 비상시를 대비해서 모든 병사들은 적어도 2필의 말을 자신의 곁에 두었다.
숙영지 사이의 거리를 벌려 띄엄띄엄 야영에 들어갔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말에게 풀을 먹이기 위한 것이 가장
컸다. 그래야 말을 끌고 다니기 쉬우니까. 정주민들이 먹이던 콩이나 귀리 등의 곡식은 잘 먹이지 않았고 주로
풀을 먹게 했다. 곡식은 몽골에서 귀하기에 말에게 먹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에게 주로 풀을 먹일 수 밖에 없다.
프랑크인들이 힘센 종마를 선호한 것에 비해, 몽골인들은 유순하고 지구력이 좋은 거세마나 말젖이
나오는 암말을 골랐다. 물론 몽골의 말은 기갑이 120~140밖에 안 되는 조랑말인지라
품종이 프랑크인들의 힘센 종마보다 체격적으로 뒤쳐지는 편이었다. 칭기스 칸
대까지 말은 몽골의 주요 수출품이었으나 오고타이 칸은 몽골마를 외부로 반출하는 것을 금했다.
전력전술 역시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비사에는 '끌 전법' 에 관한 대목이
나오지만 은유적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그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원정 계획(작전)은 씨족 집회인 쿠릴타이에서 결정되었다. 1년을 기준으로 볼 때 초봄에 대략적인 계획을 잡고
5월의 집회에서 모든 족장들이 모여 구체적인 목표를 결정한다. 쿠릴타이가 끝나면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 자신의 부족민들과 세부적전략을 짠 뒤, 더위가 가시기 시작하는 8월에 모여 출병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대규모 원정이나 먼 거리를 이동하는 원정은 연 단위로 준비기간을 잡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바투의 유럽 원정은
2년에 걸쳐 준비되었다. 먼저 스파이를 풀어 적의 상태를 살펴보고, 이동경로를 확인하여
곳곳에 우물을 판다. 원정군이 지나갈 곳에서는 가축을 방목하거나 풀을 벨 수 없다. 아예 들어가는 것도 안 된다.
군영은 적을 감시하기 좋고 기상현상으로부터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고지대에 지어졌다. 조공의 기록에
따르면 성 안에 주둔하지 않고 항상 성 밖의 초원에 넓게 퍼져 숙영했다고 한다. 군영 사이의
거리는 매우 넓었는데 이는 말을 방목하기 수월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전염병을 예방
하는 효과도 있었다. 말을 관리하는 군영은 따로 있었지만 비상시를 대비해 2필의 말을 항시 곁에 두었다.
초병들은 목패를 교환하는 것으로 인수인계를 했고 암호는 자신들이 속한 부대의 지휘관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영이 한번 세워진 뒤에도 위치를 옮기곤 했는데 속임수로 적을 교란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때는 군영을 옮기되 처음 위치에 밝힌 불들을 그대로 남기고 조용히 이동했다. 날이 밝은 후에도 끄지 않았다.
행군을 할 때에도 밀집하지 않고 산개한 상태에서 이동했다. 언제나 척후를 보내 적의 매복과 기습을 경계했다.
원조비사에는 "설령 1렌의 인원이라도 이동할 때에는 척후를 보내 주위를 살펴라" 라는 구절이 있다.
몽골군의 야전(초원) 전술은 다소 거칠게 비약하면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나눌 수 있다. 척후병을
활용한 정보수집, 전장선택권 유지, 산개대형 유지와 소규모 부대의 유기적 움직임, 이를 바탕
으로 한 포위섬멸전, 각종 기만전술이 그것.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동력과 지구력이다.
원조비사에는 몽골군의 기본적인 전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195절에는 군대를 다룰 때 "카르가나처럼 나아가고,
호수처럼 나아가며, 끌처럼 나아가라" 라는 구절이 나온다. 바로 그 유명한 끌 전법에 대한 내용으로 보통
초총행 (草叢行), 해진립 (海陣立), 착전법 (鑿戰法) 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게 무슨 소린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애초에 원조비사 자체가 현대인의 관점에서 은유적이고 모호한 표현들이 많은데 이 구절도 그중 하나다.
대개 초총행과 해진립은 산개전술과 집단전술로, 착전법은 돌격전술로 추측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제각각이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그러나 확실한 증거는 없는) 근거도 갖추고 있다.
